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74화>
274화. 단서(1)
“아가씨, 십만대산이라면?”
“맞아, 전설의 천년마교의 총단이 있다는 곳이야. 하지만 십만대산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도 몰라. 봉우리가 십만 개나 있는 산이 발견되지 않는 걸 보면 실존하지 않을 확률이 높은데, 장보주가 가리키는 것은 십만대산이 분명해.”
그림을 자세히 보던 악불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산과 구름의 모습이 교묘하게 십만대산이라는 글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게 글자 모양을 보이는군요.”
“응,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절대 보이지 않지만, 글자라고 생각하면 글자로 보여. 내가 보기에 이 그림 전체에 그런 식으로 여러 글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 십만대산처럼 금방 눈에 띄는 것은 없네.”
“어쩌면 장보주의 그림자 중 우리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그림을 그려 맞출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야. 더 확실하게 뭔가 알아내기 위해서는 장보주로부터 직접적으로 찾아내야 할 것 같아.”
“장보주가 단지 십만대산만 알려 주기 위해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사용했을 것 같지는 않군요.”
담수련은 장보주를 꺼내 들고는 햇빛에 요리조리 비춰 보며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우리가 모르는 대단한 것이 이 안에 숨겨져 있을 거야.”
“아무래도 금방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그래서 나도 급하게 생각하지 않을 생각이야. 할 거 다 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같이 조사할까 싶어. 그러니까 장보주는 다시 소군이 보관해.”
“알겠습니다.”
악불군이 장보주를 품에 갈무리하자 담수련은 십만대산이 그려진 종이를 다시 말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 마차 안이나 배 안에서 무료할 때 볼 거야. 또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그럼 소군의 거처는 언제 잠룡세가로 옮길 거야?”
“오늘 고 장로님과 추 호법님을 불러 의논한 후에 최대한 빨리 옮길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천신문을 계속 비워 두셔도 괜찮을까요?”
“조직 정비나 연계 같은 것은 나보다 문 군사께서 더 잘할 거야. 천신문의 제자들도 대부분 잠룡세가 사람들이니 단합도 잘될 거고. 그리고 어차피 소군이 지금 남창으로 갈 수 없잖아?”
“아가씨께서 가신다면 못 갈 것까지는 없지만, 아가씨께서 안 가셔도 된다면 우선은 이곳에 있는 것이 지휘하기에는 편할 것 같습니다.”
“천신문은 잠봉밀을 대체하기 위해 급조한 것뿐이야. 우선은 천호방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니까 천신문은 문 군사에게 계속 맡기려고. 다만 유모가 문제인데. 계속 천화궁에서 지내게 할 수도 없잖아?”
“천화궁주님께서는 잠룡세가 소속도 아니고 그렇다고 협력 세력도 아닌데,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무슨 의미야?”
“천화궁을 저희가 흡수하든지 천신문 밑으로 집어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께서 계실 때도 끝까지 고사(固辭)했다던데 지금 들어오겠어? 그런데 왜?”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다만 무상 진인을 만난 후로 전부를 다시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천화궁이 의심스러워?”
“천화궁주님께서 아가씨와 제게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는 압니다. 거기다 종리 단주님과도 삼십 년 넘게 친분을 다져온 의자매이기도 하고요. 다만 진짜 그런 조직이 있다면 저희 주위에도 분명 그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선 모든 사람을 다시 평가해 보는 중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고 장로님이나 백인막도 의심스럽긴 마찬가지 아니겠어?”
“당연히 그분들을 만났던 상황을 다시 생각하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백인막이 통째로 천호방에 흡수된 것이 터무니없이 쉬웠거든요.”
“난 소군이 그런 의심을 멈췄으면 해.”
“가능성은 있다고 보았는데, 아가씨 생각은 좀 다르신 모양이군요?”
“전혀 다르지 않아. 나 역시 소군처럼 모든 사람들을 다 의심하고 계속 조사를 하고 있어. 그런데 그 의심은 군사인 내가 하는 것은 괜찮지만, 방주인 소군이 직접 챙기는 것은 좀 그런 것 같아. 우리까지 그자들의 수법에 넘어가 분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싫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 문제는 아가씨께서 전담해 주십시오. 전 의심을 거두고 그냥 다 믿으면서 지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무상 진인을 만난 후 그들에게도 의심의 병이 생기기 시작했단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 * *
웅비보는 복건과 절강의 접경에 있는 문파였다. 크게 이름을 떨치려고 하지도 않았고, 세력을 확대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큰 문파들이 생기면 비위를 맞춰 주고 상납도 하면서 자신들 문파를 보존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흔히 말하는 군소 방파였다. 하지만 제법 전통이 있어서 절강남부와 복건 북부에서는 제법 영향력이 있는 문파였다.
그런 그들에게 통보가 온 것은 삼 일 전이었다.
절강의 문파가 될 것인지 복건의 문파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통보였다.
경계에 있는 문파들을 정리하자고 건의한 것은 동정어옹이었다. 만통광심을 만나기 전 경계를 확실히 해 놓아야만 이후 거래를 할 때 유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천호방은 정파라면서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구는 거지?”
응비보 보주 배장진은 내당당주인 계일우를 보며 물었다. 그의 앞에는 천호방에서 보낸 통보문이 놓여 있었다. 이미 삼 일째 그 문제로 고심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웅비보는 크기에 비해서는 꽤 오랜 세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절강의 패자인 잠룡세가와 복건의 절대자인 구천마성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하고 경조사도 모두 챙기는 등 아부를 하며 지금까지 아무 일 없이 잘 지내 온 터였다.
“저희가 천호방의 창방식에 안 간 것이 문제가 된 걸까요?”
“초청을 못 받았는데 어떻게 가!”
