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03화>
303화. 변화하는 세력들(2)
“절대 함구할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모두의 대답을 들은 악불군은, 우선 자신이 무상 진인에게 들은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을 듣는 모두의 표정엔 시간이 지날수록 경악이 서렸다.
“정말 그런 조직이 존재한다면, 어쩌면 혈교보다도 더 위협적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동정어옹은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저희도 백인막 시절 수상한 흐름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추명혼이 반박하듯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백인막 출신들도 모르는 이야기인 듯했다.
“태상호법께서는 아시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악불군의 말에 추명혼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전대 백인막주셨던 제 사부님께서 저를 불러, 반드시 비밀로 하라면서 절대 복수할 생각하지 말라는 말과 이상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월도 많이 흘렀고 사부님께서도 돌아가셨으니 말을 하겠습니다.”
백인막의 전대 막주인 비영살신은 이십 명의 수하 살수들을 이끌고 살행에 나갔다. 막주가 직접 살행에 나가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어서 추명혼은 대단히 의아했었다.
그렇게 열흘 만에 비영살신은 큰 상처를 입고 수하도 다 잃은 채 돌아왔다.
추명혼은 놀라 어떤 놈들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상처를 치료하지도 않고 당장 본거지를 옮겨야 한다며 남은 제자들을 이끌고 두 번째 본거지로 급히 떠났다.
그리고 무려 이 년 넘게 청부도 받지 않고 상처 치료에 전념했지만 결국 내상을 도져 죽고 말았다.
“비영살신이 백인막의 막주였습니까?”
월화옹이 놀란 듯 물었다. 비영살신은 당시 무림인들이 명호만 들어도 긴장할 정도로 유명한 살수였었다.
하지만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는데, 백인막주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비영살신은 전설적인 살수 중 하나였던 분인데, 갑자기 사라져서 이상하다 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려.”
역시 몹시 놀란 표정을 천수옹이 추명혼을 위로했다.
“원래 살수란 것이 오늘 같이 웃다가 저녁에 영원히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사부님께선 후사를 다 정하고 돌아가셨으니 오히려 만족해하셨습니다.”
“그래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들었나요?”
담수련이 궁금한 듯 끼어들자 추명혼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아시겠지만 당시는 금나라와 원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나 중원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송나라는 전쟁 준비보다는 정쟁에 몰두하고 있었고, 무림 역시 정파와 마도 할 것 없이 어디가 주적인지도 모를 정도로 아주 난장판이었지요. 당연히 저희 같은 살수 집단이 돈을 쓸어 담고 있었습니다.”
혼란의 시대에는 죽일 사람이 많아지는 법이었다. 당연히 백인막은 살인 청부로 살수들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막주께서 이십 명이나 끌고가 홀로 돌아왔으니 진짜 당황하셨겠군요?”
“당황 정도가 아니었지요. 애초에 사부님께서 그렇게 큰 상처를 입고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은 상대가 지금의 무황급의 절대 고수라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혈우대마종이 죽은 이후 무림에는 그런 절대 고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의 무황들이 당시 혈우대마종을 제거한 후 모든 무림인들에게 칭송을 받기는 했지만, 절대 고수로 불리기에는 젊은 나이였으니까요.”
“그럼, 누가 청부했고 누구를 죽이러 갔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청부인은 제가 얼굴을 봤습니다. 하지만 정체는 알 수 없었지요. 애초에 저희는 청부인의 정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으니까요. 청부한 자는 당시로는 정말 큰 액수인 금자 천 냥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부님께 최소한 이십 명의 살수와 같이 살행에 나서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이유는 상대가 너무 고수라는 것이었지요.”
“그런 고수인데도 누군지 몰랐다는 말입니까?”
“사부님께서 확인한 것은 여인이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여인이요? 당시 그런 여고수가 있었나요?”
담수련이 무림사기와 고철황 등을 보며 의견을 구했지만, 그들 역시 처음 듣는다는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사부님께서도 청부인이 너무 허풍을 친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거액을 받았으니 약속은 지킨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하들을 데리고 살행을 나가신 거였지요. 제게 말을 안 한 것도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말할 필요를 못 느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정보가 없다면 한 번 더 생각을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네요.”
“그 일을 반면교사 삼아, 저는 정보가 부족한 청부는 맡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름도 알려 주지 않은 그 여인을 어떻게 찾았나요?”
“청부인은 사부님께 한 장소를 알려 주면서, 그곳에 매복하고 있으면 그 여인이 지나갈 거라고 했답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몇 날 며칠에 어떤 장소에 가서 매복하고 있으면 죽이려는 자가 지나갈 것이니 그때 죽이라고 했다는 말인가요?”
“예, 그랬다고 하셨습니다.”
담수련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도 뭔가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수상하네요?”
“당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그 여인이 청부인이 말한 것과는 달리 그다지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두는 그들이 몰랐던 비사에 빠져든 듯 조용했다.
“그럼 여인의 수하는 몇 명이었다고 했나요?”
“혼자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함정이 아니었다는 말인가요?”
담수련은 자신의 예상이 틀리자 의아한 듯 반문했다. 비영살신 같은 초특급 살수가 죽을 정도의 큰 상처를 입고 이십 명이 넘는 수하들까지 모두 잃을 정도면 당연히 함정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함정이 아니라, 오히려 저희 살수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고 하셨습니다. 주위에는 몸을 은폐할 곳이 대단히 많았고, 여인은 완벽한 살행 준비가 끝나고 나서야 나타났다고 했으니까요.”
