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96화>
296화. 만남(1)
검은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완전 백발에, 목소리는 분명 노인의 목소리였지만 얼굴은 신기할 정도로 앳돼 보이는 노부인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노부인의 옆에는 시녀로 보이는 여인 둘이 그녀의 발을 주무르고 있었고, 또 다른 둘이 뒤에 서서 커다란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이냐?”
그녀의 앞에는 가면을 쓴 두 인영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원장이 마 황후에 대한 사랑이 대단합니다. 다른 여인에게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 봐야 남자 놈이다. 절세미녀가 유혹하면 넘어간다.”
“유혹할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마 황후가 예쁜 얼굴이 아니지 않느냐?”
“전장을 같이 누비며 쌓은 정이 상당히 큰 듯합니다.”
“이민족인 원나라 황실까지 장악했던 우리다. 명나라가 세워진 지 벌써 몇 달이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것을 천후가 알면 나를 얼마나 비웃겠느냐?”
노한 표정의 노부인이 몸을 일으켜 반듯이 앉자 가면인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태후님, 마 황후를 회유하는 것은 어떻까 싶습니다.”
“……마 황후를 회유해?”
“주원장이 마 황후를 그렇게 아끼고, 지금 황자들이 대부분 마 황후의 소생이니, 아예 마 황후를 회유한다면 황실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할 수 있겠느냐?”
“저희의 목적을 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으로 회유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가 발각될 위험이 있어서 안 된다.”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마 황후를 시중드는 궁녀 집단에 우리 애들을 집어넣어 조금씩 세뇌시키려 합니다. 물론 주원장에 대한 작업도 계속 병행할 생각입니다.”
“시도하는 것은 나쁠 것이 없지만, 절대로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그럼 허락하마. 단 영웅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성공시켜야 한다.”
“존명!”
태후라 불린 노부인의 입에서 천후란 단어가 나왔으니 같은 편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놀랍게도 무림만이 아니라 황궁까지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담수련의 예상대로 엄청난 규모를 지닌 조직이 분명했다.
* * *
“벌써, 오셨습니까?”
악불군이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던 흑석영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직까지 안 주무셨습니까?”
악불군은 담수련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미 사방은 새까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주군께서 이쪽으로 오실 것을 제가 알고 있는데, 어찌 잘 수가 있겠습니까?”
흑석영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주군으로 부르고 있었다. 방주와 주군이 어차피 악불군이었고 똑같이 높이는 말이니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었지만, 깊이 들어가면 다른 의미가 있었다.
방주는 천호방에 충성하는 것이고, 주군은 악불군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이었다.
만약 천제무황이 무림맹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쓰려고 한다면 제갈우명은 분명 반대의 편에 설 것이었다.
하지만 흑석영은 악불군이 천호방을 위험하게 하는 정책을 펼친다 해도 무조건 악불군의 뜻을 따를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큰 차이였다.
“그럼 제가 올 때까지 안 주무시고 기다리실 생각이셨습니까?”
“저는 눈을 뜨고 서서도 잘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쪽잠은 잤습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십시오.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몸을 그렇게 혹사하시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말하는 악불군을 담수련이 갑자기 쳐다보았다. 악불군이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툭하면 쪽잠을 자며 밤을 새우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러지 말라고 하면 악불군 역시 흑석영과 비슷한 답을 했는데, 그게 안 좋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
악불군은 그녀가 보자 즉각 그녀의 생각을 간파하고는 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래, 별일은 없었지요?”
“사해신개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해신개 어르신이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 알아보셨습니까?”
“그냥 주군을 만나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최대한 예우는 하셨겠지요?”
“예,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천신문 사람들이 맞이하는 것은 좀 안 좋은데……?”
담수련이 불안한 듯 중얼거리자 흑석영은 걱정 말라는 듯 답했다.
“도창 분타주 진송채가 나서고, 천신문 간부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건 잘했네요. 지금 어디 계신지는 아시나요?”
“귀빈청에 계십니다.”
“아직 총단에 계시다는 건가요?”
“예.”
담수련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예상도에는 사해신개가 개방의 부흥을 위해 가장 바쁠 때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사해신개 어르신께 방주님께서 오셨다고 연락하세요. 지금 찾아뵐 수 있냐고요.”
“아가씨, 지금 한밤중입니다?”
“사해신개 어르신이 정말 바쁜 와중에 오신 걸 거예요.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는 것이 그분에게 더 좋아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알겠다는 듯 흑석영에게 눈짓을 했다.
* * *
“사조님.”
“왜?”
“주무세요?”
“잠이 오겠냐?”
“왜 잠이 안 오세요?”
“그럼 너는 왜 안 자고 귀찮게 해?”
“사조님께서 왜 저를 여기로 데리고 왔는지가 궁금해서 잠이 안 옵니다.”
“사조가 사손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지, 왜 궁금해?”
“솔직히 제가 말 잘 듣는 사손은 아니잖아요?”
“너도 알고는 있었냐?”
“저는 말 잘 듣는다고 언제나 자부하지요. 하지만 사조님께서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으시니까 좀 괴리가 있긴 합니다만, 어쨌든 계속 말씀을 안 해 주시니까 이상하잖습니까? 거기다 바닥에 머리만 대면 주무시던 분이 계속 잠을 못 드시고 뒤척이시니까 그것도 좀 수상하고요.”
“뭐 수상?”
“괜히 말꼬리 잡고 그러지 마시고요.”
“말꼬리~?”
“전 이만 자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소걸아는 더 대화를 하다가는 또 혼이나 날 것 같자 급히 태세 전환을 하며 몸을 돌렸다.
“이놈이 사조가 말하는데 어딜 감히 몸을 돌려! 나 봐.”
“사조님, 갑자기 졸음이 와서 그런 건데요?
