소설리스트

천검지애-268화 (268/472)

<천검지애 268화>

268화. 파금왕(1)

악불군이 그림을 겹치자,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담수련은 고개를 갸웃했다. 종이 두 장을 겹치니 앞 그림만 보일 뿐, 뒤에 그려진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뭐가 나타난다는 거야?”

담수련의 반문에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를 투시할 수 있을 정도의 안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발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더구나 닥나무로 만든 한지는 내공이 일 갑자가 넘는 고수들도 투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꺼웠다.

만약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면, 누군지는 몰라도 고금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대단한 장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악불군은 붓을 꺼내더니 뒤에 보이는 그림을 앞 그림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그렸다.

“내가 왜 이걸 생각 못 했을까?”

악불군이 그린 그림을 본 담수련이 아쉽다는 듯이 탄식했다. 사실 그녀의 머리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방법이었는데 눈치를 못 챈 것이었다.

“어떻습니까?”

“그림의 윤곽을 이제 좀 알 것 같네. 거기다 여기는 글자인 것 같은데?”

“예, 현재 보이는 것만으로는 아직 정확히 어떤 글자인지 알 수 없지만, 각 그림의 조각들을 정확히 맞춰 모은다면 이 그림의 확실한 의미와 글자들까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만도 오십 장이 넘고, 아직까지도 더 많은 그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던데?”

“제 생각이 맞다면 드디어 수수께끼의 첫 단서를 찾은 것이니, 이제 아가씨의 머리와 제 기억력이면 조만간 완전히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긴 소군하고 내가 머리를 맞대면 못 풀 게 없지, 뭐.”

악불군의 말을 담수련도 기분 좋은 듯 받았다.

띵! 띵……!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금(琴)의 가락에 둘의 고개가 동시에 한쪽으로 돌았다.

청량한 금 소리는 배 전체를 울려 퍼졌지만, 어디서 타는지 소리의 근원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금을 타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지, 대단한 실력이네. 어떻게 금 하나로 이렇게 오묘한 소리를 낼 수가 있지?”

가만히 가락을 듣던 담수련이 탄복하듯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금을 타는 사람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단순한 장인이 아닙니다. 배가 움직이고 있음에도 소리에 크고 작음에 전혀 변화가 없는 걸 보면, 내공으로 금의 소리를 우리 배에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 누군지 알 것 같네. 돌아가면 계획을 좀 수정해야 할 것 같아.”

악불군도 금을 타는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떻게 수정하시려고요?”

“솔직히 난 우리가 아쉬워서 어떤 명분으로 찾아가 설득을 할까 걱정을 했었거든.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우리보다 저쪽이 더 아쉬운 것 같아.”

처음 절강을 떠날 때, 악불군과 담수련은 정파에서 푸대접을 할 경우 체면도 차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각 파에 따라 연구를 했었다.

한데 사천의 삼파도 도움 요청을 거절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선뜻 허락을 했고, 무당파 역시 일대 제자들을 만난 후 방문을 할 명분을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오히려 무당파에서 먼저 초청을 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강하게 거절을 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올까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상대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만큼 지금 무림이 불안정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천호방이라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세력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천무성궁은 좀 뜻밖이야.”

분명 하연목은 그들을 부른 사람이 천무성군의 파금왕이라고 했다. 명호와 지금 들리는 금(琴) 소리를 조합하면, 금을 타는 사람이 파금왕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가 있었다.

시작부터 다짜고짜 따라오라고 한 것은 분명 악불군의 기를 꺾어 놓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런데 악불군이 강하게 받아치고 그냥 지나쳐 왔음에도 따라왔다는 것은, 이번에도 아쉬운 쪽은 파금왕이라는 의미였다.

다만 담수련이 의아한 것은 파금왕이 천무성궁의 호법이라는 사실이었다.

