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79화>
279화. 정세(2)
“설득이 될지 안 될지는 저도 모르지요. 하나, 구천마성에서 우리 조건대로 한 후에 저도 행동하기로 했으니, 상관있겠습니까?”
“소군의 제안이 구천마성에게 받아들여질 것 같아?”
“마도인들에게 제 제안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닐 겁니다. 아마 된다고 해도 겉보기만 그렇게 보이도록 할 확률도 높고요.”
“그걸 알면서 허락한 거야?”
“만통광심의 제안이 사실 제가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요.”
사실 지금 악불군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문제가 부역자 추적을 막는 것이었다.
담수운과 담수련은 정파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담무룡의 자식이었다. 부역자 추적을 막지 못한다면 둘은 절대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에 약간 침울한 표정을 지며 말했다.
“무림맹의 부역자 추적을 막기는 어려울 거야. 그들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마찬가지인데 그냥 넘어가겠어?”
“어려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아가씨의 지략이라면 방법을 찾아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을 뿐, 꼭 그렇게 되도록 한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니까요. 저희에게 손해 날 것은 없다고 봤습니다.”
“이제 보니 나보다 소군의 머리가 더 잘 도네?”
“잘 도는 것이 아니라 아가씨께 배운 것이지요.”
“피~!”
담수련은 입술을 내밀었지만 이번은 불만이 아니라 기분이 좋은 듯했다.
‘똑같이 입술을 내밀었는데 느껴지는 것은 완전히 다르니 참 신기하단 말이야…….’
악불군은 담수련의 입술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이 움찔하며 답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니야, 분명 속으로 나에 대해 뭔가 말했어.”
역시 신경에 든 눈치의 소유자답게 그녀는 정확하게 찝어 냈다.
악불군은 급히 화제를 바꿨다.
“만통광심이 돌아갔으니, 답이 오려면 빨라도 한 달은 걸리겠지요?”
“지금 말 돌리는 것을 보니까 안 좋은 생각한 거 아니야?”
“절대 아닙니다. 한 달 더 걸릴까요?”
담수련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뭔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보더니 말했다.
“보름 안에 연락 올 거야.”
“그렇게 빨리 올까요?”
“이유는 뭔지 모르지만 급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 아직 이유는 모르지만 무림맹에서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확답이 필요한 것이 분명해.”
“그럼 그건 하회(下回)를 기다려 보고 보타검각에 간다고 연락하라고 명하겠습니다.”
“보타검각에 대해서는 좀 알아봤어?”
“고 장로님께서 최대한 알아보시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내일쯤 보고서를 올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보타검각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습니다?”
“무상 진인을 만난 후에 좀 생각을 해 봤어. 그랬더니 그 세력에 대한 몇 가지 윤곽이 잡히더라고.”
“저도 몇 가지 생각한 것이 있긴 했습니다.”
“소군 생각 먼저 들어 보자.”
악불군은 담수련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자 자심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말해 봐.”
“무상 진인의 말씀을 따라 계산해 보니까 최소한 백 년 이상 전부터 존재하던 조직이어야 하더군요.”
“맞아 최소한이 백 년이야.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만들어졌다고 봐. 천하를 상대로 그런 음모를 꾸몄다면 대단히 큰 조직이어야 하는데, 급조된 조직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그래서 난 최소한 이백 년 이상 존속한 조직이라고 판단했어.”
“아가씨 판단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제가 천호방의 재정 상황을 살펴본 결과, 왜 정파와 마도를 막론하고 세력 확대에 목을 매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이제 겨우 창방한 지 육 개월 정도밖에 안 됐는데 정말 돈이 많이 들더군요. 이백 년이 아니라 백 년이라고 해도 그 큰 조직을 꾸려 나가려면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 들 텐데, 그 돈은 어디서 충당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분석이 자신의 생각과 거의 비슷하자 기분이 좋은 듯 말을 받았다.
