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84화 (284/472)

<천검지애 284화>

284화. 신경(神境)

‘자연과 하나가 되셨어. 마치 전설로만 듣던 자연경의 경지 같구나…….’

폭풍우의 바람과 비 그리고 벼락까지 악불군과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고, 흑석영은 다시 한번 머리를 바닥에 댔다.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처음 악불군의 검은 바람을 가르고 비를 잘랐으며 벼락을 튕겨 냈다.

하지만 지금은 악불군 스스로가 바람이 되고 비가 되었으며, 벼락과 동화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말하는 무공의 최고 경지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삼 갑자 이상의 내공을 얻게 된 후 흔히 말하는 삼화취정(三華聚頂) 오기조원(五氣朝元)의 경지에 들어서면 화경(化境)이라고 한다. 비슷한 경지의 마도인들은 마를 극복했다 하여 극마지경이라고도 했다.

사 갑자의 내공을 얻고 등봉조극(登峯造極)의 단계에 올라서면 그때부터 신의경지에 들어섰다 하여 입신 또는 현경(玄境)이라고 했다. 마도인들은 마를 벗어났다 하여 탈마(脫魔)지경이라고 불렀다.

무림에서는 무황들이 현경의 경지라고 믿고 있었다.

내공이 오 갑자를 넘고 출신입화지경(出神入火之境)의 경지에 들어서면 신이 되었다 하여 신경(神境)이라 한다. 또한 생사를 초월했다 하여 생사경(生死境)이라고도 하는데, 무림 역사상 생사경에 이른 무림인은 열 명도 안 될 거라고 알려져 있었다.

마도인들은 마를 넘어섰다 하여 초마(超魔)지경이라고 불렀다. 마도에서는 초마지경에 든 마도인으로 천년마교의 초대교주인 천마만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연경은 확실하게 정의된 무공의 경지는 아니었다.

시선이라 불리는 이백은 시로써 자연경에 올라섰다고 했고, 용의 눈을 그려 용을 그림에서 튀어나오게 했다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전설을 만든 장승요는 그림으로 자연경에 오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무공을 몰라도 자연경에는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경은 무공의 경지에 포함되지 않았다.

실지로 자연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도 화경이나 현경의 경지에 오른 무림인들은 꽤 있었다. 하지만 자연경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생사경의 경지에는 절대 오르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자연과 동화하여 일체를 이루게 되는 자연경의 경지에 오르기를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자연경의 경지는 노력으로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악불군처럼 젊은 나이에 자연경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두 개의 검이 하나로 다시 합쳐지고 악불군의 몸을 덮고 있던 금빛강기가 천천히 사라지며, 공중에 떠 있던 악불군의 몸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배 위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폭풍우도 지나가기 시작했다.

바람은 많이 잦아들었고 하늘을 밤처럼 어둡게 하던 검은 구름도 다른 쪽으로 밀려갔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악불군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선실 입구에서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담수련을 보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소군!”

담수련은 악불군이 자신을 보며 미소를 보이자 그대로 그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악불군이 놀라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치 담수련의 머리 위로 막이 생긴 듯, 떨어지는 빗줄기들이 튕겨나갔다.

“아가씨는 비 맞으면 안 되십니다.”

악불군은 그녀를 급히 감싸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어차피 빗방울 다 막아 주고 있으면서 뭘 또 손까지 올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소군, 지금 뭘 했는지 알아?”

“보타검각의 검후가 말한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대라천강절대검진의 무공과 백 개의 검기가 동시에 그를 공격할 경우 정말 막을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리고 그 불가능할 것 같은 공격을 막아 낼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진짜 굉장했어! 소군 멋있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까는 정말 천인 같았다니까!”

담수련의 칭찬에 악불군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지만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폭풍우의 중심은 지났지만 아직 파도가 높고 바람도 센데 모두 뭐하는 겁니까? 빨리 일어나서 바다를 벗어납시다.”

악불군이 여전히 부복하고 있는 수하들에게 소리치자, 모두는 벌떡 일어서더니 각자의 자리로 달려갔다.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들의 주군이 악불군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 * *

“검후, 진짜 악불군을 죽일 생각이었느냐?”

보타성후는 싸늘한 표정으로 백리옥빙을 보며 물었다.

보타성후의 명령은 신의 뜻이나 마찬가지인 보타검각에서 만약 진짜 악불군을 죽이려고 했다면, 아무리 그녀라 해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무후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 악불군을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경고를 주지 않았다면 넌 네 성질을 못 이기고 악불군을 죽였을 거야. 성후님, 검후는 계획에서 빼야 합니다. 그녀에게 계속 임무를 맡긴다면 분명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 것입니다.”

무후의 말에 백리옥빙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더니 보타성후에게 말했다.

“악불군에게서 뭔지 모를 신비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번 시험을 해 보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번 악불군의 방문을 받아 준 것은 악불군 때문이 아니라 담수련 때문이었다. 담수련이 가장 믿는 자가 악불군이라고 하던데, 대놓고 악불군을 적대시한다면 어찌 담수련을 회유할 수 있겠느냐?”

“오늘 제가 자세히 그녀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회유가 쉽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회유가 쉬운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원대한 꿈을 이해한다면 담수련도 우리에게 붙을 것이다. 악불군은 지금 무림 상황에서 대단히 유용한 자다. 하나, 적이 된다면 골치가 많이 아플 수도 있어. 반드시 담수련을 회유해야만 악불군을 우리의 수족처럼 이용할 수 있다.”

“끝까지 회유가 안 된다면 어떡하지요?”

무후의 말에 보타성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최후의 수단이 있지 않느냐? 만약 회유가 안 된다면 그를 이용할 수밖에 없겠지.”

