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73화>
273화. 보타검각(2)
“죄송하지만 소천주께서는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소천주요! 무림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면 나도 알아야 하지 않겠소?”
“소천주께서 하실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할 일이 없다 해도 방법은 알아야, 혹여나 생길지 모르는 군주의 부재 상황에서 내가 지휘할 수 있지 않겠소?”
“다음에 사용할 일이 없습니다.”
철무정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얼굴에 자신의 불만을 고스란히 보이며 다시 물었다.
“정녕 내게는 말해 주지 않겠다는 것이오?”
“소천주님께서는 빨리 몸이나 추스르세요. 빨리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을 나가시는 즉시, 저는 더 이상 소천주님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소천주님께서 최상의 상태로 나가신다 해도, 태양천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많은 위험이 있을 거예요.”
“호위 무사와 마차도 못 준다는 말이오?”
“호위 무사나 마차는 소천주님이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이라면, 다음에 나도 군주를 돕기 힘들 것이오.”
“다행히 소천주께 도움을 받을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난 군주께서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으신지는 몰랐소이다. 좋소! 그럼 내 수하들은 모두 어디 있소?”
“소천주님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격하는 자들을 유인하다가 대부분 다 죽고, 살아 있는 자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아마 돌아가신다 해도 이 일로 책임 추궁은 있을 것입니다. 태양천에 소천주님을 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꽤 많아졌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누, 누가 감히 위대한 징기스칸의 후예인 나를 내친다는 것이오!”
“그 대단한 혈통이 소천주님을 구하긴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천주님의 능력에 회의감을 품은 자들이 생겼단 사실은 없어지지 않겠지요.”
‘이, 이 계집이 감히!’
조롱 섞인 그녀의 말에 철무정은 당장이라도 공격하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올랐지만, 고립무원인 그로서는 그녀의 도움이 꼭 필요했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금잔화의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가 철무정의 가슴에 태양천 인사들에 대한 깊은 불신을 안겨 주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분열의 씨앗을 심어 준 것이다.
* * *
며칠의 휴식이었지만 악불군에게는 천금 같은 시간이 되고 있었다.
천하에는 악불군이 태웅천과 태룡세가의 원로들을 이겼다고 소문이 났을 뿐이지만, 실지로 악불군은 그들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상당한 위기를 맞이했다.
만약 철포삼을 시술받지 않았다면 그가 당했을 수도 있었다. 하나 전력을 다한 결투를 벌인 후에는 그의 무공이 일취월장하고 있음을 그도 느낄 정도였다.
악불군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더욱이 그는 파금왕의 음공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내공의 운용에 중요한 원리를 파악하면서, 그의 깨달음은 상승 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림내경일지선의 내공 원리가 왜 천륭검보와 그렇게 달랐는지 알 것 같구나.”
중원 무림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소림의 무공은 원래 외공 위주였다. 하지만 달마대사가 말년에 만든 달마심법에 의해 내공심법의 기초가 만들어졌고, 이후 달마대사와 맞먹는 대종사로 불리는 혜초대사에 의해 완전한 정립을 하게 되었다.
소림내경일지선은 무공심법은 아니지만, 제자들에게 내공의 원리를 쉽게 알려 주기 위해 만든 입문서였다. 이후 소림의 제자였던 장삼풍이 무당을 세우면서 내공의 운용법은 무당에서 더 발달했다.
그러나 천륭검보에는 내공심법이 없었다. 내공 운용법이 없다 보니 천륭검보를 익힌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내공운용법을 이용해 운기조식을 하며 내공을 키웠다.
초식은 천륭검보의 자세로, 내공은 운기조식을 통해 축적하다 보니 발전이 더뎠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무림 제일인자로 불리는 데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익힌 내공심법이 육관에서 배운 공배공이 다였다. 그는 공배공으로 운기조식을 해 봐야 기를 모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일찌감치 체득하고는 운기조식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죽어라 천륭검보의 자세만 수련했다.