무림맹의 맹주이자 무황 중 일인인 천제무황이 궁주로 있는 천무성궁은 무림 최고의 권력 집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천호방을 필요로 할 이유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받아줄까요, 아니면 이번에도 내칠까요?”

“내친다면 어떻게 할 건데?”

“저도 내공으로 금이 내는 소리를 쳐 내는 것이지요.”

“소리도 쳐 낼 수 있어?”

“저분이 지금 우리에게 보내는 소리는 그냥 소리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이 배 안에 있는 수하 중 반은 즉사할 것입니다.”

“음공(音功)에 대해서 듣기는 했지만, 정말 저 음이 그런 위력을 가졌다는 거야?”

“지금은 공격의 의도가 없기에 듣기 좋아서 그럴 뿐, 대단히 위험한 무공입니다.”

“소군은 음공을 배운 적이 없잖아?”

“배운 적은 없지만 그동안 무공들을 정리하다 보니까 만류귀종(萬流歸宗)이란 단어가 이해가 되더군요.”

소군의 답에 담수련은 탄복하는 표정으로 악불군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군의 깨달음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아.”

“깨달음은 아니고 그냥 경험이 쌓인 것이지요.”

“아니야. 소군이 많이 달라진 것이 난 느껴져.”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분명 예전이나 지금이나 악불군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외 모든 것이 잠룡세가에 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아가씨께서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나야…… 아니다.”

나야 죽을 때가 돼서 그렇다고 말하려던 담수련은 나오는 말을 급히 삼키며 말을 바꿨다. 악불군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자신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던가…….

“저분 보고 여기로 오시라고 말할 수 있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오시라도 해 봐. 최대한 예의 있게 해.”

“알겠습니다.”

금이 내는 음악은 배 전체를 덮고 있어서 어디서 들려오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왼쪽 난간으로 가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는 천호방의 방주인 악불군입니다. 귀인께서 너무 귀한 음악을 들려주시니 머리가 맑아오는 것 같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자 합니다. 만약 시간이 되신다면 이리로 오셔서 차 한 잔 드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악불군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작았다. 음악과는 달리 멀리 퍼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파금왕의 귀에 정확히 전달되었는지, 곧 답이 들려왔다.

“노부가 어디에 있는지 이렇게 쉽게 알아내다니 소문대로 대단하긴 하구나. 노부가 잘 타는 음이 있는데 네가 끝까지 다 듣는다면 차를 마시러 가마. 대신 듣는 것을 포기한다면 네가 노부 있는 곳으로 오거라.”

“제가 음에 대한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듣는 것은 좋아합니다. 세상에 듣기 힘든 좋은 음을 들려주실 텐데 어찌 포기하겠습니까?”

“힘들면 포기해도 된다. 괜한 고집으로 내상이라도 입으면 되겠느냐?”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견디기 힘들면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른 말을 잘 알아듣는 것을 보니 마음에 드는구나. 그럼 조심하거라.”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금의 소리는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전체로 퍼져 있던 음파는 악불군에게 집중이 되고 있었다.

[탕! 타탕! 팅……!]

악불군은 귓속에서 폭죽이라도 터진 듯 금의 소리가 고막을 울리자 얼굴이 굳어졌다. 하나, 고막을 울린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체감했다.

남북 횡단을 할 동안 수많은 무림인들을 상대해 왔다. 그리고 그중에는 음공을 사용하는 고수도 있었다.

하지만 파금왕의 음공은 차원이 달랐다. 음파가 마치 진검이라도 되는 양, 그를 찌르고 베고 있었다.

악불군을 보고 있던 담수련은 갑자기 음이 끊어지더니 악불군의 옷이 태풍이라도 만난 듯 펄럭거리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로 사화가 달려와 진을 치고, 다시 그녀들을 흑석영을 비롯한 네 명의 방주 호법이 호위하는 형국이 이루어졌다.

