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97화>
297화. 만남(2)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악 방주와 친구하겠다고?”
“나이도 비슷하다고 하셨잖아요?”
“이놈아, 친구라는 게 수준이 맞아야 하는 거야! 너하고 악 방주하고는 급이 달라.”
“에이! 거지한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거지가 좋은 게 만인이 평등한 거다.’ 전 사조님께서 그 말을 하셨을 때 평생을 간직할 명언이라 생각하고, 사조님의 뜻대로 살기로 맹세까지 했습니다. 수준이고 급이고 전 거지니까 예외라는 말이지요.”
“이놈아, 내가 말한 것은 거지끼리 평등하다는 거지, 아무하고나 평등하다는 것이 아니야!”
“그런 거 전 모르고요. 존경하는 사조님의 뜻을 받들 생각이니까 나쁜 사손 되라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악 방주 온 거 같아서 내가 지금은 그냥 넘어간다마는, 골통 짓하지 마라.”
사해신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누군가 오는 것을 감지하고는 눈을 한 번 부라리고는 방문을 열었다.
“어서 오게.”
악불군은 사해신개가 문을 열자 놀란 표정으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왜 직접 문을 여십니까? 제가 열고 들어가도 되는데요?”
“이제 무림 십왕에 일방의 방주인데 당연히 노부가 맞아야지.”
“이러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악불군이 명성이 자신을 능가할 정도로 높아졌음에도 조금도 교만함이 없이 자신을 공손하게 대하자 사해신개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잘 지내셨습니까?”
그러자 담수련이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를 했다.
“천상신녀도 잘 있었느냐?”
“그냥 담 군사라고 불러 주십시오.”
“담 군사? 그게 이름은 아닐 테고?”
“지금 제가 천호방의 군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성이 담씨였구나?”
담씨 성이 왕씨나 장씨처럼 흔하지는 않아도 희귀 성은 아니었기에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사해신개는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 듯 반문했다.
“예.”
“난 네가 천신문의 문주라고 들었는데, 아니었느냐?”
“천신문의 문주이기도 합니다.”
“한 문파의 문주가 다른 방의 군사를 맡는 것은 노부는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조님께서 나이가 많으셔서 그런 겁니다. 저희같이 젊은 사람들은 그런 선입견 없이 다 이해합니다.”
불쑥 끼어드는 소걸아를 보자 담수련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사해신개 어르신께서 사손과 함께 오셨다고 들었는데, 그분이신가 봅니다.”
“이놈이 버릇없이 어른이 말하는 데 끼어들고! 빨리 인사부터 드려라.”
“전 개방의 무적신개라고 합니다.”
소걸아는 진중한 표정을 지며 점잖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어머! 방주님의 명호가 천호무적검인데 무적신개라니 인연이 있나 보네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담수련의 말에 소걸아는 자신도 그렇게 느낀다는 듯 답했다. 하지만 사해신개가 끼어들었다.
“네 명호가 언제부터 무적신개가 된 거냐?”
“사조님도 참! 사손의 명호도 모르시면 어떡합니까?”
“내 사손이니까 묻는 거다. 언제부터 무적신개냐?”
소걸아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시간이 중요하겠습니까? 무적신개라는 것이 중요하지요.”
“맞습니다. 무적신개 대협께 인사드립니다. 천호방 방주인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무적신개 대협은 좀 기니까 이제부터는 소걸아라고 불러 주십시오.”
“개방 최고의 후기지수라고 소문난 소걸아 대협이시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대협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는 그냥 호형호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놈아! 악 방주하고 너하고 수준이 다르다고 했지? 어디서 은근슬쩍 호형호제 얘기를 꺼내!”
“아닙니다. 소 형 말대로 나이도 비슷한데 호형호제해도 괜찮습니다.”
“봐요! 악 형이 괜찮다는데 왜 사조님께서 난리세요?”
“이놈 말버릇 봐라? 감히 사조에게 난리?”
둘의 말다툼을 보던 악불군과 담수련은 서로를 보더니 피식! 미소를 지었다. 말다툼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둘 사이의 돈독한 정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르신, 소 형 말대로 제가 괜찮으니 그만하십시오.”
“그럴까?”
악불군이 말리자 사해신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슬쩍 대답했다. 사실 악불군이 어려워서 그랬지, 소걸아와 악불군이 호형호제를 한다면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반색할 일이었다.
무림 십왕이자 젊은 무인 중 최고의 명성을 지닌 악불군과 개방의 후기지수인 소걸아가 친구의 우정을 가지게 된다면 개방에게 전혀 손해일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방을 따로 안 줬습니까? 거기다 침상도 사용을 안 하시고?”
자리에 앉은 악불군은 침상 밑에 깔려 있는 이불을 보자 의아한 듯 물었다.
“우리는 몸이 너무 더러워서, 방 두 개를 쓰면 청소하는 사람들만 힘들어지네. 침상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이불 하나를 같이 쓰면 이불만 빨면 되지 않겠나?”
“그래도 너무 작지요.”
“저 이불 넓이보다 작은 움막에서 열 명도 잘 수 있는 것이 우리 거지들의 특징이네. 그래, 어디를 갔다 온 건가?”
“천신문의 문도 한 분이 흉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보고는 들었네. 개방의 분타에서 발견했다던데?”
“예, 그렇지 않아도 개방에 감사를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보고서를 보다 보니 우연치고는 아주 절묘하긴 하더군.”
