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93화>
293화. 범인(2)
전각에 도착한 제갈우명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정돈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선 그의 앞에 두 명의 노인이 나타났다. 한 명은 검을, 또 한 명은 도를 등에 메고 있었다.
철검삭도(鐵劍削刀)로 불리는 두 노인은, 만약 둘이 합공하면 무황도 이길 것이란 소문이 돌 정도의 강력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둘은 항상 같은 명호로 불리고 있었다.
“맹주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제갈우명이 공손히 포권을 하며 말하자 철검삭도는 말없이 길을 비켜 주었다.
전각은 천제무황의 뜻에 따라 중앙에 큰 정원을 만들고 그 주위를 따라 전각이 만들어진 형태였다.
얼마간 걷던 제갈우명은 열려 있는 문을 보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이쪽으로 오게.”
안으로 들어간 제갈우명은 중후한 목소리를 듣자 그쪽으로 향했다.
“제갈우명, 맹주님을 뵙습니다.”
손에 소도(小刀)를 들고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커다란 덩치의 노인을 보자, 제갈우명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천제무황이었다.
정파의 최고 어른이자 최고수, 영웅회를 이끌며 결국 원나라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 노영웅이기도 했다.
“제갈 군사.”
“예.”
“요즘 어려움이 많지?”
천제무황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갈우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가 자신을 불러 이런 질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 최고 간부 회의에서 결정이 난 사안은 대부분 제갈우명에게 넘겨졌고, 그 이후 모든 절차와 실행은 제갈우명의 책임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무림맹 최고 실세는 제갈우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천제무황의 신임이 두텁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신임을 잃는 즉시 제갈우명은 허울뿐인 군사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영웅대회의 개최 날짜가 공표된 후 각 문파에서 무공이 높은 제자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를 보내 수적으로는 보충시켜 주고 있지만, 전력의 약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차피 영웅대회는 각 파의 최고수들이 나갈 텐데 굳이 그러는 이유가 뭐라고 보나?”
“최고수들이 영웅대회를 위해 속속 폐관에 들어가고 있다 합니다.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각 문파의 최고수들이 폐관에 들어간다는 것은, 영웅대회 전까지는 정파 전체의 전력이 약화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겠군?”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원장이 머리를 아주 잘 썼어…….”
이제 황제가 된 주원장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들리고 있었다.
“황상은 마도나 사파보다는 정파를 더 우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정책 방향은 무림에 우호적이지는 않습니다.”
“무림 십왕에 봉해지는 것이 무림 전체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줄 것 같으냐?”
“마도에서 더 많은 십왕이 봉해진다면 정파의 사기가 저하될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구천마성이나 혈해사계에서 정파의 출전 무사들에게 암살을 시도할 확률은 어느 정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확률이 아니라, 그들은 반드시 시도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대비책은 마련했겠지?”
“만들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상황이 유동적인 면이 많아서 결정은 좀 미루고 있습니다.”
천제무황은 가지 하나를 소도로 잘라 내더니 몸을 돌려, 옆에 놓인 바위에 걸터앉았다.
“자네도 아무 바위나 앉게.”
“감사합니다.”
제갈우명이 자리에 앉자 천제무황은 손에 든 자른 가지를 그에게 던져 주었다.
“그 가지를 보면 벌레 먹은 데도 없고 아주 건강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두면 나무 전체가 잘 자라지를 못해. 그래서 아깝지만 이렇게 수시로 가지를 잘라주어야만 나무가 건강하게 자란다네.”
“저도 집무실에 꽃나무 몇 그루를 키우고 있는데, 가지치기를 안 해 주면 꽃이 잘 피지 않습니다.”
“그럼 자네도 가지치기를 해 주는 모양이군?”
“예, 저도 수시로 해 주고 있습니다.”
“저기 꽃밭 보이지?”
“예, 보입니다. 정말 탐스럽게 잘 핀 것 같습니다.”
“저 꽃밭도 며칠만 손보지 않으면 금방 잡초들이 옆에서 자란다네. 잡초 중에는 제법 예쁜 꽃을 피우는 야생화도 있지만, 그게 예쁘다고 그냥 두면 정작 내가 키우는 꽃들이 시들어 버린다네. 그래서 안타깝지만 모두 뽑아 버릴 수밖에 없지.”
