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298화>
298화. 천무공자(1)
“아가씨, 잠을 안 주무시겠다고 하시니 피곤이라도 풀어 드리려고 기를 불어넣으려는 겁니다.”
“뭐?”
“기를 넣으면 몸이 약간이라도 편안해지니…….”
악불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수련은 급히 말했다.
“나도 알아. 팔목보다는 손으로 기를 넣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해서 말한 거야.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팔목이 낫긴 하겠다.”
악불군이 미소를 지며 팔목을 잡자 담수련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게 무슨 창피야! 소군이 나를 이상하게 보겠다, 씨!’
그녀는 악불군이 손을 잡아도 되느냐는 말을 야릇하게 들었던 것이다. 어떤 야릇이냐고 물으면 아마 그녀도 대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왜 팔목이 손으로 들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악불군과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가씨,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들어오는 기에 집중하십시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담수련은 악불군의 전음에 급히 답했다.
[집중하고 있거든!]
* * *
악불군이 담수련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을 시각.
[새벽부터 무슨 일이냐?]
천화궁주는 또다시 찾아온 가면인을 보고 짜증스러운 듯 물었다.
[천후께서 천호무적궁과 담수련이 왜 그냥 돌아갔는지를 알아오라고 하셨다.]
[담수련은 이번 일을 문창현이 담무룡에 대해 조사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사건의 초점부터 잘못 파악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알아낼 것이 있겠느냐? 아무 의심 없이 갔으니 천후께는 걱정 말라고 전해라.]
[정말, 담무룡에 대해 조사하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한단 말이냐?]
가면인은 놀란 듯 반문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천화궁주는 자신의 질문에 가면인이 아무 답도 하지 않자 눈이 살짝 커지며 다시 물었다.
[설마 네가 맡은 임무가 그것이었냐?]
초점이 빗나갔으니 자신들에 대한 조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담무룡의 실종이 그들과 연관이 있다면 여전히 담수련의 조사는 그들을 향할 터였다.
[네가 문창현에 대한 대처를 잘못한 것 때문에 대계에 문제가 생기면 결코 문책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다.]
가면인은 한마디 더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천화궁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년이 나를 밟고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지금 악불군의 존재는 자신의 조직에서 대단히 중요해져 있었다.
그리고 신생 문파인 천호방은 그들 조직에서 아직 침투를 못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악불군과 담수련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조직에서 그녀밖에 없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리화의 신임을 절대 잃으면 안 돼.’
지금 종리화는 그녀에게는 안전망이었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그러나 종리화가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쩝! 하긴, 피곤하시기도 하겠지.”
담수련의 손목을 잡고 담수련 몸 안의 탁한 기를 몰아내던 악불군은, 자신이 기를 넣는 것을 멈추자마자 담수련이 앞으로 쓰러지자 깜짝 놀랐다.
오음절맥이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오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문제는 그녀가 앞으로 엎어지며 악불군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잠들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손도 못 대고 곤혹스러워하던 그는 잠시 담수련이 깊은 잠에 빠지길 기다렸다.
비록 업힌 채였다고 하지만 며칠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신경을 쓰느라 피곤이 누적된 상태였다. 그 와중 사해신개와 대화하느라 밤까지 새웠으니 이러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렇게 잠시, 담수련의 숨소리가 잦아드는 걸 확인한 악불군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악불군은 옆에 앉아 잠자는 그녀의 모습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볼에 손을 대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빨리 더 이상 역용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하는데…… 얼마나 답답하실까?”
악불군은 그녀가 거리낌 없이 진면목을 보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한참을 담수련의 볼에 손을 댄 채 그녀가 자는 모습을 보고 있던 악불군은 갑자기 정신이 든 듯 흠칫 놀라며 손을 뗐다.
‘내가 무슨 짓이야? 휴우~ 아가씨의 명예까지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내가 오히려 떨어뜨릴 행동을 하다니. 악불군, 정신 차려라.’
악불군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창 쪽으로 다가가 뒷짐을 지고는 밖을 쳐다보며 마음을 안정시킬 때, 담수련이 살짝 눈을 떴다.
깜빡 잠들었지만 악불군이 이불을 덮어 줄 때 살짝 잠이 깼었다. 하나 곧 악불군의 손이 뼘에 닫자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가슴은 콩닥콩닥 뛰고 숨까지 막힐 정도였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
악불군의 손길이 너무 부드럽고 좋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의 눈길이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기에 더더욱 눈을 뜰 수 없었다.
‘바보!’
악불군의 뒷모습을 보며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 * *
천신문은 발칵 뒤집혔다.
“누 장로님, 어떡하지요?”
총관 서유근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왜 나타난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
“모르지요. 그냥 문주님을 잠깐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문주님은 지금 항주에 있다고 말하고 돌려보냈어야지!”
“당연히 그랬지요. 그랬더니 천신문의 높으신 분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요.”
누진봉은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간부들을 둘러보더니 곽부용에게 시선이 멈췄다.
“절 왜 보세요?”
“그래도 곽 화주가 강호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
“지금 그자 옆에 있는 그 도사가 누군지 아세요?”
“누군데?”
“무당파의 태극검자예요. 제 무공은 요사한 데가 있어서 무당의 도사들은 금방 알아챌 수가 있다고요.”
“곽 화부 무공이 요사하니까 오히려 우리의 정체를 숨기기가 좋지 않겠어?”