“전투 장면을 최대한 자세하게 묘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악불군의 질문에 추명혼은 탄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묘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사부님 말씀에 의하면 그냥 학살에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공격을 시작하자 그녀는 가볍게 팔을 흔들기 시작했는데, 권법이나 장법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어설펐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설퍼 보이는 수법에 수하 이십 명이 반각도 안 되어 다 죽었다고 했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삼 초 만에 가슴을 맞고는 그대로 도망을 치셨다고 했으니까요. 아마 내공이 약했다면 사부님도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을 겁니다.”
“무슨 무공인지는 모르시겠군요?”
“백인막에서는 무림에서 이름 난 무공에 대해 그 특징이나 위력에 대해 어느 정도는 숙지하고 있습니다. 살행을 나가서 당하거나 하면 그것을 전부 기록해 놓으니까요. 하지만 그 여인이 사용한 수법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본거지를 옮긴 것은 그 여인이 살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서겠군요?”
“예, 사부님의 예상대로, 우리가 떠난 후 본부에 남아 있던 수하들은 얼마 뒤 모두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동방 장로님.”
“예, 방주님.”
“비영살신이란 분에 대해 아십니까?”
“당시는 저도 약관의 나이였던지라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대단한 살수였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 들으신 대로 살수 이십 명을 반각 안에 죽이고 비영살신까지 삼 초 만에 그런 상처를 입힐 정도의 고수면, 당시 어떤 사람이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 혈우대마종을 제외한다면 그런 고수는 없었습니다. 무황들 역시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혈우대마종과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그 여인이 아무리 강해도 혈우대마종에게는 어려웠을 겁니다.”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견문을 지닌 동정어옹의 말이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럼 그 일과 그 신비 조직 간에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지요?”
담수련이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벡인막이 살수 조직이기는 하지만, 막주님이 죽었는데 그 흉수에 대한 조사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요. 사부님이 돌아가신 후 제가 막주가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수하들을 강하게 수련시키는 것과 청부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추명혼은 비영살신이 죽는 것을 본 후, 비영살신과 같은 초특급 살수가 최소한 열 명은 있어야 그 여인을 죽일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는 강력한 살수를 키우는 데 전력을 다했다.
백인막은 혼란의 무림을 지나오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다. 그는 그 돈을 전부 특급 살수를 키우는 데 사용했다.
일 갑자가 넘는 시간 동안 수련을 끝낸 후 살행을 나가고 돌아온 후 발견된 단점을 다시 수련으로 보완해 나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무려 천 명이 넘는 수하들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이 바로 백인막의 전설을 만든 백 명의 일급 살수와 특급 살수였다. 특히 상위 열 명은 모두 초특급 살수였는데 그들이 바로 십호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청부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비영살신을 죽인 여인도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비영살신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정도였다.
그렇게 엄청난 고수가 겨우 살수 이십 명을 죽이고 사라진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뜻밖의 청부가 들어왔다.
그 청부를 한 사람은 대공이었다. 대공은 살인 청부가 아닌,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했다.
살인이 아님에도 상당한 거액을 지불했고 여러 단서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단서를 통해 추적을 하던 그는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청부인이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분명 그녀였습니다.”
“그녀라면, 청부인도 여인이었나요?”
“예, 제가 그 말을 하지 않았군요. 청부인은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담수련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드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는 그녀 역시 알 수 없었다.
“청부인도 여인이고 죽이라고 한 사람도 여인이라면 확실히 뭔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그 여인의 정체를 알아내셨나요?”
“이름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가사도의 첩이었다는 것은 알아냈습니다.”
“가사도라면 송대의 간신을 말하는건가요?”
가사도는 송이 멸망하는 데 가장 큰 원흉으로 지목되는 간신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리에, 분열과 이간으로 조정은 물론 무림까지 혼란에 빠졌었다는 무상진인의 말이 떠올랐다.
“예, 맞습니다.”
담수련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계속 말해 보세요”
“그녀를 추적하면서 그녀가 어떤 조직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좀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대공의 재촉을 받아 그녀를 찾았다고 연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락을 받은 대공이 더 이상 그녀를 추적하지 말고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리라고 하더군요. 당시 대공의 힘은 엄청나서, 그가 없애라고 한마디만 하면 문파하나 멸문시키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거역하는 것은 모두의 죽음을 뜻하니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멈췄습니다.”
“그럼 그 청부한 여인도 더 이상은 만나지 못했겠네요?”
“그녀의 위치를 대공에게 알려 줬으니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지금 무상진인이 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녀를 보호하던 조직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유는요?”
“살수들에게는 나름의 육감이 있습니다. 그 조직은 절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후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강한 조직이 실체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순간 악불군과 담수련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적동마수도 실체가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소군, 나 지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
담수련의 질문에 악불군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생각이 드셨는데요?]
[아직 모르겠어. 좀 더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담수련이 뭔가에 충격을 받은 듯, 악불군과 전음을 나누는 동안.
청 안의 모든 사람들 역시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해졌다.
무상인진이 해 준 얘기에 더해 추명혼의 비사까지,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