천륭검보의 자세 자체가 운기조식을 겸한다는 생각은 악불군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다만 수련을 하고 나면 오히려 피곤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져 더욱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그 와중 내공은 단전에 쌓이는 것이 아니라 온몸 전체 퍼져 쌓이고 있었다.
악불군이 발견한 것은 바로 축적의 양이었다.
단전에 내공을 축척할 경우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단전이 조금씩 커진다. 더 높은 내공을 축적할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악불군은 운기조식이 아니라 전력을 다해 싸울 경우 몸에 쌓이는 내공의 양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싸울수록 강해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사실 그의 수련은 자세를 빠르게 바꾸는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담수련이 자는 시간에만 수련을 할 수 있기에 전력을 다한 수련은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전력을 다할 경우 방 안 전체가 흔들리는 부작용도 있었다.
‘만약 내가 극한의 결투를 한 것처럼 수련한다면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인데…….’
악불군은 자신의 거처를 육관이 있는 잠룡세가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육관은 아무리 격렬하게 수련을 하더라도 무너질 염려가 없도록 튼튼하게 지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담무룡의 비밀 연무관도 거기에 있었다.
“그럼 이제 아가씨께 이야기하러 갈 시간인가?”
담수련은 그에게 정리가 끝나면 얘기해 달라고 했었다. 물론 그냥 수련하라는 의미였지만, 그녀와 대화를 하는 자체가 좋은 그였다.
방을 나서는 그의 모습은 며칠 전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 * *
“군사님, 천호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만통광심은 부군사의 목소리를 듣자 눈을 떴다.
안으로 들어선 부군사는 두 손으로 봉서 하나를 건넸다.
천호방주 악불군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는 답이 빨리 온 것을 보니, 악불군에게 대해 분석을 더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만통광심은 자신의 방문 요청을 거절하건 허락하건 상당히 고심하리라 생각했는데 답장이 일찍 오자 약간 놀란 듯했다.
“무엇이라 쓰여 있기에 그러십니까?”
서철을 읽는 만통광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가자, 부군사는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든지 환영하겠다고는 하는데, 올 때 반드시 소문을 내고 와 달라는군.”
“소문을 내 달라고요? 정파를 표방하면서 본 성의 군사님과 만나는 것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하라는 말이군요?”
“재미있지 않나?”
“무림맹의 눈치 따위는 안 보겠다는 의미 같은데, 군사님 예상대로 정파가 나눠질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무림맹에 오해받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봐야지.”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아예 만남을 거절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대단한 자라는 말이다. 무림맹에게 오해는 받기 싫고, 본 성과는 사이좋게 지내고 싶고, 그러면서 무림맹에게는 자신들이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과시도 하고. 다목적으로 나를 이용할 생각인 것 같구나.”
“그걸 아시면서도 만나러 가실 생각이십니까?”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이 뭔지 아나?”
“기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기습이야. 그것도 상대가 친구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을 때 뒤통수를 치는 기습이 가장 효과가 좋지. 지금 천호방에서 손을 내밀었으니 우리는 거기에 장단을 맞춰 주면서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뒤통수는 언제라도 칠 수 있으니 말이다. 당장 답을 보내라 이번 달 안으로 찾아가겠다고.”
“알겠습니다.”
부군사가 나가자 만통광심은 회심의 미소를 지며 중얼거렸다.
“역시 머리싸움은 언제 해도 재미있단 말이야. 악불군이 미끼를 내게 던져 줄 것이고, 거기에 제갈우명은 어떻게 반응할까? 하하하! 아주 기대가 되는군.”
* * *
“또 무슨 일인가?”
소축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제갈우명은 우문상일이 나타나자 그리던 손을 멈추며 물었다.
그는 분석에 어려움을 느낄 때면 이곳에 와 홀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우문상일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보고가 있다는 의미였다.
“천호방에서 서찰이 왔습니다.”
“읽어 보았나?”
“구천마성의 만통광심이 천호방주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배첩을 보내 허락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갈우명은 결국 붓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만통광심이 정파를 분열시킬 작정을 한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천호무적검이 그것을 받아준 것이 더 괘씸하지 않습니까?”