유징의 말에 곽부용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 남자들이 치사하게 뒤로 빠지고 여자인 나를 사지로 밀어 넣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지금 부역자들에게 염라대왕 같은 자가 천무공자야. 어쩌면 뭔가 냄새를 맡고 왔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고 여기서 도망치면 나 부역자요 하고 잡으러 오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우린 강호에서 임무를 여러 번 맡은 적이 있어서, 눈치채는 자가 있을 수 있다고.”
“이십 년도 전 일인데 누가 기억한다고……. 알았어요. 그럼 만나서 뭐라고 해요.”
“우선 우리 천신문은 상단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문파라는 것을 강조해. 혹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면 무조건 문주님 핑계를 대고.”
“제가 누구냐고 하면 뭐라고 해요?”
“천신문 화주라고만 해.”
“다른 문파에는 화주라는 직위가 없잖아요?”
“문주님께서 여인이라 특별히 만든 직위라고 해. 절대로 긴장하거나 떨지 마.”
“오라버니들이 지금 떨고 있구만!”
빽! 소리친 곽부용은 서유근을 보며 말했다.
“안내해!”
* * *
창밖을 보고 있는 백천학을 주시하는 태극검자의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지금 백천학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물론 이미 무림 십왕에 봉해진 악불군에게 밀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아직도 몇몇 무림인들은 오히려 백천학을 더욱 두려워할 정도였다.
무림맹은 부역자 척결을 일순위로 정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전면적인 토벌에는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 백천학은 한 개의 무력 집단을 이끌고 홀로 부역자들을 추적 제거하고 있었다.
이미 그에게 제거된 부역자 중 초절정급 고수들이 이십 명이 넘었고, 수하 백 명 이상을 거느린 문파도 여섯 개나 멸문했다.
특히 정파의 중견 무사들을 암살하던 태양천의 암살단을 전멸시킨 것은 천하가 칭송하는 대 전과였다.
다만 그가 운이 나쁜 것이 있다면, 그가 천하를 흔들 정도로 큰 전과를 이룰 때마다 더 큰 사건이 이어져 묻혀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큰 사건의 중심에는 항상 악불군이 있었다.
“공자님, 천신문 같은 작은 신생 문파에 오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태극검자는 결국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역자들을 제거해 나가던 백천학은 호남의 청양현에서 수상한 자들을 발견했다.
부역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은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의구심을 느낀 백천학은 그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호남을 지나 강서로 들어섰고 남창 부근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백천학이 갑자기 추적을 멈추고 천신문에 잠깐 들르자며 온 것이었다.
“천신문에서 누군가가 피살을 당해 천호무적검이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미 항주로 돌아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인연이 안 되어 만나지 못한 것은 그렇다 치고, 왜 천호방의 방주인 그가 천신문에 왔을까요?”
“천신문은 이미 천호방의 하부 조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건 추측일 뿐이지, 확인된 것은 아니지요.”
태극검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공자님, 노파심에 묻는 것이니 노여워하지는 마십시오.”
“말씀하십시오.”
“혹시 천상신녀 때문에 오신 것은 아니십니까?”
태극검자의 말에 즉답을 하지 않던 그가 몸을 돌렸다.
“제가 어르신께 부족한 모습을 보였습니까?”
“빈도가 남녀 간의 일은 지식이 얕아 공자님께서 어떤 마음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악양에서 천상신녀를 만난 후 공자님께 변화가 생긴 것은 확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변화를 느끼셨습니까?”
“빈도는 어려서부터 공자님을 곁에서 보아 왔습니다. 그때 빈도가 가장 놀란 것 중의 하나가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었습니다. 이 나이에도 빈도는 공자님의 부동심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상신녀를 만난 후, 공자님의 부동심이 흔들리는 것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백천학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다른 사람이 자신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천상신녀에 대해 생각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전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이곳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십니까?”
“어르신, 왜 그 문제를 이렇게 집요하게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빈도는 무황의 시대가 지나면 다음 무림의 절대자는 공자님이 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 피로 점철된 무림에 공자님께서 평온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아니십니까?”
“천상신녀의 정체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 의구심이 맞다면 공자님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태극검자는 무당을 대표하여 영웅회의 장로를 맡고 있었다. 그때 백천학을 처음 본 후 그는 백천학이 무림에 평화를 가져다 줄 구세주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전 무림을 아우를 절대자가 되기 위해서는 조금의 오점도 없는 완벽한 대협을 만들어야 했다.
“그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군가를 고자질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현기수사군요?”
“…….”
태극검자가 답이 없자 백천학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공과 사도 구별을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고 믿습니다.”
“어르신.”
“예.”
“전 사람이지 신선이 아닙니다. 어르신께서는 천무성궁의 사람들보다 저를 더 아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신선으로 보고 그러셨다면 실수하신 겁니다.”
백천학의 말에 태극검자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빈도는 공자님께서 신선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신선은 저 같은 도사들이 원하는 것이지요. 공자님께서는 절대자가 되셔야 합니다. 천하의 어떤 분란이라도 막을 수 있는 그런 절대자 말입니다.”
“누가 오고 있군요. 다음에 다시 대화를 하지요.”
백천학의 말에 태극검자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는 아직 누가 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은 백천학의 내공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의미였다.
그가 백천학이 천상신녀를 생각하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걱정하는 이유는 그녀에 대한 현기수사의 의구심도 있었지만, 백천학의 무공 증진에 해가 될 것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런데 그의 내공이 예상을 넘어 빠르게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공자님의 능력을 잘못 알고 있었던가?’
태극검자는 어떤 잡념도 없이 오로지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로서 여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인성으로, 그것이 오히려 무공을 높이는 데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곽부용이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