“거짓말 치지 말고! 내가 왜 잠을 못 자고 있냐고 물었지?”
“예!”
소걸아는 다시 몸을 돌렸다.
“예전 개방이 남개방과 북개방으로 갈라진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넌 아느냐?”
“당시 어르신들 사이에서 원나라에 숙이고 그들에게 협조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저항하느냐로 크게 의견이 갈라져 결국 방이 쪼개진 걸로 들었습니다.”
“그래,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지. 하지만 그것은 명목상 이유였다. 사실은 원나라가 침공하기 전부터 개방에는 이미 큰 문제가 있었다.”
“그랬습니까?”
“당시, 사부가 너보다 어렸다. 내겐 사부님과 사숙 몇 분이 계셨는데 모두 사이가 참 좋으셨다. 내가 사숙님들에게 무공을 배운 적도 상당히 많을 정도였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숙들 사이가 벌어진 거야. 사부님께서 대사형이셨기 때문에 불러다 혼도 내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얼굴을 보는 것조차 거부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거의 원수 수준으로 사이가 틀어져서는 사사건건 서로를 반대하기만 하는 거다.”
“왜요?”
“나도 모르지. 당시는 전 무림이 미친 것 같았다. 개방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문파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마도와 사파까지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키니, 태양천이 무림을 쳐들어왔을 때 힘 한 번 못 쓰고 유린을 당해 버리고 말았다.”
“다른 문파들까지 그런 상황이었다면 뭔가 수상한데요?”
소걸아가 흥미를 느낀 듯 집중해서 듣다가는 이상함을 느낀 듯 말하자, 사해신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남개방과 북개방으로 갈릴 때도 사실 의견이 다른 정도였기 때문에, 안에서 어른들끼리 의논하면 방이 둘로 갈라지는 불상사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미 방도들 사이의 반목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갈라지게 된 거였다.”
“태사조님께 태사숙님들이 왜 그렇게 됐는지 물어보시지 그러셨어요?”
“물어봤지. 그런데 침통한 표정만 지으실 뿐, 답을 안 해 주셨어. 그러다 사부님께서 태양천에게 죽임을 당하시는 바람에, 진짜 이유를 더 이상 알 방법이 없어졌다.”
“어차피 옛날 일이고, 이제 다시 개방이 하나가 됐는데 뭘 그렇게 고심하세요?”
“그게 옛날 일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또다시 개방 내에 서로 미워하는 제자들이 생기고 있어.”
걱정이 전혀 없을 것 같던 소걸아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짝 굳어졌다.
“개방에 방도가 몇만인데요? 당연히 서로 싫어하는 방도들이 있을 수 있지요.”
사실 그도 느끼는 것이 있었지만, 우선은 긍정적으로 답했다.
“방도들 사이에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칠결 이상의 상층부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면 문제가 커진다. 사조는 예전 무림이 미쳤던 때의 상황이 다시 나타날까 두렵구나.”
소걸아는 사해신개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것에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사조님 말씀대로라면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사부님도 아니고 저를 데려오신 이유를 모르겠네요?”
“네 사부는 내가 없는 동안 방주님을 보필해야 하지 않느냐?”
“그래도 제겐 거의 임무를 안 주셨잖아요?”
장난이나 치고 약간 골통 기질을 보이기는 하지만 영웅회의 무력 집단의 조장까지 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고 공도 꽤 세운 그에게, 사해신개는 어떤 임무도 맡기지 않았다.
“네게 임무를 주면 천강대장급을 줘야 하는데 그럼 계속 외유를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총단 내의 지위를 맡기에는 네 배분이 아직 낮다.”
“전 외유 좋아하는데요?”
“그래서 안 맡긴 거야. 어떻게든 내 옆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 같아서.”
“와아! 사조님은 정말 귀신이시네요? 임무만 맡겨 주면 당장 사조님 곁을 떠나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콩!
“이놈은 잠자리에서까지 매를 벌어!”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맞은 소걸아는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사조님은 모르시겠지만 맞는 저는 많이 아픕니다.”
“아프라고 때렸는데 안 아프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이 사조가 믿을 수 있는 놈이 너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 슬프다.”
“제가 원래 믿음직하잖아요.”
“에그! 네가 악 방주의 반만 닮았어도 내가 정말 마음 놓고 네게 의논할 텐데, 쯧! 쯧!”
“벌써 무림 십왕이 된 악 방주의 반이라도 제가 닮았다면 왜 개방에서 거지 짓을 하겠습니까?”
소걸아의 말에 사해신개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그때, 사해신개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초에 불을 붙였다.
“왜 일어나세요?”
소걸아는 의아한 듯 묻다가는 뭔가 느낀 듯 급히 몸을 일으켰다.
“너도 느꼈냐?”
“예.”
“네가 느낄 수 있는 무공이 아닌데?”
“기로는 모르지만 냄새로는 압니다.”
“냄새?”
“제 코가 완전 개 코거든요. 누구도 제 코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소걸아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사해신개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자신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내공이 늘었나 하고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냄새라니…….
“사해신개 노선배님!”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사해신개의 얼굴에는 상당히 놀라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가 감지하기는 했지만 흑석영의 무공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전 천호방의 방주 호법인 흑석영이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악불군이 벌써 저런 고수를 수하로 두었어? 그런데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의아한 표정을 지은 사해신개는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냐?”
“방주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사해신개 노선배님께서 오셨다고 했더니, 지금 오셔도 되는지 알아 오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아직 안 주무시는 것 같아서 무례를 무릅쓰고 불렀습니다.”
“악 방주가 왔다고?”
“예!”
“당장 만날 수 있다고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흑석영이 사라지자 소걸아는 기대하는 눈으로 물었다.
“사조님, 악 방주 만나면 친구해도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