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69화 (269/472)

<천검지애 269화>

269화. 파금왕(2)

“저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오신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호무적검이라는 후기지수의 명성이 끝없이 오르고 있으니, 도대체 저것들 정체가 뭐야 하는 생각도 드셨을 거고요.”

파금왕의 질문에 담수련은 전혀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말했다.

“군사라면서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아니냐? 잘못하면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쁠 수도 있겠구나?”

“서로 의중을 속일 거면 뭐 하러 만나서 대화를 나누겠습니까? 그냥 지레짐작이나 하는 것이 더 낫겠지요.”

강단 있는 그 대답에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파금왕은 반문했다.

“그런데 내 질문 어디에서 내 의중이 드러나더냐?”

그의 반문은, 담수련의 짐작이 맞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은, 첫 만남에서 꺼내는 첫 말이 가장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일 확률이 많습니다. 사천에 왜 갔느냐, 정파를 표방하는데 진짜 정파냐 등등 물을 것이 참 많은데, 어르신께서는 계획을 제가 짰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들의 움직임에 뭔가 계획이 있다는 의구심을 자신도 모르게 표출하신 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내가 너희들의 움직임이 마음이 안 드는지는 어떻게 알았느냐?”

“의구심이란 원래 마음에 안 들 때 생기는 것이지요. 예쁘면 의구심이 생길까요? 아마 그냥 믿어 주실 겁니다.”

“군사의 나이가 너무 어려 보여서 잔머리만 발달했겠거니 생각했는데, 사람의 심리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노부가 잘못 본 것 같구나.”

파금왕이 뜻밖에 자신의 실수를 자인하자 담수련은 살짝 목례를 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저를 정확히 보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잔머리가 많이 발달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방주님에 대해서는 잘못 보신 것이 맞습니다. 어르신께서 방주님에 대해 오늘 정확하게 아시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믿고 있어……. 젊은 나이에 이런 믿음을 얻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

파금왕은 담수련의 말에서 진정을 느끼자, 차를 따르고 있는 악불군을 유심히 살폈다.

“다도(茶道)를 중시하나 보구먼?”

악불군은 주전자를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는 아주 천천히 차를 따르고 있었다.

“제가 그다지 부유한 생활을 하지 못해 다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것은 다도가 아니라 어른에 대한 존경의 의미라고 보아주십시오.”

‘이놈 봐라?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재주가 있군…….’

천무사왕은 악불군의 명성에 흠을 만들려는 현기수사의 방식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악불군이 계속 승승장구하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악불군을 직접 보고 판단하기로 결정한 그들은, 가장 판단력이 뛰어나다 생각하는 파금왕을 보낸 것이다.

시작부터 악불군의 기를 꺾고 강하게 몰아쳐 최소한 진정한 의도라도 알아낼 생각이었던 파금왕이었지만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악불군이 조금씩 마음에 들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 탓에 오히려 파금왕은 스스로가 난감해졌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맹주님께서 본 궁의 궁주님이신 것은 알고 있겠지?”

“정파의 최고 어른이시자 무황으로 불리는 맹주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천하에 있겠습니까?”

“그럼 천호방이 정파인 것도 확실하겠지?”

“정파라고 표방은 했지만, 어르신이 생각하는 정파와 제가 생각하는 정파가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파면 정파지, 무엇을 모른다는 말이냐?”

“정파란 정의와 협을 중시하는 문파를 말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의를 세우고 협을 행하는 것은 정파의 기본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그 정의(正義)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는지가 문제겠지요. 전 정의는 약한 백성들을 어떻게 도와주느냐를 기준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림 정파의 정의는 자파를 중심으로 정해지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대단히 오만한 생각을 하는구나! 무림 정파들이 정한 정의의 개념은 천 년 가까이 가다듬어 정립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네가 감히 정파를 향해 정의의 기준을 주장한다는 말이냐?”

“아마도 제가 틀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젊어서 그런지 스스로 납득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무림맹에 가입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왜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느냐는 당연히 나올 질문을 가볍게 봉쇄해 버리는 악불군이었다.

“그럼 계속 무림맹을 멀리하겠다는 것이냐?”

“세상에는 가까운 것과 먼 것, 단 두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는다 하여 무림맹과 반드시 멀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전 무림맹의 일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생각입니다. 다만 정의와 협을 행함에 있어서만은 무림맹의 명이 아닌 제 판단으로 행하고 싶을 뿐입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악불군의 말을 듣던 파금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건 또 뭐야?’

처음 악불군을 보았을 때 이미 기도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자신을 능가할 정도의 내공을 지니고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은 그였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점점 의기소침해지는 자신을 느낀 것이다. 무공의 높고 낮음이 아닌 타고난 악불군의 기도에 그의 기가 밀리기 때문이었다.

