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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70화 (270/472)

<천검지애 270화>

270화. 변화(1)

잠시 생각하는 듯 조용하던 주렴 안의 인물이 다시 물었다.

“아무리 강직하다 해도 결국은 사람이고, 정말 담수련을 사랑한다면 우리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속 천호무적검의 약점을 모아 놓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금령군주도 천호무적검에 대해 뭔가 행동을 취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무슨 행동을 취하려고 하는 것 같더냐?”

“금령군주도 천호무적검의 약점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원나라는 이미 끝났다. 태양천 덕에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이미 분열이 될 대로 된 터, 대공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판세를 바꾸기는 이제 틀렸어. 이제 천호무적검이라는 변수가 우리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아직은 두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너는 즉시 금령군주의 행동을 막아라.”

“곧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원장이 내놓은 무림십왕이라는 절묘한 한 수가, 은근히 우리의 일에 큰 방해가 되고 있다. 그 생각을 누가 했는지 알아냈느냐?”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혈교인데…… 거긴 어떠냐?”

“혈교에도 저희 세작이 상당히 많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들의 움직임은 우리 눈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혈우대마종은 본 궁의 염원을 망쳐버린 자다. 그럼에도 우리가 태양천에게 혈교를 치지 못하게 공작한 것은, 그를 통해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혈교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으니 좀 염려스럽다. 거기에 대한 방비책도 마련하고 있겠지?”

백 년 전, 그들은 계획대로 천하를 완전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마지막 대계의 완성을 보려는 순간, 혈우대마종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너무 강력하고 잔인한 혈우대마종을 상대하기 위해, 분열하여 서로를 죽이던 무림의 세력들이 뭉쳤기 때문이었다.

분열을 시키는 데 수십 년이 걸렸지만, 다시 뭉치는 데는 고작 이삼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국 무림에 의해 혈우대마종이 제거되었지만, 그들이 만든 혼란은 다시 오지 않았다.

무림이 다시 내분을 일으키기에는 너무 큰 피해를 입었고, 오히려 무황이라는 네 명의 걸출한 영웅의 등장으로 인해 무림의 세력 다툼이 정리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을 의심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들조차 숨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원나라의 등장이었다.

징기스칸은 너무 강력했고, 천하에 대적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모든 곳에 간세를 심어 놓았던 그들이지만 원나라만은 대비할 수 없었다.

나라도 없이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그들이 갑자기 그렇게 거대한 세력을 형성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하로 숨은 그들은 수십 년에 걸쳐 원나라 공략에 심혈을 기울였고, 드디어 원나라 황실과 태양천까지 자신의 조직원을 심는 데 성공했다.

원나라와 태양천에 내분이 생기기 시작하던 그때, 그들은 혈우대마종이 살아 있고 심지어 혈교라는 세력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혈교에 대한 침투가 시작되었고, 드디어 간세들을 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불구대천의 원수인 혈우대마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용하기 위해 계획을 수정했다.

하지만 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다.

“사대마전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혈교의 힘이 확실히 커졌습니다. 사대마종의 무공이 무황들과 비교해 그다지 떨어지지 않고 혈우대마종까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니, 곧 세상에 얼굴을 내밀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힘을 소진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소진시킬 생각이냐?”

“혈교에 대한 정보를 무림맹과 구천마성 그리고 혈해사계에 은밀히 전할 생각입니다. 혈우대마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 발 벗고 나서서 제거하려 들 것입니다.”

“혈우대마종과 마지막으로 싸운 자들이 그들이니,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그러겠지. 좋다! 허락할 터이니 혈교에 대한 정보를 넘기도록 해라. 그런데 한 명 더 포함시켜라.”

“누굴 포함시킬까요?”

“천호무적검도 무황들과 함께 무림십왕에 봉해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대우해 줘야지. 천호무적검에게도 혈교에 대한 정보를 넘기도록 해라.”

“존명!”

두 인영이 사라지자 주렴 안에서 탄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혈우대마종, 그 늙은이는 도대체 왜 아직 죽지 않는 거야? 정말 계륵(鷄肋) 같은 존재로구나…….”

그냥 모른 척하기에는 너무 강하고, 이용해 먹기에는 감당하기에 벅찬 상대였다.

이들은 어떤 세력을 가지고 있기에 신생 문파인 천호방은 물론 황실부터 혈교까지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을까란 의구심이 드는 대화였다.

* * *

악불군과 담수연이 탄 배가 항주의 포구에 도착하자 고철황이 여러 장로와 수십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저렇게까지 나올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배에서 그 광경을 본 악불군이 좀 과하다는 듯 말하자 담수련이 고개를 저으며 받았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 고 장로님께서 강호 경험이 풍부하신 것이 확실히 보여. 지금 천호방은 신생 문파야.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싸움을 걸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저런 식으로 세를 과시하는 거지. 더구나, 지금 소군은 무림십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보통 무림인들과는 달라. 난 잘하셨다고 봐.”

악불군과 담수련이 서로 다른 관점을 보일 때, 둘은 어떻게 할까?

간단했다. 악불군이 그냥 수긍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와아!”

악불군이 배에서 내리자 사방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천호방도가 내지른 것이 아니라, 구경을 나온 양민들이 터뜨린 환호였다.

