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80화>
280화. 보타산(1)
“방주님, 파도가 거세고 조류가 계속 밖으로 흘러서 섬 가까이 가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선두에서 서서 보타산을 보고 있던 악불군은 흑석영의 보고에 괜찮다는 듯 말했다.
“보타산에서 누군가 오고 있으니까 우선 기다려 봅시다.”
“알겠습니다.”
답을 하는 흑석영의 얼굴에는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특급 살수 중의 특급 살수로, 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정말 탁월했다. 하지만 악불군의 감지능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흑석영의 기감에 잡히는 것은 물론,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것조차 전혀 없었다.
“확실히 조류의 흐름이 이상하긴 해. 저런 섬이 있으면 파도가 섬 쪽으로 밀려가는 것이 정상 아닌가?”
악불군의 옆에서 파도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담수련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흑석영의 말대로 좀 특이하기 한 것 같습니다.”
“소군은 여기서 보타산까지 경신술로 갈 수 있겠어?”
“글쎄요? 저렇게 먼 거리를 시도해 본 적이 없어서,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타검각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어. 아무래도 산 전체에 거대한 진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아.”
보타산은 보통 섬들과 완연히 달랐다. 섬이 그 자체로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배를 댈 포구는 보이지 않았고 해변가조차 없는, 말 그대로 섬 전체가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다 조류는 배가 섬으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섬 바깥으로 흐르고 있었고, 파도 칠 때마다 맨눈으로도 보일 정도로 많은 암초가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대군이 몰려온다 해도 공략이 쉽지 않을, 말 그대로 천연 요새였다.
그때 그들의 배에서 약 백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마치 물속에서 솟아나온 듯 전혀 보이지 않던 배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가씨 말대로 진이 펼쳐져 있는 것 같군요.”
“거대한 자연진을 누가 인공적으로 손을 본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한 자가 펼친 것 같아.”
진을 치기 위해서는 진을 형성하는 뼈대가 있어야 했다. 담수련이 위기 상황에서 치는 진에 사용하는 대나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바다였다. 물 위에 뼈대를 세울 방법은 없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배가 악불군의 선박 앞까지 도착했다.
“저는 보타검각의 유벽설이라고 합니다. 천호방주님께서는 어느 분이십니까?”
“제가 천호방주인 악불군입니다.”
악불군은 여인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각주님께서 외인은 보타산에 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방주님께서 직접 오셨으니 두 시진의 방문을 허락하셨습니다. 천호방의 배는 보타산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저희 배를 타고 가셔야 합니다.”
“몇 명이나 동행할 수 있습니까?”
“각주님께서 허락하신 분은 방주님 혼자입니다.”
“한 분만 동행했으면 하는데, 되겠습니까?”
“수 십 년 동안 보타산에 외인이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한 분만 허락한 것도 정말 예외적인 일입니다. 동행은 할 수 없습니다.”
“보타검각의 규율이 그렇다면 따라야지요. 그럼 저도 방문은 그만두겠습니다. 각주님께 이번에 절강의 패자로 등극한 천호방에서 인사를 왔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보타산이 아름다워서, 비록 방문은 못 하지만 오기는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간, 유벽설의 얼굴에 당황함이 나타났다.
보타검각은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 들르기를 소망하는 검사들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보타검각에 들르면 무공이 일취월장한다는 소문은 상당히 유명했다.
그런데 악불군이 단숨에 포기한 것이다.
하나 단순히 포기한 것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녀가 받은 명이, 악불군을 미혼각으로 안내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흑 호법!”
“예.”
“인사는 드렸으니 이만 돌아간다. 배를 돌리게.”
“예!”
정말 악불군이 배를 돌리라고 명까지 내리자, 유벽설은 다급한 표정으로 어딘가로 전음을 보냈다.
[정말 돌아갈 모양입니다. 어찌할까요?]
[한 명까지는 허락한다고 해.]
전음을 받은 유벽설은 급히 악불군에게 말했다.
“동행 한 분은 허락하신다는 명을 받았습니다. 같이 타시지요.”