“그런 돈을 충당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아. 그래서 범위가 좀 더 좁혀졌어.”
“보타검각도 그 안에 든 겁니까?”
“존재는 하고 사람들이 어려워하는데 활동은 하지 않는다. 좀 의심 가지 않아?”
“다른 곳도 의심하는 곳이 있으십니까?”
“아직은 정보가 부족해서 의심가는 곳이 보타검각 포함해서 대여섯 곳 정도야. 하지만 모두 아닐 수도 있고. 그래서 하오문의 정보와 개방의 정보 모두를 수집할 생각이야.”
“다른 곳은 어디입니까?”
“혈교, 천무성궁 그리고…… 아니다, 다른 곳은 좀 더 분석한 후에 말해 줄게.”
담수련이 말을 돌리자, 악불군은 뭔가 짐작이 가는 것이 있는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럼 보타검각에 내일 출발한다고 명을 내리겠습니다.”
“소뿔도 단숨에 빼라고 했어. 마음 먹은 김에 처리할 것은 빨리 처리하자고. 그래야 다음 계획을 시작하지.”
담수련은 보타검각의 방문 후에 또 다른 계획을 이미 짜 놓은 듯했다.
* * *
“만통광심이 구천마성으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우문상일의 보고에 제갈우명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최소한 삼 일은 묵을 줄 알았는데, 하루만 자고 돌아갔다는 말이냐?”
“예, 악 방주와의 만남도 첫날에만 이루어지고, 그 이튿날은 총단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다고 합니다. 만통광심이 움직였다면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빨리 갔을까요?”
“둘의 접점을 빨리 찾아서 더 이상 대화의 필요성이 없었거나, 아예 서로의 의견이 달라서 할 말이 없었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 하지만 다음 날 총단을 구경하고 갔다면 전자일 확률이 높을 것 같구나.”
“전자일 확률이 높다면 둘의 거래가 성립되었다는 말인데, 그냥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나?”
“악 방주를 무림맹으로 불러서…….”
“군사전의 총책까지 맡은 자네가 그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하면 어떡하나?”
“죄, 죄송합니다.”
“파금왕이 직접 악 방주를 찾아갔음에도 결국 데려오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하네. 왜 그랬을 것 같나?”
“설마, 악 방주의 무공이 파금왕을 능가한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책사라면 선입견을 내려놓고 결과만으로 판단해야 하네. 악 방주의 무공은 현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고수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일세. 거기다 황상께서 무황들과 동급으로 우대해 주셨어. 지금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현 무림에 없다네.”
“그 정도로 거물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내 생각대로라면, 악 방주는 직접 나를 찾아와 어떤 말이 오갔는지 말해 줄 걸세. 섣부른 추측 같은 것은 하지 말고, 그가 온다면 최대한 예의를 지켜 맞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우문상일이 나가자 제갈우명은 등을 의자에 대고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변수가 아니야. 총순찰과 경쟁 구도를 만드는 것보다는 친구가 되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구도인데…… 천무성궁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니 정말 큰일이구나…….”
제갈우명은 악불군이 이미 정파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커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정파는 둘로 쪼개질 수도 있었다. 그로서는 지금껏 예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 * *
“여기를 보니까 천호방이 절강의 패자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네?”
보타산이 있는 주산군도까지는 항주에서 뱃길로 반나절 거리였다. 그런데 수로를 오가는 모든 배들이, 악불군이 탄 배를 만나면 즉시 움직임을 멈추고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달린 천호방주의 깃발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런 예우를 하는 것은 천호방을 자신들의 보호자로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거기다 수로를 순시하는 천호방의 쾌속선들에 탄 방도들도 악불군의 배를 보면 모두 부복할 정도였다.
“부복하는 것은 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땅도 아니고 작은 쾌속선에서 부복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너무 과한 예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생각이 달랐다.
“소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어느 정도 과한 예우가 필요하기도 해. 그래야 그것을 본 사람들이 소군에게 더욱 존경심을 가질 수 있거든.”
