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94화>
294화. 드러나는(1)
악불군의 감지 능력은 점점 발전하고 있었다. 지금도 무려 오십 장 밖에서 종리화를 느낀 상태였다.
물론 기를 감지하는 것은 백 장 밖에서도 가능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상대가 살기를 품거나, 혹은 가만히 감지에 온 힘을 다할 때처럼 특수한 경우일 뿐, 평상시에 감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한데 기를 올리지도 않았고 빠르게 걷고 있는 상태임에도, 무려 오십 장 밖에서 상대가 누구인지까지 감지하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담수련은 심호흡을 하며 우선 마음을 안정시켰다. 뭔가를 알아내려면 평상시와 똑같이 대해야 했다. 그녀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면 종리화는 금방 눈치를 챌 것이었다.
“천화궁주도 같이 오고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담수련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들이 의심하게 된 사람이 바로 천화궁주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 종리화와 천화궁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유모!”
“아가씨!”
종리화와 담수련은 반갑다는 듯이 서로를 껴안았다.
“유모, 그동안 힘든 일이 있으셨어요? 많이 수척해지신 것 같아요?”
담수련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묻자 종리화는 미소를 지으며 받았다.
“고생을 했다면 아가씨께서 더 하셨지요. 저야 편안하게 방에서 쉬기만 했는데요.”
말을 마친 종리화는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종리 단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악불군이 포권을 하자 종리화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악 방주의 활약에 대해서는 잘 듣고 있었다. 가주님께서 계셨다면 많이 자랑스러워했을 게다.”
칭찬에 감사하다는 듯 살짝 목례한 악불군은 천화궁주를 보며 다시 포권을 했다.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호호호! 무림 십왕께서 먼저 인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저는 아주 잘 있었어요. 자, 우선 자리에 앉지요.”
천화궁주의 말에 모두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종리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창에 오신 이유가 문 군사의 죽음 때문인가요?”
“예, 그런데 유모는 문 군사의 죽음에 대해 모르셨어요?”
“천화궁 소속의 기루에 화재가 났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보냈더니, 그제야 문 군사님께서 피살을 당해 아가씨와 악 방주께서 남창에 내려오셨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천화궁주가 대신 설명하자 담수련이 다시 물었다.
“그럼 안 지 며칠 안 됐네요?”
“이틀 전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만나 뵙자고 연락을 드린 거고요.”
담수련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물었다.
“문 군사님께서 누 장로에게, 유모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달라고 하셨답니다.”
“그랬습니까? 그게 언제지요?”
“대략 한 달 전쯤 되는 것으로 알아요.”
종리화는 의아한 눈으로 천화궁주를 보며 물었다.
“령매는 그런 연락을 받은 적이 있어?”
“없어요. 누 장로가 우리에게 연락 신호를 보내면 송화루의 아이들이 받아서 저에게 곧장 연락하는데, 이상하네요?”
“누 장로님께서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계속 연락이 없었고요. 천신문의 연락은 송화루에서만 받나요?”
“남창은 송화루가 분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유모나 천화궁주께서 송화루와 연락한 적은 없었나요?”
“열흘에 한 번 꼴로 남창에서 일어난 일들을 저희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 군사께서 언니를 만나려 했다는 보고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송화루에 화재가 난 것은 어떻게 아셨나요?”
“다른 기루에도 천화궁도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연락한 것이지요.”
“혹시 송화루에 있던 천화궁도 중 살아난 사람은 있었나요?”
“그 문제로 언니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무공도 아는 애들이 화재 따위로 모두 죽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거든요.”
“모두 죽었다는 말이군요?”
“안타깝게도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의 표정은 모두 굳어져 있었다. 정황이 간단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송화루의 궁도들이 배신했을까요?”
“본 궁에 궁도들은 어렸을 적에 받아들여 철저한 교육을 받은 후에 기루에 배치됩니다. 아이들이 배신했다고는 믿기 힘듭니다.”
“하지만 지금 정황은 송화루의 궁도들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일어나기 어렵지 않을까요?”
“누 장로께서 정말 연락을 했는지는 알아보셨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것은 알아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할 예정이에요.”
“정황상 아가씨께서 저희 아이들을 의심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문 군사님을 죽일 동기가 없어요.”
“그럼 송화루에 의문의 화재가 나고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죽는 상황은 어떻게 보시나요?”
“지금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추측을 말해 볼게요. 문 군사님의 죽음에 송화루는 분명 연관이 있습니다. 물론 문 군사님을 직접 죽였다는 말은 아니에요. 아마 저와 소군이 남창에 오지 않았다면 송화루는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가 직접 왔고, 결국 흉수는 송화루가 그대로 있다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살인멸구를 한 것이지요.”
“아가씨, 문 군사님께서 피살을 당하신 것은 저도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 아이들을 의심하신다면 전 너무 마음이 아플 겁니다. 저희 천화궁은 비록 언니와의 인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잠룡세가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습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던 천화궁주가 매우 서운하다는 듯 말하자, 담수련도 심히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문 군사님을 죽인 자를 찾아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듣고 있던 종리화가 끼어들었다.
“사실 저는 문 군사를 천신문의 책임자로 보냈다는 보고를 듣고 의아했습니다. 물론 저도 문 군사와는 매우 친하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죽여도 모자란 자를 아가씨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이 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문 군사님께서 아버지를 배신한 것은 맞아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를 피신할 수 있게 해 주셨어요.”
“그 말을 믿으십니까?”
“전 믿어요. 그리고 문 군사님은 당시 상황에서 의아한 점을 발견하셨어요. 그것을 조사하다 변을 당하신 거지요.”
