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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288화 (288/472)

<천검지애 288화>

288화. 추적(1)

중년인은 악불군이 자신을 쳐다보자 급히 허리까지 숙이며 포권을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최고의 예우였다.

“전 남궁세가의 장로인 남궁원익이라고 합니다. 천호방의 방주이신 악 대협께서 안휘성에 들어섰다는 얘기를 듣고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남궁 대협이시군요. 잠시 지나쳐 가는 길이라 연락도 못 했는데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하시다니 감사합니다.”

악불군은 그들이 시비를 걸려고 온 것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일어서 역시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둘의 대화를 들은 호사가와 손님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가지고는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절강성의 지배자인 천호방과 악불군이 양민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는지는 천하에 소문이 파다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절강에서 살겠다고 몰래 경계를 넘는 양민들이 많아져 관에서 경계를 더욱 높였다는 말까지 있었다.

양민들은 관의 허락 없이 다른 성으로 넘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악불군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감히 다른 무림인들에게는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무림 십왕에 봉해지신 분인데 당연히 인사드려야지요. 남궁세가가 여기서 반나절 거리입니다. 한번 들러서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요.”

오대세가의 수좌로 불리는 남궁세가에서 신생 문파의 방주를 장로가 찾아와 식사 초대하는 경우는 전례가 없었다. 그만큼 악불군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남궁세가에서 초청해 주시니 실로 영광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희가 좀 바쁜 일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들러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악 방주님께서 오신다는 연락만 주신다면 제가 직접 마중 나가겠습니다.”

“그럼 제가 돌아오는 길에 시간을 만들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안휘를 벗어날 때까지는 주루와 객잔의 모든 비용을 저희 남궁세가에서 지불할 것이니, 마음껏 편히 쉬면서 여행을 하십시오.”

“아닙니다. 어찌 그런 과분한 대접을 받겠습니까.”

“귀한 손님이 안휘를 지나는데 남궁세가에서 그 정도의 편의도 봐주지 않는다면 천하가 비웃을 겁니다. 악 방주님께서 안휘에 오신 것을 환영하는 의미이니 부디 부담 갖지 마십시오.”

[소군, 그냥 받아 줘. 그래야 다음 만났을 때 어색하지 않을 거야.]

보고 있던 담수련이 전음을 보냈다. 그냥 두면 고지식한 악불군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하하하하! 신세라니요. 가까운 정파끼리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악불군이 받아들이자 남궁원익은 기분이 좋아진 듯 크게 웃더니 다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희가 계속 방해를 할 수는 없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꼭 귀환하실 때 들러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돌아가자 호사가와 손님들도 자리에서 일어서, 존경 가득한 눈으로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양민들이 무림인을 보면 피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이번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조용히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의미로 떠난 것이었다.

“이제 소군의 위상이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높아진 것 같아. 천하의 남궁세가에서 직접 찾아와 초대를 하니 말이야. 거기다 지금 나가는 사람들 눈 봤어? 소군을 존경하는 눈빛들이었어. 양민들에게 존경받는 무림인. 너무 멋있다.”

담수련은 ‘악불군 영웅 만들기’ 계획이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되는 것 같자 기분이 많이 좋았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죽기 전에 가능할지 자신하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천호방기도 내리고 방도들도 주위에 있지 못하게 했는데도 남궁세가에서 어느새 알고 찾아온 것을 보면, 예전 남궁세가의 성세를 벌써 복구한 모양입니다.”

남궁세가 역시 수십 년간 안휘에서 쫓겨나 지하에 숨어 저항해 왔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에 체계를 완전히 갖췄다는 것은 그들의 저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남궁세가는 안휘에서는 황제와 같은 위세를 떨쳤다고 해. 양민들과도 사이가 좋아 태양천의 기습 때 양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들이 피신하는 것을 도왔다고 하더라고.”

“양민들이 그랬다면 좋은 문파인 것은 확실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어떨지 아직은 모르지. 귀환길에 들르겠다고 한 것은 아주 잘 판단한 것 같아. 어찌 보면 천호방과 가장 가까운 문파인데 좀 더 빨리 만났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

말은 그랬지만 담수련이 남궁세가와의 만남을 미룬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잠룡세가에 가장 큰 원한을 가진 문파가 바로 남궁세가였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의 세력은 절강이지만, 강소와 복건 그리고 안휘까지 그의 힘이 뻗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하에 숨어 저항하는 남궁세가와 가장 많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담수련은, 악불군의 명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남궁세가를 만나 정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친분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부터 저희 뒤를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동방 장로님 말대로 소군을 암습하려는 자들인가?”

“생각보다 고수들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어?”

“먼저 공격하기 전에 죽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고. 쫓아가서까지 피를 보는 것은 좀 그렇긴 하니까.”

무림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모하면서도 미련한 행동을 거침없이 하기도 했다.

절세 비급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수많은 고수들이 몰려든다. 심지어, 도저히 얻을 가능성이 없는 이, 삼류의 무림인들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다가 무참히 목숨을 잃곤 했다.

지금 악불군의 뒤를 따르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악불군의 명성이 무황에 육박하고 그의 놀라운 무공에 대한 소문도 널리 퍼져 있음에도 몰려들고 있으니 말이다.

* * *

“천호무적검이 보타검각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합니다.”

“보타검각?”

최학의의 보고를 받은 혈우대마종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예.”

