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85화 (285/472)

<천검지애 285화>

285화. 사건(1)

‘그래, 가주님께서는 이미 피할 계획을 세워 놓고 계셨어.’

문창현은 잠룡세가에 반란이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담무룡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엔 자신이 알아채지 못했던 중요한 암시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단 그가 의아했던 것이 있었는데, 담무룡만 사용하는 전서구들이 한 마리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반란이 일어난 날, 냉철한 담무룡답지 않게 그는 평소와 달리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주님의 계획이 갑자기 어긋난 것이 분명해……. 배신자가 있었다면…… 누구였을까?’

중얼대던 그는 뭔가를 느낀 듯 탁자를 주먹으로 치더니 밖을 향해 소리쳤다.

“누 장로님께 잠깐 오시라고 해라.”

“예!”

대답이 들리고 일각도 안 되어 누진봉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누 장로, 종리 단주께 연락이 가능합니까?”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언제 답이 올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그럼 제가 아주 중요한 문제로 급하게 만나고 싶어 한다고 연락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다급한 문창현의 말에 누진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모습에서 초조함을 느끼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문창현은 도대체 무엇을 발견했을까…….

* * *

“이런 건방진 것들이 감히 누구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려고 드는 거야!’

서찰을 읽던 금령군주 금잔화의 눈동자 색깔이 금홍색으로 변했다. 그녀가 대단히 화가 났을 때 나타나는 색이었다.

어떤 내용이기에 이렇게 화가 났을까?

그런데 그녀가 대노한 것은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찰은 그녀의 침실 탁자에 놓여 있었다. 그녀를 호위하는 무사들과 시녀들은 그녀가 가장 믿는 친위대들이었다.

그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서찰을, 그것도 집무실이 아닌 침실 탁자에 놓아둘 리 없었다. 하지만 경계 무사들의 눈을 피해 침실까지 누가 들어온다는 것은 그녀가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만이 남는다. 그녀가 믿는 친위대들 중에 간세가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망가져 버렸지만 그녀는 거의 모든 세력에 간세들을 심어 놓고 정보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그런 꼴을 당하니 화가 올라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주위에 나도 모르는 간세를 심어 놨단 말이지? 이것들이 나를 뭐로 보고!’

그런데 중얼거림으로 미루어 그녀는 서찰을 보낸 자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악불군을 건드리지 말라는 거지? 뭔가 이용할 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화가 좀 진정이 되자 금잔화는 고심에 빠졌다. 악불군은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옆에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첫 남자였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군주님, 접니다.”

그때 밖에서 금령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안으로 들어선 금령사자의 손에는 서찰이 하나 들려 있었다.

“오늘따라 웬 서찰이 자꾸 날아오는 거야?”

“또 누가 서찰을 가지고 왔습니까?”

“넌 몰라도 돼. 그래 그건 누가 보낸 거냐?”

“대공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예!”

“줘 봐.”

금령사자에게서 서찰을 건네받은 금잔화는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무슨 안 좋은 내용이라도 들어 있습니까?”

금령사자는 금잔화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은 짜증 나는 날인 모양이네. 철무정에게 태양천의 중원 비밀 세력을 맡기신단다.”

“비밀 세력은 군주님의 소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난들 알겠냐?”

“어찌하시겠습니까?”

“대공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인데 거역할 수는 없지 않느냐? 소천주를 이쪽으로 모시고 와라.”

“알겠습니다.”

금령사자는 금잔화가 얼마나 권력욕이 큰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순순히 철무정에게 권력을 넘기려 하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에 더 이상 물을 수는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금령사자가 나가자 금잔화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는 대공이 자신을 떠보기 위해서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판단했다. 만약 그녀가 그의 명을 거역하는 순간 그의 의심은 확신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나를 의심하고 있어……. 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듯, 눈동자의 색깔이 금색에서 여러 차례 변하고 있었다.

* * *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고 항주 시내로 나갈 때가 종종 있었거든.”

“그때는 제가 육관 수련 중이라 아가씨를 모시지 못했지요.”

“소군이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거야.”

“가주님 생각이 나십니까?”

“아니, 아버지 생각 때문에 그 말을 꺼낸 것이 아니야.”

“그럼?”

“그때 아버지께서 수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오면 성민들이 모두 숨기 바빴어. 숨는 것이 늦어진 사람들은 오체투지를 하고 고개도 못 들었는데, 어린 내 눈에도 벌벌 떠는 것이 보였어.”

담무룡은 수하들은 물론 양민들에게까지 공포의 존재였다.

“가주님께서 좀 무섭긴 하셨지요.”

“그런데 지금 봐 봐.”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항주포구에 도착한 담수련과 악불군은 수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총단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성민들은 천호방주가 지나간다는 말에 도망은커녕 오히려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 몰려들었다.

심지어 그에게 추파를 보내는 여인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네요.”

“무림 세력의 방주가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저렇게 친근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드리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을 거야.”

그녀 말대로 성민들은 악불군과 눈이 마주치며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눈이 마주친 그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악불군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목례해 주고 손까지 들어 흔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무림인들은 양민들에게 대단히 특별한 존재로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당연시했다.

사파와 마도인은 공포를 통해 권위를 내세웠고, 정파는 양민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무게로 권위를 보였다. 그런데 악불군의 행동은 무림인으로는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저나 저분들이나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제가 좀 강하다는 것뿐이지요. 전 저분들에게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호하는 사람이고 친구입니다.”

