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83화 (283/472)

<천검지애 283화>

283화. 검후(2)

‘아까의 미소도 의미심장했는데 지금 나를 보는 눈빛도 뭔가 있어…… 설마 나에 대해 아는 것일까?’

담수련만이 가진, 특유의 육감이 발동하고 있었다.

백리옥빙은 냉소를 띤 채 담수련을 보며 다시 말했다.

“보타검각은 절강의 패자가 누구이건 상관한 적도 없고 행사를 방해한 적은 더욱 없어요. 그런데 마치 우리가 방해하리라 생각을 한 이유를 모르겠군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오늘 이곳을 방문하고 보니 보타검각에서 상관한 적이 없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네요.”

“함부로 본 각에 대해 짐작하지 마세요. 가만히 있다고 힘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자꾸 지레짐작으로 본 각에 대해 유언비어를 만들어 낸다면 천호방이 하룻밤 사이에 멸문할 수도 있어요.”

“말을 너무 함부로 하시는군요? 보타검각에게 천호방이 아주 쉬운 상대로 보이는 모양인데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을 겁니다.”

악불군이 슬쩍 담수련의 앞을 막으며 약간 기분이 상한 말투로 말했다.

“대라천강절대검진에서 마지막 초식을 파훼하셨더군요. 그런데 만약 살아 있는 사람이 움직이며 그 초식을 펼쳤다면 어땠을까요? 심지어 그 공격자가 백팔십 개의 검기까지 만들어 내 악 방주를 동시에 공격한다면 그래도 막을 수 있을까요?”

순간 악불군의 검미가 꿈틀했다.

대라천강절대검진을 통과하면서 악불군은 사실 고전했다고 할 수 있었다. 실지 공격도 아닌 단지 조각상이 만들어 낸 초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허상의 공격조차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마지막 공격은 무려 일각 가까운 시간이 걸려 파훼를 했다.

만약 그녀의 말대로 진짜 움직이며 그 초식을 펼친다면 더욱이 백팔십 개의 검기라니……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히려 반격에 나섰다.

“제가 막을 수 있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 난해한 검식을 펼치며 백팔개의 검기를 동시에 뿜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지 악불군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수법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있긴 있느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악불군이 막을 수 있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짜로 막을 수 있는지 직접 대결을 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그때, 그녀의 귀로 천리전성이 들려왔다.

[검후, 그 정도에서 끝내라. 지금 우리의 계획에 악불군은 아주 중요하다.]

백리옥빙은 무후의 천리전성을 듣자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녀 역시 여기서 악불군을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호승심을 누르며 말했다.

“기회가 되면 악 방주와 한 번 비무를 해 봐야 할 것 같군요. 물론 빈말하진 않으셨을 거라고 믿을게요.”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본 각에서는 천호방이 절강성의 패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또한 천호방의 행사를 방해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됐나요?”

“본 방 역시 주산군도는 보타검각의 세력으로 인정하고 이쪽으로는 접근을 아예 금지시키겠습니다.”

* * *

“아가씨, 보타산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선두의 정자에 앉은 담수련을 호위하던 사화 중 연화가 궁금증을 못 이기고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나머지 사화도 귀를 쫑긋했다. 그녀들 역시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보타산에서 내려온 악불군은 심각한 표정으로 사화에게 담수련의 호위를 명하고는 배의 난간으로 가더니 벌써 한 시진째 미동도 하지 않고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담수련의 옆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으면서 그녀들에게 호위를 명한 것은 그만큼 집중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담수련 역시 턱을 손에 괸 채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누가 봐도 보타산에서 대단히 심각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연화의 질문에 담수련은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뒷모습만 보아도 믿음직스러운 그였다.

“보타산에서 뭔지는 모르지만 깨달음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 그것을 정리하고 있을 거야.”

“또요?”

연화는 놀란 듯 반문했다.

무림인들에게 깨달음이란 무공이 발전해 나가는 데 한 획을 긋는 아주 중요한 단계였다.

하지만 평생을 무공만 수련하는 무림인들 중, 그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악불군은 대단히 특별한 경우였다.

“또요는 무슨 의미야?”

“악 방주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 제가 아는 것만으로도 벌써 두 번째잖아요? 제가 알기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고승이나 도력이 높은 도인들도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라고 하던데요?”

“그만큼 소군이 대단하다는 것 아니겠어?”

“그럼 무공이 또 확 느시겠네요?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고 하실 때마다 갑자기 강해지시곤 했잖아요?”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고수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아. 그들을 모두 아우르려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해.”

“그런데 아가씨께서도 무슨 깨달음이 있으셨어요? 보타산에서 내려오신 후 계속 아무 말도 없으셨잖아요?”

“소군과는 다르지만 나도 깨달은 것이 하나 있긴 해.”

담수련 역시 백리옥빙을 만나고는 그동안의 자신이 너무 교만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의 나이가 악불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일 정도밖에 안 됐다는 것도 그녀에게는 충격이었다.

담수련은 계속 보타검각에 대해 분석을 하고 있었다.

보타산을 봉쇄할 수도 있다는 말에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다른 통로가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보타검각……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다른 곳이야. 외부와 단절된 채 검만을 연구하는 검의 성지가 아니라 연계된 조직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 심지어, 나를 아는 눈치였어. 진짜 나를 안다면 소군에 대해서도 안다는 건데…….’

그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는 역용을 하고 있었고 천호방의 군사라고 알린 것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백리옥빙이 그녀를 알고 있다면 주위에 그녀에 대해 외부로 알린 간세가 있다는 추론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담수련은 자신의 측근 중 간세가 있다는 의심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이 자라다시피 한 잠봉단조차, 시성란이 배신한 적이 이미 있었다.