제갈우명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식물 얘기가 아님을 느낀 것이었다.
“…….”
제갈우명이 답이 없자. 천제무황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군사.”
“예.”
“자연은 무림과 비슷해서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할 수 있네. 하지만 사람들이 끼어들어 필요한 것만을 골라 키울 수 있지. 약육강식에서 관리를 하는 단계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네. 난 무림 역시 관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네.”
“무림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피를 볼 수 있습니다.”
“피는 건강한 무림을 만들기 위한 거름이 될 수도 있지. 지금 부역자는 물론 마도와 사파 역시 제거하지 않는다면 백 년 전의 혼란이 다시 올 수 있다네. 더욱이 음지에 숨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세력까지 있지 않나?”
“혈교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제갈우명의 반문에 천제무황은 답 없이 다른 말을 물었다.
“요즘 천호방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하던데, 어느 정도라고 보나?”
“절강성과 강서 북부에만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미 방도 수가 천 명이 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방도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하니 지금은 천오백 명을 상회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수만 가지고 전력을 평가할 수는 없는 법, 전체적인 전력은 어떤가?”
“방도들을 낭인 위주로 급조했기 때문에 전력은 많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다만 근래 생각지도 않은 고수들이 천호방에 많이 입방했습니다. 아무래도 악 방주가 맹주님을 비롯한 무황들과 같이 무림 십왕에 봉해진 것이 큰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럼 세력 확장을 꾀할 수도 있겠군?”
“얼마 전 받은 정보에 따르면, 천호방과 구천마성간에 밀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밀약?”
“서로 자신들의 세력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한 것 같습니다.”
“정파를 표방하면서 마도의 종주인 구천마성과 그런 밀약을 했다면 지탄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닌가?”
“말 그대로 밀약인지라 양쪽이 부정하면 지탄하기도 어렵습니다.”
“군사 생각에 천호방이 정파라는 나무를 위해 쳐 내야 할 가지로 보이나, 아니면 같이 자라도 될 가지로 보이나?”
여러 대화를 나누었지만, 결국 천제무황이 그를 부른 이유가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위함이었다.
“…….”
제갈우명은 즉답을 못 하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내 질문이 만진선생이라 불리는 군사가 즉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었더냐?”
“맹주님, 이미 상하거나 누가 보아도 보기 흉하게 뻗은 가지는 쉽게 없앨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따금은 자르는 것이 좋을지 그냥 두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가지들도 있습니다. 제게 고민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자르는 것을 고민할 경우는 언제인가?”
“가지를 자름으로써 나무 자체가 큰 타격을 입을 때입니다.”
“알았다. 시간은 얼마나 주면 되겠는가?”
“영웅 대회가 일 년이 남았습니다. 여섯 달은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단, 가지가 그 안에 너무 벗어나게 뻗으면 고민도 필요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
“예.”
공손히 인사를 한 제갈우명이 정원을 나가자, 천제무황의 옆에 현기수사가 나타났다.
“주군, 그냥 결정하도록 하지 그러셨습니까?”
“제갈우명은 잘못된 판단을 한 적이 없다. 또한 자신의 사적인 감정보다는 냉철하게 무엇이 정파에게 이익인지를 따지지. 그의 의견을 함부로 무시하는 것은 좋지 않다.”
“부역자 소탕을 시작한 이후 공자님의 위명이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천무공자라는 엄청난 명호를 붙이고 무림의 영웅이라고 모두 칭송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천호무적검의 명성보다는 낮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그, 그것은 아, 아닙니다.”
“주원장이 왜 악불군을 그렇게 우대하는지 아느냐?”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면 선택받지도 못했겠지.”
“종산은자의 보고에 따르면 악불군과 잠룡세가 간에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종산은자는 지금까지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온 적이 없습니다.”
“진격아.”
현기수사는 천제무황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벌레 먹은 가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를 수 있다. 그런데 벌레 먹은 흔적이 안 보이는데 벌레 먹었다고 자르면 사람들은 누구를 이상하게 볼 것 같으냐? 네 주장을 이어 가려면 벌레 먹은 흔적을 찾아내서 오너라.”
현기수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예, 반드시 찾아서 오겠습니다.”
현기수사가 사라지자 천제무황은 미묘한 미소를 머금더니 다시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 * *
“누가 왔다고?”