순간 담수련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이것 봐라? 단지 인사를 받기 위해 우리의 방문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소군의 방문을 허락한 목적이 있다는 말인가?’
그녀가 들은 보타검각은 신비한 면도 있었지만 대단한 자부심도 있는 문파였다. 비록 강호행을 하지는 않지만, 잠룡세가까지 우습게 보았다는 정황을 보고서의 여러 군데에서 발견했을 정도였다.
보타검각의 그동안 행태를 본다면, 악불군이 그냥 가겠다고 하면 알았다고 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동행은 안 된다는 말까지 번복해 가며 악불군을 받아들이는 걸 보면 뭔가 있음이 분명했다.
[소군, 저들이 무슨 함정 같은 것을 파 놓은 것은 아니겠지?]
담수련은 이상한 불안감에 전음을 보냈다.
[저와 일면식도 없는데 그럴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어머!]
답하던 담수련은 악불군이 갑자기 그녀를 안자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잠시 다녀올 테니 흑 호법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게.”
말을 마친 악불군은 보타검각의 배로 훌쩍 날아갔다.
‘끝까지 동행하려고 하더니, 이젠 안기까지 한단 말이지……. 대단한 자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를 좋아하는 큰 약점이 있군.’
대붕의 등에 타고 하늘에서 망원통으로 상황을 살피던 검후는 비소(誹笑)를 살짝 그리더니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는 듯 보타산 쪽으로 방향을 돌려 사라졌다.
* * *
“검후가 악불군을 미혼각으로 불러들였다고?”
자리에 앉아 검을 닦고 있던 중년 미부는 한 여인의 보고에 검을 옆으로 밀어 놓으며 반문했다.
“예, 백리옥빙의 교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감히 성후님의 허락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다니, 주의를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후라 불린 중년미부는 미소를 지며 물었다.
“천호방은 검후가 맡은 것으로 아는데, 무후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느냐?”
“다른 것이라면 저도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미혼각은 잘못하면 악불군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 계획이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검후가 과격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까지 생각 못 하고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게다. 그래, 악불군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외곽 진을 지금 통과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악불군이 천륭검보를 익혔다고 하니 호승심이 동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우선은 두고 보도록 해라. 사실 악불군의 보고를 들으면서 나도 좀 의구심이 생기고 있었다.”
“무슨 의구심이 생기신 것입니까?”
“구문황은 태양천의 전대 천주까지 꺾지 못한 대단한 고수였다. 하지만 구문황이 죽은 후 나는 천륭검보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천륭검보가 평범한 사람은 절대 익힐 수 없는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혈우대마종을 죽인 후 다른 세 명은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무림을 좌지우지했는데, 천륭검가만은 무림 일에 전혀 상관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구문황이 세속 일에 관심이 없어서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사실은 천륭검보를 익히느라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거다. 구문황은 천고의 기재이기도 했지만 무공광이기도 했다. 그런 그조차도 천륭검보를 이해하는 데 이십 년이 걸렸고, 진정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 거의 육십이 다 되어서였다. 물론 그 전에 이미 대단한 명성을 얻긴 했지만 지금 악불군의 나이에 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악불군이 구문황을 능가하는 기재라는 말입니까?”
“내가 단언컨대 구문황은 정말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년 기재였다. 그런데 그를 능가하는 기재가 또 나타났다는 것은 좀 믿기 힘들구나. 그래서 소문이 정말 사실인지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제가 직접 한번 만나볼까요?”
“네가 관여하면 검후 성격에 발끈할 텐데?”
“검후는 상대를 보는 능력이 저보다 떨어집니다.”
“그래도 네가 직접 만나는 것은 월권이다. 각기 맡은 영역이 있지 않느냐? 소문이 맞다면 미혼각에서 죽지는 않을 게다. 대신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대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니, 기다려 보거라.”
성후의 말에 무후는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는 듯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보타검각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악불군은 물론 전대의 고수이자 이미 죽은 구문황까지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
* * *
보타산주위에 펼쳐진 진이 그녀의 학구열을 자극한 듯, 담수련은 진의 영역으로 들어서자 손바닥에 계속 뭔가를 그려 대며 계산을 하고 있었다.