악불군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담수련은 감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존경까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악불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의 이런 똑바른 인성이었다.

“가만 보면 소군하고 난 너무 닮은 게 많은 것 같아.”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멀리서 착잡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백룡신권 황보준백이었다.

‘양민들에게 저렇게 존경을 받은 무림인이 있었을까?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몇 달밖에 안 됐는데 절강을 아예 바꿔 버렸어. 안 되겠어. 군사님을 만나서 내 보고서가 잘못됐으니 폐기해 달라고 말씀드려야겠어.’

그는 악불군에 대해 나쁜 정보를 보고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린 듯했다. 지금 보이는 악불군의 모습은 그가 본 누구보다도 정의로웠기 때문이었다.

* * *

악불군이 보타검각을 방문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천하의 정세는 상당한 안정세를 보이고 있었다. 서달이 이끄는 북벌군은 원나라를 완벽하게 중원에서 몰아냈고, 치안 역시 다시 살아나며 전쟁의 상흔이 조금씩 아물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세의 안정과는 달리 무림은 조용하지 않았다.

드디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대부분 복원되었다. 하지만 예전의 성세를 되찾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다 보니, 원나라 시절 자리를 잡았던 수많은 문파들이 저항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저항이었다.

무림맹에서 부역자를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정파들의 영역에서 버티던 세력들을 일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거의 학살 수준으로, 매일 수십 명에서 수백 명씩 죽어 나갔다.

무림은 여전히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주 평온한 지역이 하나 있었다.

바로 절강성이었다.

“아가씨, 밖에 꽃이 아주 예쁘게 피었어요.”

담수련이 뭔가에 몰두한 채 자신의 방에서 꼼짝하지 않자, 흑란이 슬쩍 말을 걸었다.

담수련은 고개를 돌려 창을 보더니 다시 책상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예쁘긴 하네.”

“아가씨, 요즘 같이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잠룡세가 때도 거의 매일 긴장하고 지냈는데, 지금은 정말 편하게 지내고 있네요. 그렇지만 아가씨께서는 더 많이 일을 하고 계시니, 건강을 해치실까 걱정됩니다.”

사화는 어떻게든 그녀를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 한마디씩 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잠룡세가 때도 자주 있던 일이었다.

담수련은 움직이는 것을 싫어해서, 수련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방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은 악불군이 육관의 수련을 끝내고 담수련을 밀착 호위를 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근래 악불군이 수련장에서 거의 매일 시간을 보내면서 담수련이 방에서 나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히 해. 지금 나도 머리가 복잡하니까.”

지금까지 그녀가 세운 계획은 대부분 상황에 맞춘 임기응변식이었다.

그런 그녀가, 악불군이 수련에 집중하자 그동안 모은 정보를 분석하며 대계(大計)를 세우기 시작했다.

대계는 과거와 현재를 완벽하게 분석하고 미래까지 예측해야 하기 때문에, 천하제일의 책사라는 제갈우명을 보유하고 있는 무림맹에서도 군사전을 두고 수십 명의 학사들에게 분석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담수련은 모든 것을 혼자 하고 있었으니, 그녀가 아무리 대단한 두뇌의 소유자라 해도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하시는데요?”

추국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여기 봐 봐.”

담수련은 여러 개의 동그라미와 그것을 잇는 선들이 거미줄처럼 그려진 그림을 가리켰다.

“그게 뭔데요?”

“이게 중원이라고 치고, 여기에 무림맹이 있어. 구천마성은 광동 어디쯤에 있다고는 하는데 정확한 장소는 모르겠고, 여기에 정천보 그리고 여기는 화룡세가…….”

한참을 듣던 사화의 중 삼화의 눈이 추국을 향했다.

왜 쓸데없는 것을 물었느냐는 질책의 눈빛이었다.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지명과 문파 이름, 그리고 그들의 세력권이 어디에서 중복되는지 등을 듣는 그녀들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더 얘기해 줄까?”

“아닙니다!”

담수련의 질문에 모두는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조용히 해.”

“예~”

모두 입을 막은 담수련은 다시 분석에 들어갔다.

오룡세가 중 화룡세가만 남고 모두 몰락한 지금 거대 세력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천하를 오등분하고 있었다.

남쪽에 구천마성이 있고 동쪽에는 천호방, 서쪽에는 혈해사계 그리고 북쪽에는 여전히 태양천이 건재했다. 거기다 중앙에는 가장 강대한 무림맹이 버티고 있으니 병법상 따지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상황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천호방을 다른 세력과 같은 선상에 둔 것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담수련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해……. 원나라가 물러나고 구파일방이 다시 성세를 회복했다. 거기다 최고의 전력을 지닌 무림맹까지 있는데 실지로는 정파가 매우 위태로워. 거기다 어디서든 누가 한 발만 당기면 연쇄적으로 커다란 전쟁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상황이야.’

담수련은 지금 천하가 절대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그 모든 불안의 원흉은 바로 혈교였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아직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무상 진인이 말한 신비의 조직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어서였다.

그때, 고철황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고 장로입니다.”

담수련의 아미가 살짝 좁아졌다.

목소리에 담긴 급박함에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고 장로님께서 이렇게 허둥대는 것은 처음 보네요?”

“문 군사가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순간 담수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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