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81화 (281/472)

<천검지애 281화>

281화. 보타산(2)

악불군의 등에 업힌 채 계단을 올라가던 담수련은 뒤를 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올라갈 때 보이던 계단과 달리, 뒤를 바라보니 경사가 너무 심해 낭떠러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잘못해서 떨어지면 다치겠다.”

“괜찮습니다. 아가씨는 그저 저를 꼭 잡으십시오.”

그 말을 기다렸던 것일까……

담수련은 기다렸다는 듯이 악불군의 목을 두 손으로 꼭 껴안았다.

‘소군의 등은 정말 따뜻하고 편한 것 같아.’

담수련은 자신의 볼을 악불군의 등에 밀착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나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냥 악불군의 등에 업혀 어디론가 훨훨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한참을 올라간 악불군은 길이 세 갈래로 나눠지는 작은 공터를 발견하자 잠시 멈추고는 뒤를 한 번 둘러보았다.

“아가씨, 저거 한 번 보십시오. 정말 아름답습니다.”

보타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의 풍광은 정말 장관이었다.

바다가 끝이 없을 정도로 넓다는 것은 이미 배를 타고 오면서 경험을 했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의 크기는 배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달랐다.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단어가 절로 생각나는 광경이네.”

그들이 타고 온 배는 겨우 한 점으로 보이고 있었다.

“인간의 크기란 바다와 비교하면 정말 한 점밖에 안 되는데 무엇을 위해 그렇게 욕심들을 부릴까요?”

“책에 이렇게 써 있더라. 인간에게 욕심이 없었다면 지금 동물들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었을 거라고. 욕심은 인간이 발전해 나가는 원동력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어. 다만 그 욕심 때문에 다른 인간을 밟으려 한다는 것이 문제지. 하지만 세상은 공평해서 소군처럼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저보다는 아가씨께서 더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신 것 같으신데요?”

“난 마음뿐이지만 소군은 실행할 능력이 있잖아.”

“실행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는 아가씨께서 알려 주셔야지요?”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 왔다. 정말 악불군을 두고 죽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혹시 우십니까?”

악불군은 담수련이 그의 목을 더욱 힘있게 껴안으며 얼굴을 등에 파묻자 뭔가 이상한 듯 물었다.

“아니야. 안 울어. 소군이 있는데 내가 왜 울어?”

“제가 있는 한 아가씨 눈에 눈물이 흐르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할 겁니다.”

‘피! 이미 흘리고 있는데…….’

담수련은 악불군의 큰소리에 급히 눈물을 닦으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악불군이 몸을 돌렸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전 보타검각의 양미려입니다. 악 방주님을 안내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나타난 여인은 악불군을 보자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악불군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양미려는 악불군의 목소리를 듣자 살짝 그의 얼굴을 보더니 급히 몸을 돌리더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하나같이 늑대 같은 심성에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지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왜 저렇게 멋있는 거지?’

양미려는 뒤를 따라오는 악불군의 얼굴을 자꾸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남자는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런데, 처음 남자를 본 순간 가슴이 덜컹하더니 지금은 계속 두근거리고 있었다.

특히 자상해 보이는 눈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녀가 상상하던 남자와는 너무 딴판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악불군은 주위 풍광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그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저는 여기까지 안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악 방주님 혼자 안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반드시 문을 통과해서 올라가셔야 합니다.”

이각쯤 소로길을 안내하던 양미려는 주위에 아무것도 없이 문 하나만 덜렁 세워져 있는 장소에 도착하자 인사를 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악불군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나 내려 줘.”

악불군도 문 안의 길이 완만한 경사를 보이자 그녀를 내려 놓았다.

‘저런 게 잘생겼다는 건가? 그런데 저 여자는 어떻게 남자 등에 업힐 수 있지?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나?’

양미려는 악불군의 옆에 바짝 붙어 가고 있는 담수련을 보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중얼거렸지만 이미 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담수련을 내려놓은 악불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며 인사를 하자 양미려는 가슴의 두근거림이 더 강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급히 밑으로 사라졌다.

“저 여자 소군한테 한 눈에 반한 것 같아.”

“제게요? 하하~ 대화도 제대로 안 했는데 뭘 반하고 자시고 하겠습니까?”

“아니야, 여자들만의 촉이 있어. 분명 내 촉에 느낌이 왔어. 여자들하고 인사할 때 미소 짓지 마. 소군 미소가 좀 그래.”

“어떤데요?”

“몰라! 하여간에 여자들한테 미소 보이지 마.”

자신이 말해 놓고도 민망한 듯 몸을 돌린 담수련은 문 위에 걸린 현판을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미혼각(迷魂閣)? 검의 성지로 불린다는 보타검각의 문 이름 치고는 좀 이상한데?”

“확실히 좀 이상한 이름이긴 하네요. 그런데 이런 문을 전각 앞에 세웠다면 모르겠는데 길가에 세운 이유가 뭘까요?”