[소군, 무슨 진인지 알 것 같아.]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도 계속 살폈지만 전혀 모르겠던데요.]
담수련 덕에 악불군도 진법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쌓아 놓고 있었다.
[나도 책에서만 보았을 뿐, 진짜 이런 진이 있을 줄은 몰랐어. 팔쾌만상풍운대진(八卦萬像風雲大陣)이 분명해.]
팔쾌만상풍운대진은 주위 모든 사물을 이용해 펼치는, 진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는 진법이었다. 담무룡이 그녀를 위해 구해 준 진법 책은 무공 절기에 맞먹을 정도로 대단한 책이었다.
하지만 그 책에도 팔쾌만상풍운대진은 몇 가지 효과에 대한 설명만 있었을 뿐, 어떻게 진을 치는지는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대단한 진인가 보지요?]
[책에 적혀 있기로는 호풍환우(呼風喚雨)의 변화를 일으킬 정도로 그 효과가 대단하다고 되어 있었어. 그런데 오래전에 실전됐다고 했는데 여기서 보게 되네.]
[어떻게 진을 치는지 적혀 있지 않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 진이 팔쾌만상풍운대진인지 아십니까?]
[내가 모르는 진이 그것밖에 없거든.]
답하던 담수련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와아~ 정말 아름답다…….”
수천 길 낭떠러지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는 무지개를 만들어 산에 일곱 가지 색을 뿌려 놓았고, 절벽에는 가지각색의 꽃들이 피어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었다.
여인들이 배 위로 큰 천막을 덮었다. 배가 폭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폭포 속에 이렇게 큰 동굴이 있다니? 인간은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거야.”
동굴 곳곳에 자연이 형성한 종류석 기둥들은 정말 아름다운 조각품을 보는 듯했다. 아쉽게도 동굴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배가 동굴을 빠져나오자 그곳에는 커다란 선착장과 고운 모래가 깔린 해변이 형성되어 있었다. 천연의 분지는 그녀들의 배를 타고 오지 않았다면 절대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내리시면 저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십시오. 계속 올라가다 보면 마중 나온 분을 만나실 것입니다.”
선착장에 배를 댄 유벽설은 악불군에게 한 곳을 가리키고는, 둘이 배에서 내리자 다시 배를 몰고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누구도 침입할 수 없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선착장에는 흔한 경계무사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소군, 여긴 정말 조용하고 아름답다. 침입자도 들어올 수 없을 것 같고. 여기서 우리 같이 살면 좋을 텐데…….”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보던 담수련이 너무 좋은 듯 말하더니 갑자기 얼굴이 발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막상 말하고 보니 의미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실수를……. 소군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이상한 생각은 담수련만 했던 것일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곳은 아가씨를 보호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 같습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담수련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확실히 답답한 데가 있어…….’
불만이 생겼지만 내 말뜻을 이해 못하냐고 따질 수는 없었다.
* * *
‘업고 올라가?’
분지가 훤히 보이는 절벽 위에 내린 검후는 망원통을 통해 악불군과 담수련을 보다가 약간 기분이 상한 듯 아미를 찌푸렸다.
절벽에 만들어진 계단은 보통 사람들은 올라가기 두려울 정도로 경사가 급했고 그 수도 대단히 많았다.
이미 악불군이 안고 배를 옮겨 타는 것을 본 그녀는 담수련이 어떻게 올라갈지 궁금했었다. 물론 왜 그게 궁금한지는 그녀도 몰랐다.
그런데 계단 앞에 도착한 악불군이 너무 자연스럽게 등을 댔고 담수련이 그 등에 폴짝 업히는 것을 보자 괜히 화가 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남자를 매우 싫어했다.
심지어 남자를 본 것도 보타산 주위를 오가는 배에 탄 어부들이나 선원들의 모습을 보았을 뿐, 보타산에 직접 들어온 남자는 처음 보는 터였다.
그 모습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던 검후는 땅을 발로 찼다. 그러자 그녀의 신형은 맞은편 절벽으로 마치 새처럼 날아갔다.
보타산의 절경과 어울린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선녀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