잠룡세가의 과한 보호세에 시달리던 절강성의 백성들은 이후 반란군과 원나라 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큰 고초를 겪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잠룡세가가 활동을 멈추면서 치안이 붕괴된 곳이면 어디선가 나타나 양민들을 괴롭히는 수많은 왈패들과 흑도들이었다.

장사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면 그들에게 돈을 뜯기면서 오히려 손해를 보는 지경이니,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할 정도였다.

당연히 염왕채도 기승을 부려 자식들을 빛 대신 빼앗기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한 마디로 지옥 같은 삶을 살던 그들에게 천국을 선물한 것이 바로 천호방이었다.

악불군이 사천에 가 있는 동안에도 흑도와 염왕채를 놓는 자들에 대한 징치는 계속 이어졌다.

도둑은 잡히는 즉시 발목 힘줄이 잘렸고, 소매치기는 완맥이 잘렸다.

양민을 괴롭히는 흑도나 왈패들은 죽이거나 불구를 만들었고, 염왕채를 놓던 자들은 모든 재산을 몰수해 양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관부보다 더 강력한 징치에 그들은 버티지 못하고 다른 성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항주는 물론 절강성 전체가 천호방을 하늘 같이 믿고 따르고 있었다.

당연히 방주인 악불군은 그들에게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환호성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손 좀 흔들어 줘.”

악불군이 어색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 있자, 담수련의 그의 허리를 손으로 찌르며 말했다. 그리고 악불군이 손을 들고 흔들어 주자 또다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포구를 울렸다.

무림 세력의 수장이 양민들에게 이렇게 진심 어린 환영을 받는 경우는 실로 드문 일이었다.

“사천의 쾌거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림 십왕에 봉해진 것을 경하드립니다.”

손을 흔든 악불군에게 다가온 고철황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자,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없는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특별한 일은 없었겠지요?”

“몇 가지 일이 있었지만 잘 처리되었습니다. 총단에 돌아가시면 자세히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에 모인 겁니까?”

“저희가 포구로 향하는 것을 보자 방주님이 오신다며 스스로 따라왔습니다. 지금 절강에서 방주님의 인기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한 번쯤은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양민들은 모이지 못하게 해 주세요. 이런 광경이 황상의 귀에 들어가면 괜한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백성들에게 너무 인기가 많으면 황실에서는 요주의 인물로 감시를 시작한다. 역모란 것이 백성들의 인망을 얻으면서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고철황은 자신도 생각 못 한 세세한 부분까지 담수련이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 듯 답했다.

“제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상황은 만들지 않도록 지도하겠습니다.”

“한 번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자, 이제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방을 키워 나갈 준비를 해야겠네요.”

담수련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악불군도 백설의 등에 올라탔다.

흰 눈처럼 새하얀 백설을 타고 고철황 등 수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총단으로 향하는 악불군의 모습은 이미 절대자였다.

양민들도 그런 그의 모습에 환호성을 멈추고 모두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바닥에 엎드리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총단이 있는 지역의 양민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수만 명의 수하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수상한 자가 나타난다면 자발적으로 총단으로 달려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와는 그릇 자체가 다른 자야.’

포구 주루에 앉아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백룡신권은 범접할 수 없는 악불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며 갈등에 빠졌다.

무림맹에서는 절강을 백룡신권에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절강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며, 그는 악불군이 진정으로 양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느꼈다.

정파를 대표하는 자신의 본가인 황보세가에서도 그런 정책을 펼쳤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점점 악불군에게 매료되기 시작한 그로서는, 종산은자의 제안을 받아 보고서를 제갈우명에게 올린 것이 못내 마음에 부담이 되었다.

사실 종산은자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아직 증거가 없는 이상, 보고를 안 한다 해도 잘못은 아니었다.

‘좀 더 신중해야 했어…….’

백룡신권은 자신이 너무 경솔했음을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그래, 다시 담지는 못해도 새 물을 담을 수는 있어. 우선 이곳의 상황을 자세히 쓰고 내 의견을 담아서 새로운 보고서를 보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그때 무엇인가 느낀 듯 백룡신권은 고개를 계단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종산은자가 급히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잡혔다.

“다행히 아직 계셨군요?”

종산은자는 백룡신권을 보자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오더니 앞에 앉았다.

“전 이만 가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천호무적검에 대한 것입니까?”

“그의 가면을 확실하게 벗길 수 있는 증거입니다.”

“종산 선배님, 이제 그만하시지요? 천호무적검과 어떤 악연으로 얽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황보 대협, 내가 오랫동안 잠룡세가에 잠입해 있어서 아는데, 오늘 포구에 나온 천호방도 중 잠룡세가 출신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예요. 조사를 한번 해 보십시오.”

“선배님!”

커진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놀라 그들을 쳐다보자 백룡신권은 급히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말했다.

“담무룡의 아들이 있다는 대룡상단에 대한 조사가 어제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럴 리가 없는데? 노부가 그를 본 지 한 달도 안 됐습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알려 준 자가 있을 것입니다.”

“조사를 진행한 곳이 군사전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와 선배님뿐이고요. 제가 간세라는 말입니까?”

백룡신권의 강한 불만의 목소리에 종산은자는 당황했다. 오랜 첩자 생활로 다져진 눈치 덕분에, 그가 악불군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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