“그런가요?”
“모든 사람들이 소군을 진정으로 존경하게 되면 그때 금지시켜도 늦지는 않아.”
그녀는 스스로 권력을 휘둘러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담무룡의 옆에 있으면서 권력의 본질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수하들에게 잘해 주고 편안하게 해 주면 처음에는 좋아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권위가 떨어지고 수장을 우습게 보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표정을 보자 권력에 대해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으로 권력은…….”
따분할 수도 있는 권력에 대한 강의가 한 시진 가까이 이어졌다. 한데 뜻밖에도 악불군은 상당히 흥미로운지 열심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권력이란 것은 결국 모든 욕망의 종착점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아가씨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힘인 것 같긴 합니다.”
악불군답게 권력의 결론은 결국 담수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악불군이 권력까지 자신과 결부시키자 담수련은 사실 매우 행복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시진 가까이 설명한 의도와는 다른 반응에 씁쓸하기도 했다.
“왜?”
그때 악불군이 하늘을 쳐다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자 담수련도 하늘을 보며 물었다.
“적설의 움직임이 좀 이상합니다. 뭔가 흥분한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주위에 다른 새들이 있는 거 아닐까?”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안력을 집중하여 사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뭔가가 포착되었다.
“흑 호법.”
“예!”
“저 산이 혹시 보타산인가?”
멀리 수평선 끝에 커다란 구름덩어리가 보였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것이 구름에 쌓인 산봉우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흑석영은 주위를 살피더니 말했다.
“솔직히 제 눈에는 아직 보타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방향은 그쪽이 맞는 것 같습니다.”
“왜 그래?”
“남해성모궁에서 보았던 선학만큼 큰 새가 이곳에도 있군요.”
악불군은 보타산의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를 발견한 것이다. 작은 점으로 보이고 있었지만 거리를 감안하면 사람을 태우고 다닌 남해성모궁의 선학과 맞먹을 정도로 큰 새가 분명했다.
“적설이 자신만큼 큰 새를 보자 경계를 하는 모양이네?”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 그와 적설은 이젠 먼 거리에서도 감응(感應)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지금 적설이 느끼는 감정은 경계가 아닌 적대감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 * *
보타산은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검한평은 그중 좌측에 있는 봉우리 정상에 펼쳐진 커다란 평야였다. 그 경계, 만길 낭떠러지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악불군을 미혼각에서 영접하라고 명을 내렸던 여인이었다.
“검후님, 왜 이곳에 나와 계십니까?”
그녀의 뒤로 한 여인이 나타나더니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천붕과 대붕이 좀 이상하지 않느냐?”
“저도 이상해서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천붕과 대붕은 검각의 무후와 검후가 애지중지하는 보타검각의 영물들이었다.
“아니야……. 분명 천붕과 대붕을 자극할 정도로 강력한 무엇인가가 나타난 것이 분명해.”
검후는 주위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망원통을 가지고 와 봐라.”
“예!”
잠시 후 여인이 가져온 망원통을 눈에 갖다 댄 검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천호방에서 오고 있구나.”
“지금 보고드리려고 했었습니다.”
“저 정도 거리면 아직 두 시진 이상 와야 할 것이니 급할 것은 없다. 내 명대로 미혼각은 잘 치워 놨느냐?”
“예! 지금 만반의 준비를 다 끝낸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냐?”
“무후께서 왜 하필 미혼각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천호방에 대한 책임자는 나다. 무후에게는 내가 직접 말할 것이니, 너희는 걱정 말고 내가 시킨 대로 진행만 해라.”
“예!”
검후는 다시 망원통을 눈에 대고는 배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붕과 대붕이 왜 이토록 긴장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귀한 손님이 왔으니 영접을 하긴 해야겠지.”
중얼거린 검후가 갑작스레 만길 낭떠러지 밑으로 그대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