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295화 (295/472)

<천검지애 295화>

295화. 드러나는(2)

천화궁주의 항변에, 전음을 보낸 자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 못 했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종리화를 뒷바라지하며 구축한 정보망을 너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순식간에 잃게 되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거냐?]

[그 뒷바라지를 한 사람이 바로 나다. 정보망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너보다 내가 더 크다는 것을 모르냐?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네 할 일이나 해라.]

[그렇게 큰소리칠 때가 아닐 텐데? 지금 담수련과 종리화가 무슨 대화를 할지, 짐작이나 하고 있는 거냐?]

천화궁주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그녀 역시 지금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의 개인적인 문제로 대화를 한다고 했다.]

[넌 그걸 진짜로 믿는 거냐?]

[나를 의심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지금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어 봐야 하니, 그만 가라.]

[담수련과 악불군이 눈치채지 못했기만을 바래라. 만약 둘이 알게 되면 너뿐만이 아니라 나까지 곤란해진다는 것을 명심하고.]

천화궁주는 전음을 보내던 자가 사라진 것을 느끼고는 주먹을 꽉 쥐며 뭐라고 욕을 하더니 벽을 향해 갔다.

그리고 한 곳을 열고는 귀를 갖다 댔다. 담수련과 종리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방과 연결된 관으로, 방에서의 대화 소리가 그 관을 통해 들리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찌나 작게 대화를 나누는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문 앞에 눈을 감은 채 서 있던 악불군의 눈이 떠졌다.

겉으로는 담수련을 호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천화궁주의 움직임을 세세히 감시하고 있었다.

보지도 않고 기만을 감지하여 행동을 파악하는 것은 보통 고수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의 악불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천화궁주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악불군은 천화궁주가 방으로 들어간 후 밖에 숨어 있는 누군가와 전음을 주고받고 있음을 느꼈다.

큰 내공이 필요치 않은 전음이지만, 내공을 사용하기는 해야 했다.

악불군은 그 기를 감지한 것이다.

물론 거리가 있어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천화궁의 안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자와 전음을 주고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악불군의 얼굴이 구겨지자, 문에서 일 장쯤 떨어진 곳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 중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혹시 시중 들 일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천화궁주가 남긴 세 명의 시녀였다.

하나 말이 시중이지, 악불군이 느끼기에는 감시하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천화궁주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대화를 들을 수 없는데 굳이 방에 계속 있는 것은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죄송해요. 생리적인 볼일인지라 악 방주님만 두고 잠시 다녀왔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께서 꽤 오래 대화를 나누네요? 갑자기 가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아가씨께서는 가주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십니다. 아마 가주님께서 어디로 피신하셨을까를 의논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 문제라면 저나 악 방주께서도 같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일인데…….”

천화궁주가 다시 서운하다는 듯 말을 흐리자,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달래려는 듯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가주님께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을 경우를 생각해 그러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과(過)를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효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악 방주께서는 그렇게 아가씨에게 충성을 하는 데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으신가 봐요?”

“서운해하면 이미 충성이 아니지요.”

천화궁주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물었다.

“솔직히 악 방주께서는 너무 특별하세요.”

“제가요?”

“악 방주께서는 이미 명성이 무황에 버금가고 심지어 무림 십왕에까지 봉해졌어요. 거기다 천호방은 어떤 문파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는데 여전히 아가씨께 호위 무사 취급을 받는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니까 말이에요. 전 정말 악 방주의 그런 충성심에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랍니다.”

칭찬을 하는 것 같지만 충성이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서, 큰 명성을 지니고 수하 취급을 받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어 악불군이 담수련에 대해 불만을 갖도록 유도하는 이간질이었다.

“전 궁주님이 더 경탄스럽습니다.”

“제가요?”

“예, 제가 듣기로 종리 단주님께서 궁주님께 도움을 줬다고 들었습니다. 저야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충성을 하는 것이지만, 궁주님은 작은 도움을 받은 것만으로 사십 년 넘게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잠룡세가를 도왔으니 그게 더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은근한 반격에 천화궁주는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작은 도움은 아니었답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담수련과 종리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힘들게 여기서 기다리셨어요? 안에 들어가서 편히 계시지.”

담수련은 천화궁주가 서 있는 것을 보자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대화는 잘하셨어요?”

“예, 하지만 소득은 없네요. 저희는 이만 갈게요.”

“벌써요?”

“유모나 궁주님도 아시는 것이 거의 없으니, 우선 송화루의 화재에서부터 단서를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단서는 사라지는 법이니 빨리 가서 정밀 조사를 다시 해 보려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궁주님, 우리의 연락 방법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바꾸시기를 원하십니까?”

“지금까지는 우리가 만나고 싶다는 표식을 한 후 연락을 받는 방식이었잖아요?”

“혹시를 위한 안전 장치였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그것은 잠봉밀과 잠룡밀이 숨어 지낼 때를 위한 방식이었어요. 이제 잠봉밀과 잠룡밀이 천신문으로 합쳤고 천호방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으니,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든다면 이번 같은 일을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언니와 의논해서 빠르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유모와 궁주님이 없었다면 전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담수련이 정말 고맙다는 듯 말하자 천화궁주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자신을 불안하게 하던 상황이 지나갔다고 판단한 것이다.