파금왕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항우와 함께 유방을 만난 범증이 유방이 황제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심한 갈등을 겪다가 유방을 죽이기 위해 책략을 펼쳤던 고사가 지금 자신의 처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현기수사가 왜 그답지 않게 음모까지 꾸미려고 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네 판단이 잘못되어 정파에 누를 끼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무림인들에 대한 판단은 최대한 무림 정파의 기준을 따를 것입니다. 제가 말한 판단은 무림인들이 양민들에게 대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위한다고 무공도 모르는 양민들을 죽이거나 괴롭힌다면 그건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힘을 가진 자는 자신의 기준이 아닌 힘이 없는 자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악불군의 대답은 파금왕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악불군의 말은 무림인이 아닌 학사들끼리의 대화에서나 나올 법한 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특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이군. 하나, 황상께서 너를 무림십왕에 봉한 이상, 네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무림에서의 네 영향력은 매우 커졌다. 노부는 네가 그 영향력을 무림맹에 반하는 곳에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제게는 초지일관 가지고 있는 신념(信念)이 있습니다. 신념이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지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파금왕은 악불군의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엇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차를 한 입에 털어놓은 파금왕은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시려고요?”

악불군과 담수련이 급히 따라 일어났다.

“천호무적검이 어떤 아이인지 직접 보고자 왔다. 그런데 대충은 안 것 같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있겠느냐? 노부가 정식으로 천호방에 무림맹을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땐 정중하게 보낼 것이니 오너라.”

“초청해 주신다면 최대한 시간을 내서 찾아뵙겠습니다.”

악불군이 포권을 하며 말하자 담수련이 슬쩍 끼어들었다.

“어르신, 방주님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아실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방주님은 언제나 예의 바르게 대화하시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유하다는 생각을 하십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건드리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집요하고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담수련의 말에 파금왕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그 말은 협박을 하는 것이냐?”

“제가 어찌 감히 어르신을 협박하겠습니까? 전 다만 방주님에 대해 알고자 오셨으니 다 알고 가시라고 정보를 드린 것뿐입니다.”

“정보를 준 것이라고 하니 고맙구나. 그런데 남들이 듣기에는 협박으로 들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거라.”

파금왕은 가볍게 넘기는 듯 말했지만 이미 협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르신의 조언, 뇌리에 기억해 두겠습니다.”

파금왕은 악불군과 담수련을 다시 한번 자세히 주시하더니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흠을 잡으러 오신 것 같던데, 협박까지 하시면 어떡합니까?”

파금왕이 사라지자 악불군은 피식! 미소를 지며 말했다.

“소군이 듣기에도 협박 같았어?”

“아마 누가 듣더라도 협박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라고 한 말인데 다행이네. 이유는 모르지만 약간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오신 분이야. 그런 분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 괜한 트집거리를 줄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우습게 보여서도 안 돼. 그러면 막 대할 수가 있거든. 어쨌든 큰 소리 없이 그냥 갔으니까 잘된 거 아니겠어?”

담수련은 무림맹에서 천호방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을 처음 만난 것치고는 그럭저럭 잘 넘겼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적대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저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분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소군의 명성이 높아지면 질수록 음해하는 자들까지 생길거야.”

“전 저희가 할 일을 하면 될 뿐,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건 상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게 마음대로 될까 몰라? 그건 그렇고 오늘 소군 너무 멋있더라. 말도 어쩜 그렇게 잘해?”

“그랬습니까?”

“정말 멋있었어. 아무래도 여자들 있는 데서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여자들 있는 데서요?”

악불군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굳이 여자 있는 데서 말하지 말라는 이유가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모르면 그냥 그런 줄 알아.”

악불군의 반문에 담수련은 얼굴이 발개져서는 급히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장강의 풍광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바람은 시원했다. 파금왕이라는 엄청난 인물이 그들을 만나고 돌아갔다는 사실은 이미 그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 * *

대단히 화려한 정청.

두 명의 가면을 쓴 사람 둘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정면에는 아름다운 쪽빛 구슬이 주렴처럼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마 황후 때문에 주원장에 대한 공략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합니다.”

마 황후는 주원장의 아내로 백성들까지 존경할 정도로 어질다고 알려져 있었다.

“마 황후의 미모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어찌 시간이 걸리는 것이냐?”

인영 중 한 명의 보고에 주렴 안쪽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원장이 유난히 색을 멀리한다 하옵니다. 더구나 마 황후가 원체 덕이 많아 주원장이 상당히 존중해 주는 터라 유혹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원나라를 공략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고 이제 드디어 됐다 싶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이 아니냐?”

“원나라는 우리의 조직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에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곳곳에 우리 조직원들이 숨어 있어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이 오기 위해서는 황실과 무림을 동시에 장악해야 한다. 주원장은 황조 초기이니 스스로 조심한다 치고, 무림은 어떻게 됐느냐?”

“천호무적검 때문에 계획이 많이 어긋났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인영이 보고를 시작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구천마성과 무림맹이 일촉즉발의 상황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호방이 절강과 강서 북부를 장악하면서 중립 지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금년 중에 두 세력이 부딪치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천호무적검이 이용 가치가 꽤 크다고 하지 않았느냐?”

“우선 잠룡세가 출신이라는 것이 가장 큰 약점입니다. 더욱이 담무룡의 딸인 담수련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담수련이 천상신녀냐?”

“예!”

“그 정도면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림 공적을 만들 수 있겠구나?”

“저희도 그것을 이용하여 천호무적검을 수족처럼 부려 먹으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 약점이면 우리 말을 안 들을 수 없을 텐데?”

“대단히 강직한 성격이라, 협박을 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악불군이 들었다면 경악할 내용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기에 악불군 주위의 소수만이 알고 있는 정보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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