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77화>
277화. 만통광심(2)
“벌써 오셨습니까?”
담수련의 처소를 지키던 흑석영은, 악불군이 돌아오자 의아한 듯 물었다.
조금 전, 담수련의 방에서 나온 그가 네 명의 방주 호법에게 이곳을 지키라 명을 내리고는, 갑자기 어디 좀 다녀온다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누군가에게 담수련을 맡기고 자리를 비운 일은, 그들에 대한 믿음이 상당해진 덕분이었다.
“별일은 없었지요?”
“나가신 지 이각도 안 지났습니다. 별일이 있을 턱이 없지요.”
“오상루에서 장하산을 들어가면…… 시신이 세 구 있을 겁니다. 아무도 모르게 깨끗하게 처리하세요.”
그 짧은 시간에 장하산까지 가서 누군가를 셋이나 처리하고 왔다는 말에 흑석영은 놀라움과 의아함이 동시에 들었지만, 더 묻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당장 처리하겠습니다.”
흑석영이 사라지자 악불군은 담수련의 방을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감히 이곳까지 들어왔는데 아무도 눈치를 못 챘어……. 대단한 자들이긴 하지만, 경계에 좀 더 만전을 기해야겠는데? 어떤 방법이 좋을까?”
천밀쾌영은 잠입술에 관한한 특급 살수인 흑석영까지 능가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런 자가 자신이 없을 때 담수련을 노린다면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뭔가 좋은 생각이 난 듯 담수련의 방 앞으로 갔다.
“아가씨, 소군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악불군이 갑자기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그대로 나가자, 뭔가 있음을 직감한 담수련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던 악불군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너무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연화야, 빨리 문 열어 줘.”
문이 열리고 사화가 나가자 악불군이 안으로 들어섰다.
“일은 처리했어?”
“예, 그들의 대화 내용을 잠깐 들었는데 만통광심을 암살하려던 것 같았습니다.”
“만통광심을? 그들이 누군데?”
“저희를 계속 노리던 비밀 조직입니다. 장보주를 쫓는 자들이지요.”
“제갈 대협의 말씀대로라면 천년마교와 연관이 있는 자들인데, 그들이 본 방의 총단에서 만통광심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우리와 구천마성 간에 전쟁을 일으키려는 계략 같은데?”
“그들도 그런 의미의 말을 하더군요.”
“원나라가 물러나고 태양천과 어찰단만 사라지면 평화가 올 줄 알았는데, 실지 상황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들의 정체를 빨리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로 보여.”
“감히 본 방의 총단을 자기 집 드나들듯 들어왔다가 나갔습니다. 이는 본방에 선전포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저희도 거기에 걸맞은 대응을 해 줘야겠지요.”
“방주인 소군을 몇 번에 걸쳐 죽이려고 한 자들이야. 어차피 그들과는 공존이 불가능할 거야. 그런데 구천마성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으니 이번 회동이 더욱 중요해질 것 같네. 만통광심과 만날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반 시진 정도 남았습니다.”
“생각해 뒀던 대화의 방향을 바꿔야 할 것 같아.”
담수련은 무림의 역학 구도가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천마종이 만통광심을 제거하기로 했다고?”
최학의 보고에 혈우대마종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구천마성은 천마종이 아니라 아수마종이 상대할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갑자기 그런 보고를 듣고 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천마종께서 아수마종을 도와줄 분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최학의의 말에 혈우대마종은 씨익! 미소를 짓더니 최학의 옆에 있는 노인을 보며 물었다.
“혈뇌, 네 생각에 왜 그런다고 생각하느냐?”
“천마종께서 굳이 만통광심을 천호방 총단에서 암살하도록 한 것은 구천마성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천호방을 노린 것 같습니다.”
“맞다. 천마종도 이제 천호방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게다. 하지만 고작 천마친위대 세 명을 보냈다니, 상대를 너무 얕봤어. 실패할 게다.”
“소인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실패가 아니라, 천호무적검이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하느냐입니다.”
“무슨 의미냐?”
“지금 천호무적검을 본 교에서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가장 하책입니다. 아마 천마종께서도 그래서 이간책을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만통광심이 천호방에 간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부터 조사에 들어갈 것입니다.”
“잘못하면 힘들게 심어 놓은 간세가 죽겠구나.”
“예, 그러나 더 문제는, 구천마성과 천호방이 본 교 때문에 더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혈우대마종은 혈뇌의 분석이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실패해 봐야 발전도 있는 법이지. 천마종은 그동안 너무 승승장구만 했다. 이번 기회에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여 줄지 두고 보도록 하지. 그런데 혈뇌가 직접 온 이유가 있을 텐데? 설마 이 문제 때문에 온 것이냐?”
“아닙니다. 교주님께서 찾아내라고 명하신 그 신비 세력에 대한 단서를 발견한 것 같아서 왔습니다.”
순간 온화하던 혈무대마종의 얼굴이 굳어졌다.
“본좌의 일을 무던히도 방해하던 놈들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말이냐?”
“정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단서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보고해라.”
“우선 이 보고서를 먼저 읽어 주십시오.”
혈뇌는 종이 여러 장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혈우대마종은 종이를 받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이 계속 실패한 것이 그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신비 조직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가 여러 차례 다시 행동을 개시하려고 하다가 계속 멈추게 된 것도 바로 그 세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단서를 잡았다고 하니 흥분이 안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종이를 읽어 나가던 혈우대마종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 보고서를 누가 작성했느냐?”