악불군과 담수련이 떠나고 방으로 들어간 천화궁주는, 종리화의 표정이 밝지 않자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가 물었다.

“아가씨께서 모든 의구심을 풀고 돌아가셨는데, 언니는 표정이 왜 그러세요?”

“아가씨께서 가주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신 것 같다고 하시네.”

“그런 생각을 하실 수는 있지만, 가주님 성격상 살아 계시다면 지금까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있으실까요? 하다못해 언니한테는 연락을 했어야 맞을 것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아가씨는 다르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어떻게요?”

“거기까지는 자세히 얘기를 안 해 주시더라고. 문 군사의 죽음도 가주님의 행방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하시는 눈치야.”

순간 천화궁주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살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담수련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초점이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종리화가 그녀의 미소를 보고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 * *

장원을 나온 후, 악불군의 등에 업힌 담수련은 악불군의 목을 꼭 껴안았다.

“아가씨, 반나절은 달려야 하는데 너무 꼭 안으시면 힘드십니다.”

“이렇게 빨리 달릴 때, 꼭 껴안지 않으면 불안하단 말이야!”

담수련이 오히려 더 꼭 안으며 말하자 악불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과 논의할 때 보면 감탄스러울 정도로 냉정함을 유지하며 칼날 같은 예리함을 보이는 그녀가, 그와 단둘만 남으면 순식간에 아이처럼 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그런데 소군.”

“예.”

“천화궁주가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살펴보았어?”

“나온 후에 잠시 자신의 방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누군가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누군지는 알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는 기억해 놓았으니, 다음에 만난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기를 기억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경이로울 정도의 기억력을 가진 악불군은 그게 가능했다.

“나가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가서 누군가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소군도 의심스럽지 않아?”

“많이 의심스럽지요. 하지만 그 정도로 간세라고 확신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유모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가씨께서 지금 말해 주실 거 아니십니까?”

“어머! 어떻게 알았어?”

그녀의 반문에 악불군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나타났다. 그를 수시로 미소 짓게 만드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언제나 말해 주시니까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물어봐. 그래야 말해 주는 나도 신나지.”

“알겠습니다. 종리 단주님과는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음~ 유모는 간세 아니야. 하지만 간세나 마찬가지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어.”

“종리 단주님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겠다는 말은 아니야. 무상 진인의 말을 듣고 사실 그런 조직이 존재하는 게 가능할까 의아했는데, 이제 그분 말이 진짜라고 확신하게 됐어.”

천화궁주와 종리화는 수십 년을 맺어 온 의자매였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황상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종리화를 속여 온 것으로 보였다.

더욱이 천화궁은 기녀들의 조직으로 도문처럼 하오문의 방계 조직이었다.

하오문 자체가 완벽한 조직을 갖춘 문파가 아니라 협력 세력이 모인 연합체 형식이기는 하지만, 같은 하오문 간의 정보를 얻기에는 수월했다.

그 말은 고철황이 도문으로부터 얻은 정보가 하오문을 통해 천화궁에도 알려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천호방도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상 진인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이 이해가 돼.”

“그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유모와 아버지에 대해 얘기했다고 했을 때, 천화궁주의 표정이 오히려 편해졌어. 그 말은 천화궁주가 아버지의 실종과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겠지?”

“문 군사님께서 조사를 시작한 이유가 가주님 때문이라면, 천화궁주가 연관이 없다면 좀 이상한 거 아닐까요?”

“내 생각은 아버지의 실종은 천화궁주가 유모에게 얻은 정보 때문이야. 하지만 천화궁주는 아버지의 실종에 대해서는 몰라. 그 말은 이들이 완벽한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일 거야.”

“그럼 지금 천화궁주를 잡아 봐야 배후를 잡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래서 지금은 모른 척할 거야.”

“배후를 찾아내실 생각이시군요.”

“지금 적설은 어디에 있지?”

“혈교가 보낸 전서구를 추격하게 했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남창에 돌아와 있을 겁니다.”

“며칠 후 천화궁주를 남창으로 부를 거야.”

“올까요?”

“의심받지 않으려면 올 거야. 그때 적설에게 천화궁주를 감시하도록 해. 분명 그녀의 동선을 추적하면 배후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요?”

“아직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배후를 찾아내면 그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겠지.”

“보타검각도 연관이 있을까요?”

이어지는 악불군의 질문에 담수련은 잠시 답하지 못했다. 보타검각은 그녀에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 왜 보타검각이 검의 성지로 알려졌는지, 또 정파로 분류가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타검각은 정보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정보가 더 축적되면 분명 단서가 나올 거야.”

“그럼 정보를 더 모을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어. 바로 소군이야.”

“저요?”

“응. 그들을 찾는다 해도, 그들보다 우리가 약하다면 당하는 것은 우리가 될 거야. 소군은 그들을 상대할 자신 있지?”

악불군은 어깨에 슬쩍 힘을 주며 말했다.

“근래 제가 좀 강해지긴 한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큰 소리에 담수련은 그의 목을 더욱 세게 안으며 말했다.

“난 정말 소군이 있어서 너무 좋아.”

그녀의 칭찬은 악불군에게 가장 큰 힘이었다. 거기다 꼭 껴안아주기까지 하니 힘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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