“아가씨께서는 문 군사가 조사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충은 알고 있어요. 다행히 문 군사님께서 단서를 남겨 두셨더라고요. 사실 저도 아버지께서 너무 허무하게 당해서 의아했어요. 유모도 아시다시피, 아버지는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준비를 철저히 하시는 분이에요.”
“저도 그게 의아하긴 했습니다. 분명 제게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고 하셨거든요.”
“유모는 그 방법에 대해 들으셨나요?”
“들었습니다.”
“그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신 적이 있나요?”
“그것은 가주님과 저만 아는 비밀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리가 있겠습니까?”
담수련은 좀 더 꼬치꼬치 들어갈 수 있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문 군사께서 알아내신 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듣고 있던 천화궁주가 슬쩍 묻자 담수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세한 말은 범인을 잡아낸 후에 말씀드릴게요.”
“범인을 아신다는 말입니까?”
“대충 윤곽은 잡혀 가요. 아마 늦어도 열흘 안에는 문 군사님께서 누구에게 왜 당하셨는지 알아낼 겁니다.”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의아해했다. 그가 아는 한, 그녀는 아직 알아낸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계속 대화는 이어졌지만, 오기 전 강하게 추궁할 것 같았던 것과는 달리 담수련은 자신의 속내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났을까…….
“유모, 저와 단둘이 대화를 좀 할 수 있겠어요?”
“당연히 할 수 있지요!”
종리화가 흔쾌히 승낙하자 천화궁주는 서운한 표정을 지며 말했다.
“아가씨, 아까는 저희 아이들 의심을 하더니 지금은 언니와 단둘이서만 대화를 하려고 하시다니……. 솔직히 저 좀 섭섭한 마음이 드네요.”
“죄송해요. 특별한 얘기라기보다는 아버지의 개인적인 일을 좀 물어보려고 해요. 소군도 잠시 자리 좀 비켜 줘.”
개인적인 일인 데다 절대로 떼어 놓지 않는 악불군까지 비켜 달라는 말에, 천화궁주로서는 더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절대 불가라고 할 악불군이었지만 이번은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악불군이 일어서자 천화궁주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둘이 나가자 담수련은 정색을 하며 종리화를 쳐다보았다.
“유모.”
“말씀하십시오.”
“문 군사님께서 남겨 놓으신 쪽지가 있었습니다.”
“단서라는 것이 그 쪽지입니까?”
“예.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의문점을 아주 잘 정리해 놓으셨더라고요.”
“문 군사는 어떤 일이건 자신의 생각을 적어 두는 버릇이 있었지요. 저도 그런 쪽지를 본 적이 있지만 솔직히 무엇을 적었는지 모르겠던데요?”
“그때, 그때 생각난 것을 요점만 적어 놓았고 이따금은 비문까지 사용해서, 해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요. 유모에게 죄송한 말이지만 사실은 유모를 약간 의심했었어요.”
“아가씨께서 의심을 하셨다면 이유가 있겠지요.”
종리화는 전혀 서운하지 않다는 듯 말했다.
“문 군사님께서는 아버지의 계획을 아는 사람이 배신했다고 확신하셨어요. 아마 문 군사님도 유모를 의심하지 않았나 싶어요. 어쩌면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확신했을 수도 있고요.”
문창현이 종리화를 만나려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그가 죽은 이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추는 가능했다. 의심했다면 만나서 떠보려는 심사였거나, 믿기 때문에 배신자에 대해 의논을 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담수련은 판단했다.
“가주님의 계획을 아는 사람은 제가 아는 한 저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계획에 대해서 제게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가주님께서는 대공이 약속한 날에 공격할 것으로 믿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약속한 날보다 삼 일 전에 잠룡세가를 피신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피신을 도울 수하들까지 다 준비를 해 놓으셨지요. 거기에는 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해졌습니다. 가주님과의 연락이 갑자기 두절되었어요.”
“연락은 어떻게 하셨나요?”
“가주님과 저를 잇는 전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 오가던 전서구가 어느 날부터인가 돌아오지를 않더군요. 다행히 천화궁 항주분타와 연락이 가능해서, 그녀들을 통해 연락을 했습니다. 물론 전서구를 사용할 때보다 소통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천화궁을 이용할 때 어떤 방식을 사용하셨나요? 전언인가요, 아니면 서찰인가요?”
“서찰이었습니다.”
“서찰을 나르던 사람이 내용을 볼 수 있었겠네요?”
“가주님과 저의 서찰은 철저히 가주님과 저만 아는 비문을 사용했습니다. 누가 보았다 해도 내용을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까 아버지의 계획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천화궁주님께도 말하지 않으셨나요?”
“아가씨, 예서령은 저와 삼십 년 의자매입니다. 잠룡세가의 비밀스러운 임무도 많이 해 주었지만 어디로 새어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유모, 제가 묻는 것은 천화궁주님께 계획을 말해 주었느냐 아니냐입니다.”
“……령매는 알고 있었습니다.”
* * *
악불군이 종리화와 담수련이 대화를 나누는 방문 앞에 서자, 천화궁주는 잠시 쉬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됐어?]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꼬리를 완전히 잘라 냈으니 아무리 악불군이라도 우리 짓이라는 것을 알아내지는 못할 거야.]
[확실해?]
[내가 실수하는 것 봤어?]
[천후께서 지금 이 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신다. 문창현을 일찌감치 제거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
[그랬다면 금령군주가 잠룡세가를 완벽하게 장악했겠지. 천후께서 그것을 바랐을까?]
[악불군이 잠룡세가를 장악할 때라도 없앴어야 했어.]
[문창현을 담수련이 당연히 제거할 줄 알았지. 자기 아버지를 배신한 자를 살려 주고, 심지어 천신문의 책임자로 보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둘의 대화는 놀랍게도 담수련의 추측대로 천화궁주가 간세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