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02화>
302화. 변화하는 세력들(1)
“급보라니, 무엇이냐?”
구슬주렴(珠簾) 안에 있던 천후의 반문에, 주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가면인은 급히 머리를 바닥에 대며 용서를 빌었다.
“적동마수가 배신을 했습니다.”
“적동마수의 지위가 뭐지?”
“영주입니다.”
“영주라면 최소한 이십 년은 충성했다는 말인데, 갑자기 배신을 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냐?”
“아직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지금 추적 중이오니 곧 붙잡아 올 것입니다.”
“그런데, 영주 따위가 배신한 것을 지금 급보라고 나를 찾아온 것이냐?”
“그게…….”
가면인이 즉답을 못하자 천후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느냐?”
“그놈이 감히 천후님의 밀지를 훔쳤습니다.”
“내 밀지? 어떤 밀지냐?”
“태후에게 가는 밀지이옵니다.”
대답하던 가면인의 몸이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 벽에 강하게 부딪치며 떨어졌다. 가면 아래로 눈에 보일 정도로 피를 흘리는 것으로 보아 심한 각혈까지 한 것 같았다.
놀라운 것은, 손 한 번 움직이지 않고 기파만 발했을 뿐인데 대단한 고수인 가면인이 그대로 날아가며 내상까지 입었다는 점이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 그 밀지에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가면인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간신히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주렴 앞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죽여 주십시오.”
“태후에게 갈 밀지가 어떻게 적동마수에게 넘어갔는지 소상히 말해 봐라.”
“밀지를 운반하던 은운전 수하가 구천마성과 시비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 외의 고수가 있어 상처를 심하게 입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밀지를 전할 상황이 안 되어 도움을 요청하는 비문을 남겼는데, 적동마수가 그것을 본 모양입니다.”
“온전히 우연이란 말이냐?”
“예!”
“그 안의 내용은 거의 비문이라, 적동마수가 본다 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텐데?”
“저도 그게 좀 이상했습니다. 총단에서 충성도를 일급으로 판단해 한 달간 극락전에서 거한 대접까지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천후님의 밀지를 가지고 사라졌다는 사실이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당했을 가능성은 없느냐?”
“그는 무림 백대고수에 이름까지 올라가 있습니다. 쉽게 당할 놈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점도 염두에 두고 추적하고는 있습니다.”
“열흘 안에 밀지를 회수해라. 만약 그때까지 회수를 못한다면 목숨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존명!”
* * *
“소군.”
“예.”
“위지 대협, 믿을 만한 것 같아?”
“글쎄요? 솔직히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 정도 명성을 지닌 사람이 괜히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건 그래……. 하지만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이라면 얘기는 또 다르지.”
“아가씨께서는 위지 대협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도 일종의 고변이라면 고변인데, 고변의 경우 전부 거짓을 말하면 당장 들키게 되니까, 보통은 진실을 반 이상 섞어서 말하는 법이거든. 그런데 위지 대협은 최소한 칠 할은 진짜인 것 같아.”
“삼할은 거짓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우리를 처음 봤는데 거짓 하나 없이 전부 솔직히 말한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럼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요?”
“이제 알아봐야지. 전부 다 사실일 수도 있긴 하니까.”
“다른 것은 모르겠고 그 조직이라는 곳에 대한 것은 사실로 들렸습니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무상 진인께서 말해 주신 것과 상당히 많이 부합했거든. 문제는 열심히 중요한 것을 말하긴 했는데 핵심은 교묘하게 비껴 갔다는 사실이야.”
적동마수의 말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정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일 뿐, 이름도 총단도 심지어 그 구성원까지 말해 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한 달 시간을 줬으니 기다려 보지요.”
“그래야지 뭐. 그리고 위지 대협의 말이 사실이라면 본 방을 습격할 가능성도 있으니, 간부회의를 열어 대비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아.”
* * *
거대한 불상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대웅전.