“천호무적검이 거긴 왜 간 거지?”

“절강의 패자가 바뀌면 보타검각에 알리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왜?”

“보타검각의 영향력이 상당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강호에 나와서 활동도 하지 않는데 그 영향력의 원인이 뭐냐는 거다.”

“…….”

최학의는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보타검각……. 내가 왜 거기를 잊고 있었을까?”

혈우대마종이 전 중원을 휩쓸며 혈겁을 이어 갈 때, 보타검각에도 쳐들어간 적이 있었다. 검의 성지니 뭐니 하면서 금역화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는 보타검각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보타산이 보이기는 했지만 배가 들어가지를 못한 것이다. 보타검각은 안내를 받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의 능력이면 너끈히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했는데,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다시 와서 없애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 후 그가 사대무황에게 당하면서 잊었던 이름이었다.

비릿한 미소를 짓던 혈우대마종은 최학의를 보며 다시 말했다.

“주산군도는 천마전 담당이지?”

“절강에 속해 있으니 천마전에서 담당하는 지역입니다.”

“보타검각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라고 해라.”

“바다에 떠 있는 섬이고, 그들의 안내 없이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도 이미 경험해 봤다. 그 일을 해 내느냐 못하느냐는 천마종에게 달린 것이니, 너는 내 명을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최학의가 나가자, 아무 말 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혈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 중 하나라고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그 어린놈들에게 당하고 절치부심하며 혈교를 세우면서 모든 세력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짰는데, 보타검각은 빠져 있었어. 듣기 전에는 존재 자체를 까먹을 정도로 보이지를 않는 곳이니 말이다. 무림인들 역시 평상시에는 보타검각을 전혀 신경도 안 쓴다. 그런데 막상 이름을 들으면 존경을 표한단 말이야.”

“누군가 계속적으로 보타검각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봐야겠군요?”

“그래,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퍼뜨려야만 지금의 명성이 이어질 것이야. 의심할 만하지 않느냐?”

“교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매우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않고는 중원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지금 태양천을 보면 그것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대단하던 원나라와 태양천을 일 갑자 만에 완전 분열하게 만든 것은 저조차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혈우대마종은 원나라가 몰락하고 태양천이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그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들’이란 무상진인이 말한 신비의 조직일 확률이 높았다.

“천호방에 간세를 심는 작업은 잘 이행이 되고 있느냐?”

“천호방이 창방을 하면서 원체 어중이떠중이 다 받아들인 덕분에, 하위 무사들은 예상보다 많이 포섭이 되고 있습니다.”

“하위 무사들이야 도움이 되겠느냐?”

“저번 보고에 따르면 중간 간부들도 몇 명 성공했다고 했습니다. 다만 고위 간부들은 만약을 생각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면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나이가 있는 만큼, 나도 더 이상 대계를 미루는 것은 어렵다.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혈뇌전에서 잠도 안 자고 계속 점검하고 있습니다. 지금 변수는 영웅대회의 날짜가 나온 것이지만, 오히려 대계에는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다만…….”

“다만 뭐냐?”

“천호무적검의 움직임이 전혀 예상을 따르지 않아 대처가 어렵습니다.”

“우선 내가 말한 대로 그것들의 정보를 천호무적검에게 슬쩍 흘려라. 그동안의 행태를 보면, 그것들에 대해 알면 분명 조사에 나설 것이다. 둘의 싸움을 두고 본 후에 기회가 되면 제거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동안 분석한 것과 새로운 보고는 서류에 다 정리했으니 살펴보시고, 이상한 것이 있으시면 연락을 주십시오.”

“알았다. 가 보거라.”

혈뇌가 나가자 혈우대마종은 그가 놓고 간 서류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천호무적검 이 아이는 확실히 다른 점이 많군. 우리가 예측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어. 이렇게 되면 변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처하기가 쉽지 않지……. 역시 빨리 제거해야 하나?”

원래 혈우대마종은 악불군을 직접 만나 본 후 제거 여부를 결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비 세력의 단서를 알아낸 후 생각이 바뀌었다.

악불군을 통해 신비 세력의 실체를 알리고 정파와 그들 간에 싸움을 유도하기로 한 것이다.

* * *

담수련을 태운 마차가 강서성을 넘자, 말을 탄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급히 말에서 내리더니 반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강서성 도창분타 분타주 진송채! 방주님을 뵙습니다.”

진송채는 백인막의 특급 살수로 십이 호로 불리던 자였다.

“일어나게.”

악불군이 명이 떨어지자 모두는 몸을 일으켰다.

진송채는 마차를 몰고 있는 흑석영을 보자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했다. 백인막 시절 흑석영의 심복이었던 그였다.

“자, 출발하고 분타주는 가면서 보고를 해라.”

“예.”

진송채는 악불군의 옆으로 말을 몰고 왔다. 그리고 그의 옆을 따르며 그동안 알아낸 상황에 대해 보고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보고에는 특별한 점은 없었다.

“문 군사가 천신문 총단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자는 있는데, 이후로 행적이 묘연하다?”

“문 군사께서 나갔다는 방향은 물론 그 반대편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목격자는 없었나?”

“시간이 야심한 터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도 취객들이라, 기억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관제묘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알 수가 없겠군?”

“죄송합니다.”

“분타주가 죄송할 일은 아니지.”

악불군은 생각 외로 문창현의 피살한 범인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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