“아가씨, 저것 좀 보세요.”

연화와 담수련의 대화를 듣고 있던 추국이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자 하늘을 보더니 놀란 듯 말했다.

시커먼 구름이 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흑석영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아가씨, 폭풍우라고 합니다. 선실로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바다의 날씨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고 하더니 정말 천변만화(千變萬化)네? 그렇게 잔잔하고 맑던 하늘이 순식간에 저렇게 변하다니…….”

담수련은 다가오는 폭풍우를 보며 감탄의 탄성을 보냈다. 검은 구름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배로 다가왔다. 이미 배가 심하게 요동칠 정도로 파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비까지 뿌리고 있었다.

“방주님은 어떻게 할까요?”

악불군은 흑석영에게 자신이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 방해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 터였다.

그 순간조차, 악불군은 지금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담수련은 고개를 살레 저으며 말했다.

“방주님은 그냥 놔두세요.”

말을 마친 담수련은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비를 맞더라도 악불군의 옆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악불군의 성격상 무엇엔가 몰두한다 해도 그녀를 완전히 잊을 리 없었다.

그녀가 버티고 있는다면 악불군의 집중력을 저해할 것을 그녀는 알고 있기에, 선실의 입구 쪽으로 자리를 비켜 준 것이다.

대라천강절대검진에서 만난 조각상들은 악불군에게 상당한 충격과 함께 검의 경지를 한 단계 더 높여 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천륭검보를 익힌 후, 지금까지 그는 홀로 모든 것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사부 없이 발전해 왔다.

그것은 그에게 대종사의 자질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육관의 수련으로 기초적인 체력을 단련했고 담무룡의 시술로 예상을 넘는 천고기연까지 만나 내공의 부족함까지 충족시켰다.

하지만 무공의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공부가 너무 부족한 것은 그의 최대 약점이었다.

소림내경일지선이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악불군의 무공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면 할수록 자신의 공부가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도 못했던 조각상에서 그가 부족함을 느꼈던 무공 원리를 깨달았으니 보타검각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대라천강절대검진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타검각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보타검각이 세워질 때부터 있었고 그 진을 통과한 사람만이 진정한 강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불문율이 생겼을 뿐이었다.

그중 대단히 뛰어난 제자들 중 몇 명은 조각상의 초식을 익히기도 했다. 검후가 바로 그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단지 조각상만으로도 검의 고수들을 괴롭힐 정도로 대단한 검식이 실지로 사용을 했을 때는 그 위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진짜 중요한 것이 검식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심오한 검리라는 것을 외인인 악불군이 발견했다는 것은 실로 천연(天緣)이라고밖에는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조각상의 자세들과 천륭검보의 자세가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폭풍우는 예상보다 강력했다.

악불군이 탄 배는 상당히 큰 크기였지만 거대한 파도에 의해 물위에 뜬 가랑잎처럼 격렬히 흔들렸다.

그 와중 비까지 세차게 떨어져 배를 제어하기에 바쁜 수하들은 물까지 배 밖으로 퍼 넘겨야 했다.

‘이거 배가 견딜 수 있을까 모르겠구나…….’

수하들을 진두지휘하며 배를 조종하던 흑석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대한 자연의 힘은 무림 고수들도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세요.”

선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악불군만 보고 있는 담수련에게 추국이 애탄 목소리로 말했다.

담수련의 옷은 바람에 심하게 펄럭였고 몰아치는 빗줄기에 상당히 젖어 있었다.

오음절맥을 지닌 사람은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극히 조심해야 했다. 그것을 아는 추국으로서는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소군을 두고 나만 안에 들어가 편하게 있을 수는 없어.”

사실 지금 상황에서 선실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비만 안 맞는다 뿐이지 편할 수는 없었다. 배 전체가 심하게 용동을 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사화가 담수련의 몸을 잡고 버티지 않았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었다.

그때 담수련의 눈이 커졌다. 미동도 하지 않던 악불군이 검을 빼 들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번쩍번쩍 벼락이 치고 있는 이런 폭풍우 속에서 검을 빼드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담수련은 안 된다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너무 소중한 사람이 너무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알기 때문에 그녀는 말릴 수가 없었다.

“와아!”

그때 사화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악불군의 뽑아 든 검에서 금빛강기가 무려 일장이나 뻗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강기는 악불군의 움직임에 맞춰 공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곧 강기는 배 전체를 덮었고 배의 요동까지 멈췄다. 심지어 그토록 강하던 빗줄기조차 강기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가고 있었다.

폭풍우속에 금빛강기로 둘러싸인 배의 모습은 누군가 보았다면 천신의 강림으로 착각을 할 정도였다.

한참을 검을 휘두르던 악불군의 몸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에서 뻗어 나온 강기가 악불군의 몸까지 번지더니 그의 몸 전체가 금빛으로 변한 것이다.

거기다 그의 손에 들고 있던 검이 어느새 두 개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천륭검은 사실 쌍검이었다. 얇은 두 개의 검이 하나의 검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악불군의 깨달음에 맞춰, 그도 모르는 사이에 두 개로 분리된 것이다.

한 개는 악불군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사방을 베고 또 하나는 악불군의 손에서 강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기적과 같은 광경에, 자신들의 할 일도 잊은 채 넋 잃고 보던 모든 수하들이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바닥에 댔다.

심지어 흑석영을 비롯한 네 명의 호법조차 자연스럽게 부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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