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78화>
278화. 정세(1)
“만통광심 군사님께서는 혈교에서 저희와 구천마성을 싸움 붙이려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사실 그들의 속내를 완전히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 중원 무림인들은 타도할 적일 뿐, 정파냐 마도냐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제 짐작으로는 천호방이 절강에 버티고 있으면서 구천마성과 무림맹 사이에 일어났어야 할 전쟁이 고착 상태에 빠져, 그에 생긴 불만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오시면서 혈교에 대한 대응책도 저희와 의논하실 생각이셨던 것 같은데 맞나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혈교가 현 무림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혈교의 간세들이 정파와 마도는 물론 사파에까지 곳곳에 침투해 있다는 정황이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무림맹은 원나라 침공 이전의 성세를 모두 온전히 복원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제가 천호방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무림 정파는 오랫동안 지켜왔던 그들의 터전을 원나라와 태양천에 의해 뺏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웅회를 조직해 수십 년간 싸워 왔어요. 자신들이 빼앗긴 세력을 되찾기 위해서지요. 전 그들에게도 나름 명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뭐건, 무림 세력으로서 수십 년 전에 잃은 자신의 세력을 지금 와서 내 거라고 우긴다면, 그동안 그 지역을 지배해 왔던 기존 세력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림맹은 그들을 부역 세력으로 치부하며 몰아내려고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을 야기할 따름입니다.”
정파가 주축이 된 무림맹과 구천마성 간의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이 드러나고 있었다.
복건의 북부와 강서 그리고 호남의 남부 일부 지역과 운남은 정파의 세력이었다.
하지만 광동이 세력권이었던 구천마성이 지금 복건과 강서 그리고 호남 남부까지 세력을 확대한 상황이었다.
정파는 그곳을 다시 돌려받고 싶었고, 구천마성으로서는 힘들게 확보한 세력을 내놓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 첨예하게 다르다면, 결국 전쟁으로 결판을 낼 수밖에 없겠군요?”
“무림맹의 방식대로라면 천호방 역시 절강을 포기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절강을 지키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천호방과 본 성이 같이 연대하여 무림맹을 설득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 제안은 천호방에게 망하라고 하는 소리 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정말 몰라서 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당연히 저희만의 비밀로 해야지요. 공개적인 연대가 아닌 밀약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당장 목전에 있는 혈교의 위험성도 생각하십시오. 지금 그들이 천하 곳곳에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리고 무림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무림에 얼마나 최악으로 작용할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에서 담수련은 만통광심이 온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우리를 이용해, 이미 장악한 지역을 완전히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만들 시간을 벌겠다는 속셈이군.’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런데 만통광심 군사님 얘기를 들어 보면 무림맹의 남하를 막아 주고 혈교까지 무림맹과 본 방에서 처리하라는 말인데, 구천마성과 그런 밀약을 맺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모든 비난은 본 방이 다 받게 되는데 구천마성은 아무 피해도 없네요? 이럴 경우 본 방에서도 반대급부(反對給付)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뭘 준비해 오셨나요?”
“솔직히 제가 아직 천호방이 정파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을 지향(志向)하는지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성주님께 말씀드려 최대한 반영이 되도록 해 보겠습니다.”
만통광심의 제안은 사실 구천마성으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어떤 요구이건 제한을 두지 않고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악불군이 입을 열었다.
“만통광심 군사님 말씀에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점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오랜 전란과 치안 부재의 공포 속에서 힘들게 살아온 양민들을 생각한다면,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 성 역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무림맹이 결성되기 전까지는 전쟁도 불사하고 최대한 세력권을 넓히려던 그로서는 사실 뻔뻔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약속을 어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거짓을 말하는 것도 당연시되는 마도인인 그는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무림맹과 아직 큰 친분이 없는 상황에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 무림맹의 만진선생께 구천마성의 뜻을 전하고 최대한 충돌을 피할 수 있도록 설득해 보겠습니다. 또한 혈교에 대한 대처 방안도 의논해 볼 것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만통광심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살짝 나타났다. 예상보다 쉽게 악불군의 찬성을 얻어 낸 것이다.
거기다 혈교의 암살 기도로 무림맹에 혈교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린 것은 생각지 못한 부수입이었다.
무림맹의 성격상 혈교에 대해 안다면 그들과의 싸움은 필연적이었다. 동귀어진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둘 다 큰 피해를 입을 것은 분명했다.
“역시 천호무적검이 진정한 협객이라는 소문이 틀린 것은 아니군요. 다른 세력들의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리시다니, 정말 감탄할 따름입니다.”
만통광심은 속내를 감추고 악불군을 칭송했다.
“대신 제가 원하는 것이 먼저 반영되어야 일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만진선생을 설득하려면 제게도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요.”
“말씀해 보십시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구천마성에서 세력내에서 상인들에게 받는 보호비를 반으로 낮춰 주시고, 양민들을 괴롭히는 자들은 엄벌에 처하겠다고 약조해 주시면 됩니다. 물론 대내외적으로 공표해 주셔야겠지요.”