그녀들은 담수련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들 생각대로 회유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폭풍우가 언제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평온을 찾은 바다를 보며 담수련은 놀랍다는 듯 말했다.

“바다가 화를 내면 세상의 어떤 것도 다 집어삼킨다고 하더니, 그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더라. 소군이 아니었다면 배가 넘어갔을지도 몰라.”

“배를 아주 잘 다루는 방도들입니다. 폭풍우가 상당히 거셌지만 침몰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 깨달음에서 얻은 것은 뭐야?”

“대단히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너무 틀에 박힌 초식을 구사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원래 초식은 의도적으로 틀을 정한 거 아닌가?”

“맞습니다. 특히 천륭검보는 자세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생긴다면 그 위력이 순식간에 반감합니다. 하지만 똑바른 자세만을 고집하면 발전이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 소군의 말은 매우 모순(矛盾)이라는 거 알아?”

“어찌 보면 정말 모순이지요. 그래서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 같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안내해 준 보타검각의 대라천강절대검진은 정말 대단한 절정 검식인데, 이방인인 저희에게 그곳을 구경시켜 준 것은 솔직히 좀 이해가 안 됩니다.”

“소군은 그들이 좋은 의도로 우리를 그 진으로 유인한 것 같아? 만약 소군이 그 진을 풀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했다면 아마 우리는 거기서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어. 소군은 거기서 기연을 만났지만, 보타검각의 입장에서 그곳은 함정일 뿐이야.”

“검의 성지로 불리는 곳에서 그런 절세의 검식을 몰라봤을까요?”

“대라천강절대검진을 보타검각에서 만든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유추를 해 볼 수는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들이 소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거야. 하지만 엄청난 기연을 만나게 해 줬으니까 굳이 나쁘게 보지는 않을 생각이야.”

“엄청난 기연까지는 아니고 말 그대로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을 뿐입니다.”

“소군은 그때 얼마나 대단한 모습을 보였는지 모르지? 네 명의 호법들이 전부 모습을 드러내고는 부복했어. 왜 그랬을 것 같아?”

솔직히 악불군은 당시 상황을 다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다. 갑작스러운 영감을 얻으면서 무아지경으로 검식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가 펼친 검식은 기억하지만, 그것이 만든 위력은 느끼지 못했다. 특정한 대상을 향해 검을 날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몸은 상당히 가벼워진 것 같고, 단전에도 내공이 많이 충만해 졌습니다.”

“단전에 내공이 축적되기 시작한 거야?”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방에 돌아가서 수련하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담수련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보타검각 말이야. 좀 수상하지 않아?”

“좀이 아니라 많이 수상한 것 같았습니다. 그녀들도 저희가 의심할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텐데, 왜 그런 모습을 보였을까요?”

“나도 계속 그것이 의아했어. 하지만 무상 진인께서 말씀하신 그 신비의 조직이라고 보기에는, 보타검각의 규모가 너무 작지 않을까? 지휘부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주산군도는 너무 외곽이야.”

무상 진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비밀 조직은 전 중원에 뻗쳐 있어야 했다. 보타산은 중원에서도 동쪽 끝에 있는 바다에 위치해 있었다. 전 중원에 뻗어 있는 조직을 통솔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안 좋았다.

“그 조직의 본산이 따로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검후라는 여인의 무공이 대단히 높았다고 했잖아?”

“예.”

“그런데 보타검각의 수장도 아니었어. 본 산의 지휘를 받는 분타 정도로 보기에는 너무 강한 것 같지 않아? 그들이 이렇게 강하다면 그 긴 시간을 숨어서 이간과 분열만 획책할까? 나 같으면 그 정도 힘이면 직접 나섰을 것 같은데?”

“그 조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목적을 가진 집단은 아닌 것 같아.”

“그래도 예정된 일정을 다 끝냈으니 이제 총단에 돌아가면 좀 쉴 수 있겠군요.”

“어차피 소군은 쉬지 않고 수련만 할 거잖아?”

“수련만 하지는 않습니다. 아가씨와 좀 놀기도 해야지요.”

“아니야. 나와 놀지 않아도 되니까 수련에만 몰두해.”

악불군과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그녀가 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뭔가 할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아가씨, 또 무엇을 하시려고요?”

“천호방의 간세를 잡아야겠어. 수련하는 동안 적설을 내가 좀 써야 할 것 같아.”

“그거야 상관없지만…….”

“그런데 적설은 어디 갔어?”

“적설도 그렇고 보타산을 배회하던 새도 그렇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 다 흥분하는 것 같아서 제가 육지로 가서 좀 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적설은 어디에 쓰시려고요?”

“총단에 도착하면 말해 줄게.”

* * *

천신문 총단을 책임지고 있는 문창현은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주님께서 나도 모르는 비밀 세력을 만들어 소가주님과 아가씨께 맡겼다. 그런데 왜 나한테까지 숨겼을까?’

그와 담무룡은 주종간이지만 거의 친형제처럼 속내까지 말하는 사이였다. 잠룡밀을 맡긴 양호철이나 잠봉밀의 누진봉이 담무룡에게 대단한 신임을 받고는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신임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대공과 계속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담무룡이 알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을 배신할 자들을 이미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주님의 성격상 그것을 알고 있다면 왜 우리를 그대로 두었을까? 대공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말이 안 돼.’

대공의 체면을 생각해서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면 명목상의 높은 지위만 내려도 됐다. 그러나 담무룡은 무력 집단까지 맡겼다.

담무룡이 너무 쉽게 무너진 것도 정예인 무력 집단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심하던 문창현이 갑자기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그래! 이미 알고 그랬다면 가주님은 살아 계실 거야. 하지만 소가주님과 아가씨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계획을 짜실 분이 아닌데…….”

고개를 갸웃하던 문창현은, 무엇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듯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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