십여 명의 노승들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공선사제, 장경각은 정리가 다 끝났느냐?”
소림사 장문인 공허대사가 장경각주인 공선대사에게 물었다.
“경전은 물론 무공 비급들까지 큰 소실 없이 다 정리했습니다.”
“아미타불! 내 대에 드디어 본산을 찾았으니 이 어찌 부처님의 덕이 아니겠느냐?”
“제자들도 이제 불승으로서 본연을 찾았는지 모두 얼굴들이 평온해졌습니다.”
대웅전주 공혜법승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소림사가 무림 세력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처님의 불법을 전하는 불승이니, 공혜 사제가 법승으로서 제자들에게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해 주어야 할 것이네.”
“아미타불!”
공혜법승이 반장을 하며 불호를 외자 공허대사는 흐뭇한 미소를 보인 뒤 금강전주인 공심대사에게 물었다.
“공심 사제, 영웅대회는 어찌할 생각인가?”
“불가의 제자로서 왕 칭호를 받자고 무림 대회도 아닌 영웅대회에 나가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로, 저희도 의논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났느냐?”
소림사는 큰 현안에 대해 장로급들이 의논하여 결정한 후 장문인에게 재가를 받는 것이 전통이었다. 물론 장문인이 불가하다고 하거나 수정을 바라면 또다시 의논을 거친다.
“참가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이유는?”
“참가하지 않는다면 황제가 내린 황명을 정면으로 거절했다는 인상을 풍길 수 있습니다. 지금이 어느 정도 황조의 기틀이 잡혀 있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첫 황제의 명을 거역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황상의 성정상 문제가 생길 우려가 큽니다.”
“아미타불!”
공허대사는 불호를 외며 염주를 굴렸다. 정치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소림사의 전통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가까스로 되찾은 소림사에 시작부터 악재를 만들 수는 없었다.
공허대사가 아무 말이 없자 공심대사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문제는 참가한다면 최소한 창피는 당하지 않아야 하는데, 참가할 정도의 무공을 지닌 분이 광천 사숙님밖에 없습니다.”
광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공허대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심 사제! 광천 사숙께서는 수십 년 동안 목숨을 걸고 본 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매진하셨네. 이제야 좀 쉬겠구나 하시며 은거에 들어간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또다시 큰 짐을 지우자는 말인가?”
개방에 사해신개가 있고 무당에 무상진인이 있다면 소림사에는 광천대사가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수백 번이 넘는 전투에 참가했고 백 번이 넘는 결투를 벌여 모두 승리를 한 소림사의 전설이 바로 그였다.
불승임에도 그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 자들은 가차 없이 징치했다. 덕분에 무림에서는 그를 탕마신승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무림의 왕을 뽑는 대회입니다. 잘나가는 후기지수를 보내 경험을 쌓거나 체면치레하는 평범한 비무 대회가 아닙니다. 광천 사숙이 나가지 않는다면 소림은 크게 창피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공심대사의 부언에 공허대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광천대사는 젊을 적부터 소림사에서는 최고의 기재로 기대를 모았다. 약관의 나이에 달마진경을 모두 익힌 제자는 장대한 소림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원나라가 공격하기 직전 장경각의 모든 서책들을 은밀한 곳에 숨긴 전대 소림 장문인은, 광천대사를 불러 소림의 뒤를 부탁하며 이백여 명의 젊은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게 했다.
수십 년 동안 어찰단과 태양천과의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제자들은 겨우 삼십여 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소림의 지휘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광천대사는 소림의 상징 같은 어른이었다.
“아미타불~ 우선 다른 문파에서 어떤 인물이 대회에 참가할 예정인지 알아보도록 해라. 만약 다른 문파에서도 사숙과 같은 배분의 인물이 참가할 예정이라면 그때 내가 말씀드려 보겠다. 우선은 사숙을 빼고 다른 사람이 나간다는 가정하에 수련을 시키도록 해라.”
“아미타불!”