만통광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악불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겠지만, 구천마성으로서는 정말 대단히 어려운 요구였기 때문이었다.
세력을 키우려는 이유는 보호비를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호비를 반으로 줄인다면 세력이 반으로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거기다 마도인들의 특성상 양민들을 괴롭히는 자들은 부지기수였다. 만약 양민을 괴롭힌다고 벌을 준다면 구천마성의 구성원 반 이상을 벌을 주어야 할 수도 있는데, 그것 역시 구천마성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마도인 그는 조건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정파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조건은 천호방에 이익이 될 것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전 양민들이 편안하게 살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순간 만통광심은 가슴이 섬칫해 옴을 느꼈다. 말하는 악불군의 뒤로 마치 부처님의 후광 같은 것이 퍼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절대자의 기도들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물론 그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 조건은 구천마성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가 성주님을 한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 역시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만통광심은 고개를 갸웃하며 담수련을 보며 물었다.
“지금 방주님의 제안은 천호방에 직접적인 이익이 전혀 없는데, 군사로서 가만히 있는 이유가 있습니까?”
“방주님께서는 양민들이 행복한 것이 좋으시답니다. 그것을 제가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요? 만통광심 군사님께서는 이익이 없다면 성주님의 뜻이라도 반대하시나 봅니다.”
‘방주와 군사가 똑같이 이상(理想)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게 상대하기가 좋을지 나쁠지 감이 안 잡히는군…….’
만통광심은 자신이 그동안 상대했던 사람들과는 다른 특이한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 * *
“어찌 됐소?”
궁가방의 방주 하룡신개는 청지신개를 보며 탄식하듯 물었다.
“이미 개봉의 반 이상이 남개방에 의해 장악됐습니다.”
“결국 분타에서는 아무도 안 온 것이오?”
청지신개가 답을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그는 다시 말했다.
“청지 호법, 이미 나도 짐작하고 있으니 말해 보시오.”
“분타들이 아예 남개방에 붙어 버렸습니다. 장로들 역시 반 이상이 변절했고 나머지는 종적을 감춰버렸습니다. 원나라가 하북까지 잃고 밀려나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럼 우리에게 남은 것은 총단의 제자들뿐이군?”
“총단의 제자들도 지금 동요가 심해서, 남개방이 공격을 하면 방어망이 그대로 와해될 확률이 높습니다.”
“궁가방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어…….”
방의 이름을 바꾼 것은 사실 태양천의 종용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꾼 이후 제자들의 동요가 심해졌고, 이탈하여 남개방으로 붙어 버린 제자들도 부지기수였다.
“방주님, 사해신개의 제안대로 용두봉을 넘기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대로 버틴다면 죄 없는 제자들만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개방의 적통은 누가 뭐래도 우리요. 남개방은 지류에 불과할 뿐인데, 어찌 그들에게 용두봉을 넘긴다는 말이요?”
“궁가방으로 이름을 바꾼 순간, 적통이라고 주장할 명분은 이미 잃었습니다. 우선 개방에 대한 기득권은 이번 기회에 모두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 궁가방의 명맥을 잇고 버틴다면 반드시 기회는 다시 올 것입니다.”
“추격하던 처지에서 추격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자는 것이오? 우리가 이곳을 포기한다고 남개방 놈들이 우리를 그대로 둘 것 같소?”
“우리가 용두봉을 내놓고 개봉을 떠난다면 최소한 일 년 동안은 추격하지 않겠다고 사해신개가 약속했습니다. 방주님도 아시겠지만 사해신개는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하룡신개의 꽉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궁가방 최고의 원로인자 고수인 청지신개까지 전의를 잃고 피하자고 할 정도라면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도 알 수 있었다.
“……용두봉만 내 주면 우리가 개봉을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것이오?”
“총단 안의 어떤 물건도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진짜 거지 집단이 되겠군.”
하룡신개는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지금 마음 상태를 짐작하고 있는 청지신개는 더 이상 조르지 못했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다.
하룡신개는 자신의 옆에 있는 용머리가 조각된 타구봉을 청지신개에게 던졌다.
방주신물인 용두봉이었다.
“갖다 주시오. 그리고 일 년 동안은 궁가방을 추적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키라고 전하시오.”
청지신개는 무릎을 꿇고는 두 손으로 용두봉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일 갑자에 걸친 북개방과 남개방의 전쟁이 결국 남개방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개방의 통일은 다른 어떤 문파의 재건보다 무림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십만이 넘는 방도들이 더 이상 방해 없이 정보를 수집해 정파들에게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머리싸움은 아가씨께서 맡으시겠다고 했는데 제 마음대로 조건을 제시해서 죄송합니다.”
대화가 생각보다 쉽게 마무리되자 만통광심은 일찍 돌아간 뒤였다.
“무슨 소리야? 소군이 내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은 알지만, 나 때문에 원하는 것까지 그냥 참고 그러지 마. 소군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거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제갈 대협과 그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기도 어려운데, 소군이 구천마성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설득할 수 있겠어?”
사실 악불군이 그런 약속할 때 담수련은 약간 의아했었다. 악불군이 빈말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악불군은 다 생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