만약 악불군이 담수련을 보호하지 못할 비상 상황이 벌어질 때를 대비해 사전에 약속된 방어진이었다.

“흑 호법, 악 방주님이 왜 저러시지요?”

담수련은 악불군의 몸이 움찔움찔 움직이는 것을 보자 불안한 듯 물었다.

“파금왕의 참혼십팔파금공은 강호에서는 최고의 음공으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 방주님께서는 지금 대단한 공격을 받고 계실 것입니다.”

“호법들이 도와줄 수 없어요?”

“직접적인 싸움이라면 저희가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지금 결투는 내공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내공이 약해서 도움을 주기 힘듭니다. 그리고 일대일 결투에 저희가 돕는다면 방주님의 명성은 단번에 떨어질 것입니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갑자기 배가 출렁이자 추국이 급히 담수련을 부축했다.

“세상에! 음공의 위력이 이 큰 배를 흔들 정도라니 정말 놀랍네.”

추국 덕에 넘어지는 불상사를 면한 담수련은 무공이라는 것에 절로 감탄을 하고 말았다.

무림세가의 천금으로 태어났고 무공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지만, 막상 내공의 대결을 보자 직접적으로 무기를 부딪치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음을 느낀 것이었다.

“저거 보세요!”

추국이 놀란 표정으로 한곳을 보며 소리쳤다. 배의 움직임이 멈춘 대신 장강의 물들이 출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무려 이 장 가까이 공중으로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담수련은 공중으로 솟구친 물줄기가 점점 배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자 직감적으로 악불군이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잠시 난파라도 할 듯 크게 흔들렸던 배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음공의 공격에 익숙지 못하던 악불군이 육지와 배에서의 결투가 다르다는 것을 깜빡하고 정면으로 음공에 대응하면서 그 충격으로 배가 흔들렸으나, 곧 배를 안정시키고 파금왕이 보낸 강력한 음파 공격을 밀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각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이제 악불군의 움직임은 거의 사라졌고, 펄럭이던 옷들도 이젠 잠잠했다.

“어르신의 양보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좋은 음악 들려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악불군이 포권을 하며 소리치자 모두는 드디어 대결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등에 금을 멘 노인 한 명이 강물을 밟으며 달려오더니 배 위로 올라섰다.

파금왕이었다.

약속대로 악불군이 자신의 공격을 모두 견디어 내자 직접 배로 날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음공은 몸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무공에 비해 내공의 소모가 컸다. 그래서 파금왕의 수련은 대부분이 내공을 키우는 것이었다.

일 갑자 넘게 쉬지 않고 내공을 축적해 왔는데, 이제 이립(而立)도 안 된 악불군에게 오히려 밀렸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떠나 허탈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노부가 좀 보자고 했는데 거절해서 너무 광오하다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한 자격이 있었구나.”

악불군은 모두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눈짓을 한 후, 파금왕에게 선두 정자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화는 잠시 미루고 우선 앉으십시오. 약속대로 제가 차 한잔 올리겠습니다.”

“전 천호방의 군사입니다. 그냥 담 군사라고 호칭을 해 주시면 됩니다.”

파금왕이 다가오자 급히 포권을 한 담수련은 그의 모습을 슬쩍 살폈다.

가장 정파다운 정파인들의 세력으로 알려진 천무성궁의 호법답게, 겉으로 풍기는 느낌은 아주 선해 보였다.

“군사라면, 혹시 지금 천호방이 벌이는 일들이 모두 네 머리에서 나온 것이더냐?”

금을 옆에 놓고 자리에 앉은 파금왕은 담수련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더니 물었다.

“질문을 들으니 어르신께서 저희를 찾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담수련의 답에 파금왕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질문을 한 자신도 그 질문 속에 자신이 악불군의 찾은 이유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생각 없이 그냥 한 질문인데 거기서 이유를 찾았다니 놀랍구나! 그래 그럼 내가 왜 왔는지 한번 말해 보거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