공허대사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숙이며 불호를 외웠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나가 보거라.”
공허대사의 말에 모두는 일어나더니 공손히 반장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미타불…… 황상이 무림에 분란을 일으키고 있어. 이게 의도된 것인가, 아니면 정말 선의인가…….’
눈을 감고 염주를 돌리는 공허대사의 마음은 무거웠다.
* * *
천호방 회의실에 모인 간부들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담수련의 명의로 내려온 소집서에는 비상 대책 회의라고 적혀 있었다.
“고 장로님, 본 방에 비상 대책 회의를 할 정도의 사건이 있었습니까?”
추명혼의 질문에 고철황도 금시초문이라는 듯 답했다.
“제가 태상호법께 물으려고 했는데 먼저 물으시네요? 담 군사께서 이유 없이 이런 소집을 할 리가 없으니, 분명 뭔가 일이 벌어진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아는 것이 없습니까?”
고철황의 질문에 구여풍이 뭔가 생각이 난 듯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어제 손님이 있었습니다.”
“손님?”
“예, 적동마수라고 들은 적 있으십니까?”
“적동마수면 십 년 전에 나타나 순식간에 백대고수에 들어간 위지청이라는 자를 말하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어제 그가 배첩을 보냈는데 방주님께서 직접 만나셨습니다.”
“방주님과 아는 사이였나?”
“아닙니다. 방주님께서도 처음 듣는 눈치셨습니다. 적동마수가 대단한 정보를 가져온 듯 말했거든요.”
“대단한 정보? 그거구만.”
고철황은 이제야 비상 대책 회의를 연 이유를 알았다는 듯 말했다.
“구 총관.”
“예, 태상호법님.”
“적동마수는 갔나?”
“아닙니다. 지금 빈청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호특수단에게 철통같이 경계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천호특수단이라는 말에 모두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천호방은 지금 다섯 개의 무력 집단을 조직해 놓은 상태였다.
그중 네 개는 새로 받은 방도들 중 실력이 좋은 자들을 추명혼이 강하게 수련을 시킨 후 천호일대부터 사대까지 만들었고, 마지막 하나는 백인막의 살수들만으로 조직했다.
그것이 바로 천호특수단이었다.
현 천호방의 진짜 정예는 바로 그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개 손님을 보호하라고 천호특수단을 동원했다니, 정말 뜻밖이지 않습니까?”
고철황도 놀란 듯 추명혼을 보며 물었다.
“방주님 오십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대화를 나누던 모두는 급히 일어나 도열했다.
“벌써 오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선 악불군은 모두를 보며 물었다. 회의 시작 시간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었다.
“비상 대책 회의라는 단어에 놀라서 달려왔습니다.”
고철황의 말에 악불군은 담수련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그 단어는 빼자고 했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모른 척 모두에게 말했다.
“지금 본 방이 대단한 위험에 처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과 의논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는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끼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악불군은 모두를 주욱 훑어보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백인막 출신인 십 호와 고철황, 그리고 동정어옹을 비롯한 무림사기뿐이었다.
담수련과 의논하여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부른 것이다.
“적동마수 위지청 대협께서 어제 본 방을 찾아오셨다는 말은 구 총관에게 들으셨을 것으로 압니다.”
“예, 들었습니다.”
“위지 대협께서는 본 방에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모두의 눈이 커졌다.
“적동마수는 대단한 고수로 알려져 있는데, 누군가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까?”
“위협도 위협이지만, 무림맹 같이 본 방보다 더 큰 조직이 있는데 굳이 왜 여기로 와서 도움을 요청했을까요?”
“혹시 무림맹에 쫓기고 있는 것입니까?”
“무림맹에 쫓긴다면 정파를 표방하는 본 방에는 더 올 수가 없지요.”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나타나자 악불군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무림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중대한 얘기입니다. 본방 사람들 포함해서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시면 안 됩니다.”
긴장했던 모두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악불군이 빈말을 하는 성품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