“괘씸이라……?”
제갈우명은 자신을 또렷이 쳐다보며 할 말을 다하던 담수련의 눈을 떠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천호무적검이 본 맹에서 불쾌해할 것을 모르고 허락했을까?”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서찰을 보내, 만통광심이 먼저 배첩을 보냈기에 만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이겠지요?”
“천호방의 담 군사는 대단히 총명한 여인이다. 지금 이런 상황을 너무 간단하게 분석하면 안 된다.”
“군사님께서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구천마성이 어찰단의 압박에 지하로 숨을 때,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들이 파악한 영웅회의 비밀 본거지들을 어찰단에 알려 그들이 영웅회 소탕에 집중하게 한 후, 자신들은 숨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영웅회에서는 같은 중원 무림인인 구천마성이 그런 짓까지 할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 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뒤통수를 치는 계략을 꾸미는 데는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자지. 아마 천호방 역시 뒤통수를 치기 위해 준비를 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천호방이 거기에 넘어가고 있으니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넘어간다기보다는 본 맹에게 자신들을 압박하지 말라는 경고라고 보이는구나.”
“설마 입으로만 정파라고 외치면서 본 맹을 적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입니까?”
“적으로 삼을 생각이라면 이런 서찰을 보내지는 않았겠지. 만통광심이 배첩을 보낸 이면에는 어떤 음모가 있을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천호방의 생각은 무엇일지를 분석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유도하는 것이 우리 군사들이 할 일이네. 당장 군사전에 가서 모든 경우를 따져 보고 우리가 어떤 대응을 해야 할지를 찾아내게.”
“알겠습니다.”
“주의할 점이 있네. 만통광심과 담 군사가 우리보다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야.”
* * *
정파와 마도의 최고 두뇌들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시간 담수련은 악불군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몸 전체가 단전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야?”
악불군에게 며칠간의 수련상황에 대해 들은 담수련은 놀란 눈으로 물어보았다.
그녀 역시 들어 본 적이 없는, 무공의 상리(常理)에 완전히 벗어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아마도 믿지 못했을 말이었다.
“제가 하나 더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단전은 따로 수련이 가능합니다.”
“그럼 내공을 비축할 수 있는 곳이 두 군데가 된다는 거네?”
“예, 제가 듣기로 단전에 축척할 수 있는 내공의 최대치가 오 갑자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천륭검보를 통해 내공을 쌓아간다면 십 갑자도 가능해 보입니다.”
“와아! 그럼 소군은 무공이 무황도 뛰어넘는다는 말이잖아?”
“이론이 그렇다는 거지요. 실지로 그 정도의 내공을 가진다면 몸이 견딜 수 있을지도 의문이긴 합니다.”
“아니야. 나만큼 소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어. 내 분명 장담하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군은 할 수 있어.”
무한한 담수련의 믿음은 그 자체로 악불군에게는 동기 부여와 함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도 소군이 수련하는 동안 알아낸 것이 있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최고의 칭찬을 붙이며 받았다.
“아가씨께서 발견했다면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이 분명한데 기대되는데요.”
“호호~ 사실 쉽지는 않았는데 소군이 힘쓰는데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해냈지. 이거 봐 봐.”
담수련은 옆에 놓아 둔 돌돌 말은 종이 뭉치를 펼쳤다.
가로로 길게 늘어진 종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장보주의 그림들을 다 맞추신 겁니까?”
“응, 잠도 안 자면서 맞췄어. 솔직히 나니까 맞췄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몇 년은 걸렸을걸!”
자화자찬이었지만 실지로도 그녀가 아니었다면 하기 힘든 어려운 작업이었다. 수십 장에 달하는 그림들은 대부분이 비슷했고, 수작업으로 이루어져 크기도 정확하다고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산인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일까요?”
긴 종이에 그려진 그림은 수만 개의 봉우리가 늘어선 거대한 산이었다.
“십만대산이야.”
순간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