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92화>
292화. 범인(1)
남창의 송문산 중턱에 있는 작은 동굴 앞에서, 두 명의 중년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형패, 천호무적검의 무공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 같지 않냐?”
“나도 그렇게 느꼈다. 또 보이면 죽인다고 했는데, 감시가 간단치 않을 것 같다. 우선 전에 연락해서 상황을 말해야겠어.”
둘은 악불군이 들이닥쳤던 주루에 있던 자들이었다.
혈마전의 악뇌사심의 명으로 악불군을 감시하기 위해 쫓아다니던 군웅 틈에 슬쩍 섞여 든 것이 오히려 실수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거기다 악불군의 무공 수위는 그들이 나오기 전 들었던 것과 너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형패라 불린 중년인은 작은 쪽지를 꺼내 뭔가를 세밀하게 적더니 동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작은 통을 꺼냈다.
숨겨 놓은 전서구가 담긴 통이었다.
전서구의 다리에 달린 통에 쪽지를 집어넣은 그는 서쪽을 향해 전서구를 날렸다.
“우선, 멀리서 따라…….”
말하던 형패의 눈이 커졌다.
풀숲 사이에서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한 청년.
주루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악불군이었다.
둘은 급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방주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저희들은 지금 남창을 떠나려던 참입니다.”
“두 분은 저와 볼일이 좀 더 있습니다.”
“보, 볼일이요?”
형패는 뭔가 몸을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혈교에 대해 좀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둘의 표정이 확 변했다.
“혀, 혈교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혈교에서 나온 분이 혈교를 모른다면 누가 알겠습니까? 그럼 혈교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나오셨습니까?”
“저희는 그냥 강호를 떠도는 낭인에 불과합니다. 악 방주님의 높으신 명성을 듣고 얼굴이라도 한번 뵙고 싶어 왔지만, 더 이상 보이지 말라는 말씀에 실수한 것을 깨닫고 이제 다른 곳으로 가려던 중이었습니다.”
“요즘은 낭인들도 전서구를 날리나 봅니다. 전서라는 것이 한 마리에 금자 열 냥에 가까울 정도로 비싼데 말입니다?”
전서구에 사용하는 새는 귀소 본능이 발달한 비둘기와 머리가 영리한 매 등을 사용했다. 하지만 어떤 장소에서 날려도 목적지를 찾아갈 정도의 전서구를 훈련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서 그 가격이 엄청 비쌌다.
“아까 그건 전서구가 아니라, 우연히 잡은 새를 불쌍해서 날려 준 것입니다.”
“자꾸 숨기시려고만 하지 말고 잘 생각하십시오. 전 그저 혈교에서 왜 자꾸 저를 건드리는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계속 모르쇠를 견지하신다면 저로서는 두 분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공을 보아하니 살아만 나시면 훗날 큰 부귀영화를 누리실 수도 있을 텐데, 여기서 허망하게 죽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악불군은 이미 그들을 혈교도로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존댓말을 붙이며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계속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죽일 것이 분명했다.
둘은 서로를 한 번 보더니 그대로 발을 박차며 서로의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최소한 한 명은 살겠다는 몸부림이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는군.”
고개를 저은 악불군의 천륭검이 공중으로 날았다. 두 개로 나뉜 천륭검이 그대로 날아가 둘의 등을 그대로 관통하고는 악불군의 손으로 돌아왔다.
검은 이미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악불군은 바다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천륭검이 쌍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검이 분리되었는지는 미처 알아내지 못했다.
그가 수련에 들어간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결국, 검에 양팔에 담긴 내공을 분리해 사용한다면 검도 분리된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양팔이 따로 노는 것으로써 일종의 양의심공이나 무당의 양심신공과 같은 종류였다.
양손에 검을 쥐고 각기 다른 초식을 구사한다면 그 위력이 배가될 것은 자명했다. 악불군은 구문황조차 천륭검이 쌍검이라는 것을 알아내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저들을 살려서 고문이라도 해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방주호법 중 한 명인 최욱걸이 아쉽다는 듯이 물었다.
“고문은 인간에게 가하는 가장 치욕적인 수법이지요. 전 고문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그들이 남긴 상자를 보며 말했다.
“저 안에 전서구가 한 마리 더 들어 있습니다. 가지고 가서 잘 보살피세요.”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하늘을 보았다.
이미 형패가 날린 전서구를 적설이 쫓고 있었다. 전서구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적설의 추격을 뿌리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최소한 분타 정도는 찾아낼 거야. 적설 너만 믿는다.’
생각을 정리한 악불군은 그제야 급한 표정으로 몸을 날렸다. 담수련만을 놔두고 밖으로 나와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낸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 * *
“사조님, 정말 죽겠습니다. 좀 쉬었다 가지요.”
청년 거지는 잠시도 쉬지 않고 경신법을 사용해 달리고 있는 사해신개를 향해 숨넘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개방을 대표하는 태상호법답게 사해신개도 사람들이 보기만 하면 피할 정도로 지저분했다. 그런데 그에게 사조라고 부르는 청년은 정말 지저분의 극치를 보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상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그는 사해신개의 사손으로 소걸아로 불렸다.
“젊은 놈이 다 늙은 나보다 더 빌빌대면 되냐, 안 되냐?”
사해신개는 가까이 있는 큰 나무의 그늘 아래로 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사조님께서는 무림 백대고수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시지만, 저는 백대고수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당연히 비교가 안 되지요.”
“네놈이 수련할 때마다 농땡이 친다는 것을 개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 열심히 수련했으면 이렇게 빌빌댈 리가 없지 않느냐?”