그의 말대로 미혼각의 현판을 단 문은 문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정작 문은 없고 두 개의 기둥에 처마가 걸린 형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산 전체가 진인 것 같아. 그리고 이 문은 진의 위력을 제어하는 생문 역할을 하는 거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진법의 대가가 이곳을 설계한 것 같아.”

“그럼 여기 들어갔다가 진에 걸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파훼까지는 자신하지 못해도 빠져나올 수는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럼 들어가 보지요.”

문을 지나서도 계속 이어지는 소로를 걸어가던 악불군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멀리 소로 주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검을 들고 가지각색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군! 저거 사람이야?”

“글쎄요? 이상한 기운은 느껴지는데……?”

“함정 같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의 기는 아닌 것 같거든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건 아가씨께서는 제 옆에 바짝 붙어 계십시오.”

“응.”

악불군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담수련은 그의 옷깃을 손으로 꼭 잡았다.

담수련은 병약한 신체와는 달리 상당히 배짱이 좋았다. 강호행을 하는 동안 여러 번의 기습에도 긴장한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특히 악불군의 옷을 잡고 있으면 어떤 걱정도 다 사라졌다.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인 것 같습니다.”

확실하게 그들의 모습을 구별할 수 있는 거리에 든 악불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각상이면 왜 이런 곳에 세워 둔 거지?”

담수련도 이상한 듯 주위를 살피며 반문했다. 산 전체가 진이라면 조각상들이 어떤 예상치 못한 위력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검을 앞으로 찌르는 모습부터 내려치는 모습 땅에 엎드린 채 검을 뻗은 모습 등 조각상들의 자세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드디어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는 소로 안으로 들어선 악불군이 몇 장 가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 보았다.

‘뭐지? 이 기분은…….’

조각상들은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조각상들에게서 자신의 등을 노리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던 악불군은 이번에는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뒤를 보는 동안 앞에서 그를 공격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이 커졌다. 앞에 있는 조각상들의 자세가 하나의 초식을 이루는 듯하더니 당장이라도 그의 급소를 노리며 공격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소군, 왜 그래?”

“아가씨께서는 조각상들에게서 특이한 현상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담수련은 악불군이 뭔가를 느끼고 있음을 알고는 조각상들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난 느껴지는 것이 없는데?”

“만약 진이 작동을 했는데 그 환상을 저만 보고 아가씨는 안 보일 수도 있습니까?”

“소군과 나는 지금 한 몸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가깝게 있기 때문에 한쪽은 보이고 한쪽은 안 보이는 것은 불가능해.”

“그럼 지금 제가 느끼는 현상이 진에 의한 것은 아니군요.”

“어떤 현상을 느끼는데?”

“조각상들이 저를 공격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담수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저 조각상들이 어떤 검식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 아버님께 초식을 펼치는 무인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주화입마에 빠진 무림인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그래요?”

대답한 악불군은 조각상들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자 다시 물었다.

“아가씨, 지금 조각상들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그냥 똑같아.”

지금 조각상들이 펼치고 있는 자세는 공격 초식을 단계별로 만들어 순서대로 늘어 놓은 것이었다.

무공에 대해 조예가 높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멋있는 조각상에 불과할 수 있었지만 악불군 같은 고수는 단지 그 초식의 전개 과정만으로도 위협을 느낄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지닌 검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의 무공이 강할수록 그 압박은 더 강했다. 실지로 이곳을 방문한 고수 중에는 이 길을 걷다가 피를 토한 사람도 있었다. 조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을 내공으로 버티다가 견디지 못하고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하물며 악불군은 더 무공이 높았으니 계속 전진을 하는 것은 위험했다.

“이곳의 이름이 왜 미혼각인지 알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더 이상 전진을 멈추고 길을 따라 죽 이어지고 있는 조각상들을 전체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눈이 살짝 커졌다.

그의 눈이 점점 앞으로 나아갈수록 환영인지 실지인지 모를 정도로 조각상들의 움직임이 정교해졌다. 그런데 조각상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초식이 천륭검보의 자세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분명 다른 초식인데 비슷한 것 같다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도 만류귀종이라고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악불군이 움직이지 않고 계속 앞만 보고 있자 곁으로 더욱 가깝게 붙은 담수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험할 것 같아?”

“그냥 전진하면 제가 제풀에 미혹에 빠져 탈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풀에 탈진한다는 말에 담수련의 눈이 커졌다. 지금 악불군이 느끼는 심적 압박이 대단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냥 돌아갈까?”

“그냥 갈 수는 없지요.”

“난 소군의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저 안에 지금보다 더 위험한 요인이 있을 수도 있잖아. 오늘은 우선 돌아가자.”

“대단한 검식이고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조각상으로 저런 위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단 사실이 분명 신기합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주시면 돌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두고 확실치 않은 안전에 모험을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각 가까이 정면을 주시하던 악불군이 검을 뽑더니 담수련의 손을 잡고는 드디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곧 악불군의 검이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공격도 없었지만 악불군은 마치 정말 공격을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담수련의 몸을 이쪽저쪽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조각상의 검이 담수련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검후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세상에 나가면 자신의 검식을 받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악…… 불…… 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악불군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머리에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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