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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82화 (282/472)

<천검지애 282화>

282화. 검후(1)

악불군이 자신을 거의 안다시피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자 담수련은 그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주위를 살폈다.

악불군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치 생사결이라도 하는 듯 검을 휘두르며 움직이는 것과는 달리, 그녀의 눈엔 그저 여러 자세로 검을 들고 있는 조각상들이 보일 뿐이었다.

악불군의 행동에 이유가 있다고 믿은 그녀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뭔가를 발견한 듯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세상에……. 팔쾌만상풍운대진도 놀랄 일인데 이름조차 모르는 진이라니, 도대체 이곳을 만든 사람이 누구일까?’

아직 그녀 자신은 이곳이 진의 효과가 발동하고 있다는 징조는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각상들 사이에 꽂혀 있는 여러 종류의 지지대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조각상들의 자세를 지탱하기 위해 꽂혀 있다는 생각으로 무심히 넘겼다.

언뜻 보기에는 어떤 규칙도 없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서, 그 안에 그녀조차 잡아내지 못한 묘한 규칙이 있단 사실을 찾아낸 것이었다.

여전히 어떤 진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분명 진을 위해 꽂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진정으로 검을 연구하기 위한 검사들의 성지라고 했는데 이런 천고의 절진을 계속 만난다는 것은, 이곳이 절대 범상한 곳이 아니라는 증거야! 도대체 이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보타검각에 대한 의구심이 점점 커지고 있는 그녀였다.

그때 검을 휘두르던 악불군이 걸음을 멈추었다.

동시에 생각에 잠겨 있던 담수련도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검을 앞으로 뻗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과 비스듬히 들고 있는 남자의 조각상이 정면에 놓여 있었다.

[왜 멈췄어?]

담수련은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냈다.

[여기가 끝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단하네요.]

[뭐가?]

[지금 지나 온 길에 있는 조각상들의 마지막 초식이 저 두 조각상의 자세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실지로 이 검식을 펼친다면 대단한 위력을 보일 것 같군요.]

악불군은 검을 위로 치켜든 자세로 두 조각상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악불군의 검이 천천히 공간을 가르며 내려왔다.

“아가씨, 이제 다 끝난 것 같습니다. 가시지요.”

악불군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하자 담수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얼굴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역력했다.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담수련은 여전히 잡고 있는 악불군의 옷을 더 꼭 잡으며 뒤를 쫄랑쫄랑 따라가며 물었다.

“저들의 초식을 제가 깨뜨렸습니다.”

“어떻게?”

“그냥 저를 향해 공격을 하기에 파훼시킨 거지요.”

담수련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공이 약한 그녀로서는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조각상을 지나자, 정면으로 전각이 나타났다.

“역시 진이었어. 저 조각상을 지나지 못하면 이곳에 도착할 수가 없게 돼 있었네.”

문이 진을 들어오는 생문의 입구였다면 두 조각상의 사이는 생문의 출구였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미혼각의 총관인 명유경이라고 합니다.”

둘이 나타나자 한 명의 여인이 나타나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천호방 방주인 악불군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명유경이 몸을 돌려 전각 쪽으로 향하자 악불군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명유경은 전각의 한 문에 도착하자 문을 열고는 말했다.

“들어가시면 차와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잠깐 드시면서 기다려 주시면 검후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인사를 한 악불군과 담수련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 전각 안이 함정이라면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둘의 얼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와아~ 확실히 검각답네.”

전각 안으로 들어선 담수련은 안의 전경을 보자 감탄하듯 한마디 했다.

밖에서 본 전각은, 매우 단출해서 소박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을 들어서자 보인 벽면은 달랐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검사들이 싸우는 모습이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악불군은 그림들을 천천히 주시하며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조각상들이 보여 주었던 이름 모를 초식에 대해 분석하던 악불군은 벽화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벽화에 보이는 검사들의 모습에서 수많은 절기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각상도 그렇더니, 여기 그림들도 하나의 검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제가 여기 와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갈 것 같습니다.”

“그 정도야?”

“예, 저 그림에 그려진 검사들이 진짜 존재한다면 검각은 천하의 어떤 문파도 무시하지 못할 전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보통 문파는 이런 것을 외인들에게 감추려고 하는데, 여기는 좀 특이하네?”

“특이한 것이 아니라 누구도 이해를 못 할 것이라는 자부심이지요.”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냉막한 얼굴에 피부까지 눈처럼 새하얀 여인은 등장만으로도 전각 안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검후라 불리던 여인이었다.

‘대단한 여인이구나?’

단지 걸어오기만 하는데도 검이 그들 찔러 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녀를 보며 악불군은 얼굴이 굳어졌다.

강호에 나와 그가 가장 강한 자로 기억하고 있는 무인은 백천학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가만히 서 있던 그를 보며 공격할 엄두조차 못 낼 정도로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데 나타난 여인을 본 순간 받은 느낌은 가히 백천학을 봤을 때와 비견될 정도였다.

“저는 보타검각의 검후인 백리옥빙입니다.”

“악불군입니다.”

“천호방의 군사입니다. 담 군사라고 불러 주십시오.”

백리옥빙은 담수련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여기까지 오시면서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안내를 잘해 주셔서 힘든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대라천강절대검진(大羅天罡絶代劍陣)을 그렇게 쉽게 지나 온 분은 처음이에요. 솔직히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대라천강절대검진(大羅天罡絶代劍陣)이라면 그 길이 진이었다는 말입니까?”