“개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혈뇌원에서 이십 년간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이 보고서가 사실이라면 이들의 간세가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겠구나?”
“이곳 혈교에도 그들의 간세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자신이 간세인지도 모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세를 찾아 없애려고 하다가는 평생이 걸릴 수도 있겠다. 이들을 지휘하는 본거지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아직 거기까지는 짐작해 내지 못했습니다. 후보지를 추리기는 했지만 너무 광범위해서, 좀 더 분석한 후에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것들을 알아내서 제거하기 전에는 나가서 싸워봐야 이것들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는 것이 된다. 이것들을 먼저 찾아내 없애야 그때부터 대계의 시작이 될 것이니, 반드시 알아내도록 해라.”
“존명!”
최학의와 혈뇌가 나가자 혈우대마종은 다시 안정을 되찾은 듯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 자신의 다리를 손을 쳤다.
“그래! 이것들이어야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아구가 맞아. 천년마교를 망하게 한 요물들이 아직도 남아서 천하를 우롱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도 못 했구나.”
혈우대마종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는 건물을 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고금 제일마종이라는 말까지 듣는 그의 분노를 이렇게 유발하는 것일까?
* * *
“거의 독대 수준의 자리를 만들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녁 식사 후 빈청으로 자리를 옮긴 만통광심은, 악불군과 담수련만 있자 살짝 놀란 듯 물었다.
“구천마성의 군사님께서 이렇게 오셨는데 덕담이나 나누려고 오시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긴, 이런 대화의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긴 하지요.”
“만통광심 군사님께서는 외유를 안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원래 군사란 자리가 적에게는 가장 많은 표적이 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외유는 되도록 삼가는 편이지요.”
“그런데 오늘 군사님을 암살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빨리 알아차려서 제거하기는 했지만, 내려가시는 길에 좀 더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를 암살하려고 했다고요?”
만통광심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그가 천호방에 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구천마성에서도 최고위직에 있는 몇 명뿐이었다.
그런데 도착한 날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누군가가 정보를 준 자가 있단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정보를 흘린 자가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이 급히 소개를 했다.
“이분은 본 방의 군사님입니다.”
“천호방의 군사께서 여인이실 줄은 몰랐군요.”
“천하가 인정하는 책사이신 만통광심 군사님 앞에서 군사라고 소개를 받는 것이 민망합니다. 담 군사라고 불러 주십시오.”
“방금 정보를 흘린 자가 있다고 하셨는데, 본 성에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본 방에서 정보가 새나갔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본 성에서는 제가 이곳에 오는 것을 아시는 분들이 소수입니다.”
“상당한 고위직이시고 절대 의심할 수 없는 분들이겠군요?”
담수련의 반문에 만통광심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제가 간세라면 몰라도 다른 분들이 간세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자리에 간세가 있다면 구천마성도 견고하다고 할 수는 없겠군요?”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구천마성만이 아니라 본 방의 사람들도 의심합니다. 절대 그 사람은 아니라고 결정해 버리면 그 순간부터 간세는 사라진다고 생각하니까요.”
“군사로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암살하려고 한 자들의 정체는 아십니까?”
“아직 확실한 정체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세력이 광동에서부터 복건, 강서 심지어 절강과 안휘까지 다 뻗쳐 있다는 것은 압니다.”
“혈교놈들이 나를 노린 모양이군요?”
“혈교요? 그자들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저희도 그자들에 대해 안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천년마교의 무공을 사용하고 대단한 전력을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를 혈교라고 칭한다는 것은 알아냈습니다.”
“구천마성의 정보망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담수련은 제갈우명이 말한 자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녀가 놀란 것은 구천마성이 무림맹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어서였다.
“정보망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본 성이 의도치 않게 지하로 숨다 보니 이미 지하에 숨어 있는 자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상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추적하고 있었는데, 그들 조직에 몸담고 있던 자가 배신을 하고는 도망치다가 본 성에 투항한 덕분에 자세히 알게 된 것이지요.”
만통광심이 의외로 자세히 설명까지 해 주자 담수련의 아미가 살짝 좁아졌다.
‘묻지 않는 말까지 하면서 혈교라는 조직에 대해 말해 주는 이유가 뭘까?’
“그럼 그들의 본거지에 대해서는 알아내셨습니까?”
“상당히 오랫동안 조사를 했음에도 알아낸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전력이 구천마성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짐작하십니까?”
“천년마교의 후예를 자처하는 자들이니 전 무림에 마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겠지요.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강력한 세력을 만들고 있음에도 태양천이나 어찰단이 그들을 추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세히 말씀해 주시는 것을 보니, 혈교를 제거하는 일에 본 방과 연계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본 성에서는 주적을 무림맹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혈교가 가장 큰 위협이 될 거라고 성주님께 여러 차례 진언했습니다. 저를 암살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일 것입니다.”
“방주님께서 그들을 제거하기 전 대화를 들었는데, 만통광심 군사님께서 천호방 총단에 있을 때 죽여야 한다고 했다더군요.”
“저를 죽이면 구천마성과 천호방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까지 예상한 모양입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일석이조의 계략을 꾸민 것 같군요.”
마치 자신의 암살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듯 태연한 만통광심의 말에, 담수련의 표정에 미묘한 미소가 나타났다.
상대의 행동과 말투에서 본심을 찾아내고 거기에 대한 대비책까지 생각해 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즐거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