“사조님, 소손이 다 아는 무공만 가르치는데 재미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농땡이만 친다는 사해신개의 말과는 달리 소걸아는 개방에서 아주 특별한 수련을 받아 온 최고의 기대주였다.
그는 특출한 무재를 지닌 제자들도 최소한 오 년은 수련해야 통과할 수 있다는 관문을 겨우 일 년 만에 통과하면서 개방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개방의 모든 무공을 이십도 안 되어 다 익히고 영웅회에서 들어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무단의 중간 간부가 되었고, 어찰단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여럿 세우면서 다른 문파의 어른들에게도 이름을 각인시켰다.
특히 타고난 친화력으로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모두 친구로 삼을 정도로 인맥도 탄탄히 만들어 놓았다.
“내가 그랬지? 너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사조님, 거지가 부족하지 않으면 왜 거지를 하겠습니까?”
소걸아의 말에 사해신개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이없지만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입만 살아 가지고!”
“거지가 입이 살아 있지 못하면 굶는다고 가르침을 주신 분이 사조님이셨습니다.”
사해신개는 주먹으로 머리를 한 대 때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십니까? 지금 쉰 지 반각도 안 되었습니다!”
“지금 개봉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그런데도 내가 직접 이렇게 움직일 정도면 얼마나 급한 일인지 알 거 아니냐?”
“도대체 어딜 가시는데요?”
“강서성의 남창에 간다.”
소걸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남창이면 지금 속도로 아직도 이틀은 더 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창은 왜 가시는데요?”
“거기에 천호무적검이 있다.”
계속 장난조로 대답하던 소걸아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중해졌다.
“그럼 지금 천호무적검을 만나러 가는 겁니까?”
“그렇다.”
“아! 그럼 좀 빨리 말해 주시지. 가지요.”
“천호무적검이라니 좀 흥미가 가냐?”
“제가 만나고 싶었던 친구 중 하나거든요.”
“왜?”
“소문대로 정말 대단한 친구인지 알고 싶었거든요.”
사해신개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비슷한 나이에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하니까 한번 겨뤄 보고 싶은 호승심이라도 생긴 모양이구나?”
“제가요? 거지가 무슨 호승심을 가집니까?”
사해신개의 검미가 좁아졌다.
“그럼 왜 만나고 싶은데?”
“정말 대단하면 빨리 친구가 되려고요. 무림 십왕까지 봉해진 친구니까, 친해지면 만날 때마다 맛있는 걸 얻어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따금 돈도 좀 얻으면 좋고요.”
“에라! 이 거지 자식아! 사손이라는 것이 저렇게 야망이 없으니 쯧! 쯧!”
“사조님, 거지의 야망은 절대 굶지 않을 좋은 구역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냥을 잘 주는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그런 구역 확보의 일환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말하는 소걸아를 보며 사해신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기나 하자.”
* * *
“아무 일 없었지?”
악불군이 담수련의 거처에 도착하자 흑석영을 비롯한 호법들이 그를 맞았다.
“예.”
담수련의 거처의 주위에는 여러 가지 크기의 대나무들이 꽂혀 있었다. 방주 호법들만으로도 부족하다 느낀 악불군이 진까지 주위에 펼치고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다녀왔습니다.”
“들어와.”
악불군이 들어오자 담수련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함빡 폈다.
사화가 나가자 담수련은 악불군 앞까지 폴짝 뛰어가더니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 소군이 나가자마자 보고 싶은 거야. 그러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보고 싶어지잖아. 그래서 좀 자세히 보려고.”
그녀의 말에 악불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제가 나간 지 한 시진도 채 안 됐습니다.”
“그럼 소군은 나 안 보고 싶었어?”
악불군의 표정이 변했다. 담수련의 입술 나오기 신공이 펼쳐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무지 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들어가는 입술을 보며 악불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일 처리는 다 됐고?”
“아마도 더 이상 쫓아다니는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담수련은 약간 혼란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유모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
“어차피 만나러 갈 예정이었는데 먼저 연락이 왔으면 더 좋은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유모가 이 일에 연관이 있다면 연락을 안 했을 것 같아.”
“전 종리 단주님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연관이 있다 해도 모른 척 연락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본성을 수십 년 동안 감출 수는 없어. 내가 아는 유모의 성격상 문 군사님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모른 척 먼저 연락하진 못할 거야.”
“종리 단주님이 범인과 연관이 없다면 더욱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좋은 일이지. 하지만 정황이 일관되게 한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상황일까?”
악불군은 담수련의 머리를 믿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생각이 틀렸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께서는 종리 단주님께서 문 군사님을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직접 죽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럼 어떤 면에서 그렇게 일관된다고 생각하시는 건지요?”
“문 군사님께서 유모에게 급히 만나자고 했어. 누 장로는 연락이 없었다고 하지만, 난 문 장로님께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도 연락은 받았다고 생각해. 다만 누 장로를 비롯해 모두 믿을 수 없기에 비밀로 했을 확률이 높아.”
“그럼, 문 군사님께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했겠군요?”
“응. 그리고 문 군사님의 짐작이 예상보다 아주 정확했던 거지. 이렇게 어설프게 제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군요.”
“문 군사님께서 자신의 속마음을 토로하고, 한적한 관제묘로 밤중에 오라고 불렀음에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유모밖에 없었어. 그런데 유모가 우리를 배신한다는 것도 정말 믿어지지 않거든.”
“무상 진인의 말씀 중에 자신이 간세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간세 짓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되려면 간세가 정말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가능해.”
둘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던 둘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그렇다면…….”
“그래, 그 사람밖에 없어.”
둘의 머리에 동시에 떠오른 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