“오로지 검을 다루는 사람들에게만 작동하는 유일무이한 천고의 절진이지요. 사실 그 조각상들이 펼치는 초식을 받아 내지 못했다면 그곳에서 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진이기도 하지요.”

순간 담수련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진이라는 말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은 그녀를 분노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희 천호방과 보타검각 간에는 원한도 없고 단지 절강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인데, 죽을 수도 있는 진에 우리를 집어넣은 행동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설마 죽게 놔두기야 했겠습니까? 위험하면 즉시 구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이 더 화가 나는군요? 악 방주님께서는 한 문파의 수장입니다. 그런 분을 위험한 곳에 몰아넣고 위험하면 구해 줄 생각이었다는 것은 대단한 결례가 아닐까요?”

“보타검각은 무공을 연구하고 새로운 검식을 창조하기 위해 모든 제자들이 뼈를 깎는 수련을 하는 곳입니다. 무인으로서 그런 보타검각을 방문해서 대접만 받고 간다면 방문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백리옥빙의 말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무가의 여식인 담수련 역시 이해한다는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악불군이 위험할 수 있었다는 말이 그녀를 못 참게 하고 있었다.

“어찌 됐건 무사히 빠져나왔으니 운이 좋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백리 소저께서 보타검각의 각주이십니까?”

악불군은 화를 풀라는 듯 담수련의 손을 한 번 꽉 잡아 주고는 화제를 돌렸다.

순간 차가워 보이는 백리옥빙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전 소저라는 호칭을 아주 싫어합니다. 검후라고 불러 주세요.”

“죄송합니다. 검후께서 보타검각의 각주이십니까?”

“보타검각의 각주님은 저와는 비교 자체를 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존재이십니다. 전 그분을 보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각주님을 만나 뵐 수는 없겠습니까?”

“각주님께서는 외부인을 만나지 않으십니다.”

“그렇군요.”

“사실 보타산에 외인이 발을 디딘 것 자체가 수십 년 만에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영광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보타검각은 검사들을 존중합니다. 악 방주님께서 검으로 명성을 얻으셨으니 그런 파격도 일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보통은 수하들을 보내 통고만 하고 가는데 굳이 방주님께서 직접 방문을 원하신 이유를 무엇인지 모르겠군요.”

“보타산이 있는 주산군도 역시 절강성에 속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설마 보타검각도 절강에 속해 있으니 보호비라도 내라는 말을 하고 싶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역시 총명하신 분이라 금방 알아들으시는군요. 사실 같은 무림 세력이고 정파로 불리는 보타검각에게 보호비를 받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타검각 역시 움직일 때는 본 방에 허락을 받으셔야겠습니다.”

백리옥빙의 입가에 조소가 나타났다.

“잠룡세가도 본 각에 그런 말을 못 했어요.”

“보타검각에 방문도 못 하신 것으로 압니다.”

“본 각은 잠룡세가에서 절강의 패자가 되었다는 통고를 했을 때 답도 주지 않았어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시나요?”

“제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까? 한 성의 패자가 바뀌었다는 의미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보타검각에서 잠룡세가를 어떻게 대우했는지는 제가 알 바가 아니지요. 지금의 패자는 천호방이고 저는 방주로서 보타검각 역시 천호방의 규칙을 따라주셔야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만약 거절한다면 본 각을 공격이라도 하실 요량이신가 보네요?”

“보타산의 주위를 팔쾌만상풍운대진이 둘러싸고 있는데 공격이야 엄두를 낼 수 있겠습니까?”

담수련이 슬쩍 끼어들며 말하자 백리옥빙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당신이 어떻게 팔쾌만상풍운대진을 알고 있는 거지요?”

자신의 지식으로 짐작은 했지만 확신하지 못하던 담수련은, 슬쩍 찔러 본 것이 통하자 미소를 지으며 받았다.

“천호방은 보타검각에서 생각한 것보다 강하답니다.”

“팔괘풍운만상대진을 안다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본 각에서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을 알 것 같은데요?”

“보타검각이 제 예상보다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담수련의 협박은 간단했지만 상당히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섬이라는 지형의 특성상 식자재의 출입을 막는다면 문제가 심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리옥빙은 다시 조소를 날리며 말했다.

“한번 그래 보시든지요. 하지만 행동을 하는 순간 후회할 기회도 없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세요.”

협박과 협박의 대결이었다. 그러자 다시 악불군이 나섰다.

“본 방이 나선다면 무림맹과 황실까지 보타검각에 대해 관심이 집중될 것입니다. 그동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조용히 지내 오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악 방주께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네요? 보타검각은 두 분이 생각하는 그런 문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를 더 화나게 한다면 보타산에서 영원히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이 정도면 됐어.]

악불군에게 전음을 보낸 담수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후의 말을 들으니 절강의 패자는 천호방이 아니라 보타검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솔직히 천호방은 신생 문파라 의욕만 철철 넘친답니다. 그럼 천호방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조해 주시면 저희도 보타검각에 대해 완전히 신경을 끊고 지내겠습니다.”

‘담수련…… 오음절맥을 타고난 대단한 지능의 소유자. 무슨 수작을 벌이려고 갑자기 태세 전환을 하는 거지?’

놀랍게도 백리옥빙은 담수련의 정체는 물론 그녀가 오음절맥을 지니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동시에 담수련은 자신을 주시하는 백리옥빙의 눈빛을 보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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