“개방의 분타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적어 보내 주셔서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르신의 신패를 함부로 사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용하라고 준 건데 그게 무슨 말인가? 다음에 또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용하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지금 개봉에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요즘 무림 상황이 영 이상해서, 자네와 나와 간에 긴밀한 연락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왔다네.”
“그럼 그냥 서찰을 주시지, 뭐하러 힘들게 직접 오셨습니까?”
“그게, 바로 나의 비극이라네. 무상진인을 만나서 얘기 들었다고?”
순간, 악불군과 담수련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사해신개가 온 이유가 신비 조직 때문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예, 듣기는 들었는데 솔직히 믿기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안 믿나?”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담수련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믿습니다.”
이번에는 사해신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이렇게 빨리 믿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믿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했지요. 그리고 어르신께서 믿는다면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부를 그렇게 믿어 주다니, 감동할 지경이구만.”
사해신개의 말은 진정이었다.
무림인들은 같은 정파라 해도 다른 세력일 경우 여간해서는 믿지를 않았다.
“처음 본 제게 태상호법패까지 넘겨줄 정도로 저를 믿어 주셨는데, 제가 어찌 그런 믿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직접 온 이유를 말해 주겠네. 사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믿을 사람이 없었어.”
“예?”
“이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자까지 믿지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자들이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비밀을 넘겨주는 자들까지 있으니, 누굴 믿고 자네에게 서찰을 보내겠나? 그런데 이 아이만은 정말 믿을 만하기에 직접 데려온 것이라네.”
소걸아의 입이 귀에 걸렸다.
“사조님께서 저를 이렇게 믿으시는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저도 감동할 것 같은데요!”
“그자들이 아무리 꼬드겨도 넌 타고난 골통이라서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게다. 거기다 넌 네 물건은 죽어도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는 확고한 거지 근성이 있지 않느냐?”
“처음 말씀하신 거는 조금 마음에는 안 들지만, 확고한 거지 근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소걸아의 말을 들은 악불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단지 몇 마디 말을 들은 것뿐이지만 사해신개의 말대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악 방주.”
“예.”
“이놈이 예절 교육을 좀 못 받아서, 사람 화나게 하는 데 재주가 있다네. 그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게.”
“전 소 형이 진정성이 있는 진짜 대인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소 형의 기는 제가 확실하게 기억을 했으니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악 형이야말로 진짜 대협이신 것 같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남자에게 반해 보기는 정말 처음입니다.”
칭찬은 죽은 자도 일어나게 한다고 했던가…….
맨날 골통이라는 말만 듣던 소걸아는 진짜 대인이라는 말을 듣자 단번에 악불군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그럼 이제부터 자네와 나의 모든 연락은 이 아이가 맡아서 할 게야. 그 이외 나를 사칭한 어떤 연락도 우선 의심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급히 달려오신 것을 보니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신 것 아니십니까?”
“뭐라고 아직 확실하게 말해 줄 것은 없네. 다만 정파 안에서 좀 이상한 조짐이 보이고 있어. 난 원나라가 물러나자 그자들이 본격적으로 다시 수작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네.”
사해신개가 태양천과 어찰단 거기다 궁가방까지 엄청난 추적과 공격을 받았지만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높은 무공 덕분도 있지만 그의 탁월한 육감도 한몫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육감이 또다시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혹여 죽게 될 경우를 생각하여 소걸아와 악불군 간에 연결 고리를 만들어 개방과 인연을 계속 이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 * *
“진짜 바쁘셨나 봐. 소군과 얘기를 끝내자마자 떠나시네? 한잠도 못 주무셨는데…….”
담수련은 노구를 이끌고 다시 개봉으로 떠난 사해신개가 안쓰러운 듯 말했다.
악불군과 사해신개는 이후에도 신비 조직과 혈교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 덕에 담수련과 악불군은 그동안 자신들이 몰랐던 꽤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대화를 끝낸 것은 새벽이 되어서였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조금 눈이라도 붙이고 아침까지 먹고 가라고 권했지만, 사해신개는 개봉의 상황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그대로 떠난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분을 보면 정파란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적신개 소 대협 말이야.”
“예.”
“정말 순박한 것 같지 않아?”
“제가 봐도 그렇더군요. 자신이 거지라는 것에 그렇게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호호~ 정말 나도 놀랐어. 자신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즐기는 것 같더라. 그렇게 젊은 나이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참 드물 것 같은데.”
“드문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말하는 악불군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나타났다. 사해신개가 아침을 먹고 가라는 말을 거절하자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소걸아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해학적이기도 하고 나이에 비해 철이 없어 보일 정도로 아이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이상하게 밉지는 않더라. 다만 좀 씻고 다니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외부에 분명하게 믿을 사람이 한 명 생긴 것은 다행입니다.”
“소군이 누구를 이렇게 빨리 믿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아.”
“태어나서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만은 마음에 드네요. 그건 그렇고 빨리 가서 한잠 주무십시오. 밤을 새는 것은 아가씨께는 안 좋습니다.”
“이미 샜는데 뭘.”
“그래도 잠시라도…….”
“아니야. 사해신개 어르신께 몰랐던 말들을 많이 듣고 났더니 머리가 복잡해. 우선 헝클어진 정보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아가씨의 양 팔목을 좀 잡아도 되겠습니까?”
“내 손? 당연하지! 잡아~”
담수련은 오히려 더 좋아하며 자신이 먼저 악불군의 손을 잡았다.
“손이 아니고 팔목입니다.”
“난 팔목보다 손이 더 좋은데?”
악불군은 담수련이 자신의 말을 다르게 해석했다는 것을 느끼자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