누진봉은 유징의 보고에 깜짝 놀라 반문했다.
“개방의 사해신개입니다.”
“그 늙은이가 여긴 왜 온 거야?”
“방주님을 뵙겠다고 합니다.”
“지금 안 계신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
“언제쯤 오냐고 물어서 삼 일 안에는 올 거라고 했더니, 그럼 기다리겠다고 했답니다.”
“이거 큰일이군! 누군가 가서 접대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우리들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그냥 모른 척 접대하면 안 될까요?”
“사해신개가 어떤 자냐?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고 소문 난 자다. 잘못해서 우리의 정체를 알면 큰일 난다.”
“천호방 분타주에게 우리 대신 접대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어차피 사해신개도 문주님보다는 방주님을 만나러 왔다고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다행히 분타주 진송채가 악불군을 보필하기 위해 천신문에 와 있었다.
* * *
“사부님,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현판에 천신문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천신문이니까 천신문이라고 적혀 있지.”
“천호방주를 만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악 방주가 여기에 와 있으니까 여기로 온 거다. 넌 정문에서 말하는 거 안 들었냐?”
“진짜 예쁜 낭자들이 제 앞을 지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사조가 대화하는 소리도 듣지 않았다는 거냐?”
“듣긴 들었지요. 하지만 제가 필요 없는 말은 그냥 새어 나가는 체질이지 않습니까?”
“왜 자꾸 밖을 봐! 넌 개방의 태상호법의 사손이다. 체신 좀 지켜라.”
말하는 와중에도 소걸아는 계속 문틈으로 밖을 살피고 있었다.
“아까 봤던 낭자들이 혹시 보이나 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걸 대답이라고 하냐?”
“왜 자꾸 밖을 보냐고 물으시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야지요. 저 같이 착한 사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건장하던 신룡이가 볼 때마다 살이 빠지기에 왜 그런가 했더니, 이유가 바로 너구나?”
신룡신개는 사해신개의 제자이자 소걸아의 사부였다.
“사부님과 제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요? 저랑 사부님은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듣기로 매일 싸우다시피 했다던데?”
“사부님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네 사부가 직접 한 말인데 뭘 잘못 알고 자시고 할 게 있냐?”
“사조님, 그것보다 누가 옵니다.”
소걸아는 재빨리 문가로 가더니 다시 틈으로 밖을 살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사해신개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백대고수 중 상위에 있어 십대고수 중 한 명이라는 말까지 듣는 그와 거의 동시에 누가 오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저놈의 내공이 나랑 맞먹을 리가 없는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해신개 옆으로 밖을 살피던 소걸아가 급히 오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문이 열리며 진송채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공손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천호방 도창 분타주 진송채라고 합니다. 사해신개 선배님께서 직접 오시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악 방주를 만나려고 왔는데 삼 일 후에 온다고?”
“삼 일 후가 아니라 삼 일 안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오늘이나 내일 올 수도 있겠구먼?”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누가 죽었다고 하던데?”
“천신문 사람이 죽은 사건이라, 저는 자세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쨌든 악 방주와 무슨 연관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겠나?”
“그런 것 같긴 합니다만, 제 지위가 낮아서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사해신개는 진송채에게 뭔가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럼 어디 갔는지는 아는가?”
* * *
악불군과 담수련이 도착한 곳은 호남과 강서의 경계에 있는 안민산 속에 있는 작은 장원이었다.
그는 은밀히 오기 위해 사화와 호법들까지 두고서 담수련을 안고 직접 달려온 터였다.
둘이 앉아 있는 방 안으로 두 명의 시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두 분께서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종리 어르신께서는 곧 도착하실 것입니다.”
사실 말로 달려도 하루는 걸릴 거리를 악불군은 담수련을 업은 상태로 반나절 만에 왔으니, 그의 내공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싸움을 할 때 사용하는 보법은 수법에 따라 그 효용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오로지 빨리 달리는 경신술은 수법보다는 내공의 높고 낮음이 더 중요했다.
“오시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은 안 했어.”
어떤 상황이건 예측을 하고 무엇을 할지를 결정한 후에 실행하는 그녀가 아직 결정을 못 했다는 사실은, 이번 사건이 그녀를 얼마나 힘들게 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그때 악불군은 눈이 살짝 커졌다.
“아가씨, 종리 단주님께서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