배장진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사실 그도 초청을 받지 못했어도 보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에 정곡을 찔리자 화가 난 것이다.
그들은 구천마성이 상당 기간 지하에 숨어 있는 동안에도 절대 구천마성의 세력권에는 발도 디디지 않았고, 잠룡세가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여러 문파에서 세력을 넓혀 가는 것을 보면서도 절강 위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는 조심성을 보여 왔다.
사실 그런 조심성을 보였기에 상당한 악행을 벌였음에도 아직 무사한 것인지도 몰랐다.
천호방이 잠룡세가를 무너뜨리고 절강의 절대자가 된 이후, 절강의 군소 문파들은 속된 말로 완전 곡소리가 났었다. 천호방은 양민들에게 악행을 벌인 문파를 그냥 혼내는 정도로 끝내는 경우가 없었다.
바로 멸문이었다.
“통고의 맥락을 보면 더 이상 양다리를 걸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같은데, 솔직히 저희가 무슨 양다리를 걸쳤다는 것인지도 이해가 안 갑니다.”
웅비보를 아는 모든 문파가 박쥐 같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천호방의 그동안의 행동을 보면, 답을 안 줄 경우 저희를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머리를 써 봐!”
배장진의 말에 모두는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제대로 된 군사 하나 없는 그들로서는 택일을 강요하는 천호방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절강이냐 복건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 간단했다. 하지만 결정한 후는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천호방은 절강에서 자신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내놓은 제약 조건을 따라야 한다고 이미 모든 군소 문파에게 공지를 했다.
그 제약 조건을 따르지 못할 경우 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뿐이었다. 딴 성으로 옮겨 가거나 해체하거나 혹은 항거였다.
결국 대부분의 문파는 천호방의 제약을 따르겠다고 맹세를 했고, 몇몇은 옮겨 가거나 해체를 했다. 어느 곳도 항거를 한 곳은 없었다. 그럴 만한 곳은 이미 모두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웅비보를 비롯한 각 성의 경계에 있는 문파들만은 천호방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그들을 공격했다가는 다른 성의 절대 세력들과의 마찰을 감수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복건성을 택하는 것은 너무 싫었다. 구천마성은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존재였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맡긴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잠룡세가 때는 절강은 물론 복건이나 강소 그리고 안휘까지 주변의 모든 성이 세력권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각 성마다 주 세력이 정해지니까 경계선을 깨끗이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래도 천호방이 구천마성보다는 좀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만책이 어렵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계일우도 동조를 하고 나섰다.
“천호방이 내세운 제약을 보면, 양민들을 괴롭히지만 않으면 크게 걸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구천마성은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수입이 양민들을 괴롭혀서 나오잖아?”
“천호방 역시 보호비를 받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상한선만 지키라는 것입니다. 조금 덜 먹고 편하게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편하게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말이 상당히 솔깃했던 듯,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우리가 절강성 소속이라고 결정하면 구천마성에서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저희가 천호방의 협력 세력이 되는 것인데, 아무리 구천마성이라 해도 무림십왕 중 한 명이 된 천호방을 건드리겠습니까?”
“그렇겠지?”
“지금 천호무적검은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이럴 때 줄을 잘 서야 만사가 형통하는 법인데, 천호무적검은 황상과도 친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의 판단이 문파의 흥망을 결정하는 순간.
배장진은 천호방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판단이 웅비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 * *
휴식을 끝낸 악불군은 방주 집무실에서 집무를 시작했다.
사실 방을 세운 후에도 여러 가지 일로 바빴고, 사천으로 외유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본격적인 집무는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 경계에 있는 문파들이 모두 몇 개나 됩니까?”
첫 번째 서류를 읽은 악불군이 물었다.
“몇 개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쪽저쪽 붙으면서 본 방의 제약을 벗어나는 행동을 많이 하고, 간세의 통로도 되고 있기에 정리해야 합니다.”
고철황의 대답에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주 인을 찍었다.
“약속된 날짜까지 답이 없는 문파들은 계획대로 처리하십시오.”
“예!”
그다음 서류들은 대부분이 수입과 지출에 관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수입이 많군요?”
“양민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절강의 상권이 매우 활발해졌습니다. 보호비를 깎아 줬음에도 수입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내는 돈은 늘었습니다. 아가씨 말대로 양민들을 쥐어짜는 것보다는 그들의 수입이 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말이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언제 큰돈이 필요할지 모르니, 최대한 돈을 비축하십시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염상(鹽商)이라고 쓴 항목에서 상당히 많은 금액이 들어왔던데, 보호비 치고는 너무 거액이던데요?”
“염상이라는 소금을 파는 상인들의 연합체가 있습니다. 어떤 상인 연합체보다 크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지요. 그곳에서 본 방의 후원자가 되겠다며 상납한 것입니다.”
“소금을 팔아서 이런 거액을 상납할 수 있다니, 소금이 이익이 아주 많이 나는 물품인 모양입니다.”
“거의 독점 사업이니까요.”
“그렇다 해도 소금은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물품인데 이렇게 거액을 상납한다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염상들은 거의 전국적인 조직입니다. 무림 세력들도 그들은 건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고 호법님,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 이익을 보는 이유가 양민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때문은 아닌가 해서 묻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바가지 정도가 아니라 폭리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염상 한 곳이 대단한 부자라는 말을 듣고 잠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소금이 시중에서 사라져서 가격이 수배에서 수십 배까지 올랐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창고에는 소금이 산처럼 쌓여 있더군요.”
“매점매석을 해서 가격을 올리고 폭리를 취한 다음, 가격이 떨어지면 다시 사들여서 가격을 올리는 전형적인 악덕 상인의 표본이 염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동정어옹도 염상의 행패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는 듯 부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