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07화>
307화. 예상 밖(2)
“안에 적을 둔 채로 밖의 적을 상대하는 것은 병법에서는 절대 금하는 것이지요. 이번 기회에 간세들을 모두 솎아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죄로? 정말 간세 활동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냥 의심스럽다고 다 죽일 수는 없잖아?”
“죽일 수는 없지요. 그렇다고 의심스러운 자들을 그냥 안고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말 그대로 솎아 내는 겁니다. 방에서 쫓아내는 거지요.”
“어떤 식으로 솎아 낼 건데?”
“그거야 아가씨께서 하셔야지요.”
“내가?”
“그동안 아가씨께서 보인 능력을 감안하면, 대화 몇 마디만 하면 다 잡아 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믿습니다.”
‘소군이 나를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다니까 좋기는 한데…… 대화 몇 마디로 진짜 잡아낼 수 있을까?’
악불군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그녀로서는 무엇이든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대화 몇 마디로 간세를 잡아 낸다는 것이 가능할지는 좀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좋아! 그럼 그건 내가 집법 호법과 같이 의논해서 처리하는 것으로 하고, 여기 좀 봐 봐.”
그녀는 옆에 있는 중원 전도를 갖고 와 그의 앞에 펼쳤다.
“또 다른 일이 있습니까?”
“소군이 해야 할 일이야.”
“제가요?”
악불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전도를 살폈다.
지도에는 항주를 중심으로 여러 선이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이제 뭡니까?”
“천호방이 세력을 뻗칠 곳이야.”
“아가씨, 여기 선대로 따라서 세력을 뻗치면 끝없는 싸움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우리가 장악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싸우겠지만, 협력을 한다면 달라질 거야.”
“협력이요?”
“응, 지금 천호상단이 대룡상단과 연계해 장사를 하고 있잖아. 그것을 이쪽 지역들의 상단과도 확장하는 거야.”
“그 지역의 무림 세력들이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그들을 배제하고 연계한다면 그냥 두고 보지 않겠지만, 이익을 공유한다고 하면 찬성할 거야. 처음에는 상단을 통한 이익 공유지만, 신뢰가 좀 쌓이면 안보 공유에 들어갈 거야.”
안보 공유라면 다른 지역의 세력과 서로의 안위를 지켜 주는 방식이었다.
만약 남궁세가와 안보 공유를 한다면, 남궁세가가 위기에 처하면 천호방에서 도움을 주고 천호방이 위험에 빠지면 남궁세가에서 달려오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안보 공유는 둘 사이의 신뢰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정파끼리도 맺지 않았다. 막상 진짜 위험에 처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문파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가주님 말씀이 오룡세가들끼리도 안보 공유는 못 했다고 하던데, 다른 문파에서 우리와 그런 것을 맺겠습니까? 더구나 정파는 무림맹이라는 보호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신뢰를 만들어 가야지. 우리가 무림맹에 들어가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문파들과 그런 연계를 하지 않는다면 모두에게 독불장군으로 비추어질 거야. 그건 사방을 다 적으로 두고 있는 것과 같아. 우선 남쪽은 구천마성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니까, 이제 나머지 방위에서 친구를 만들어 나가야 해.”
“지금 그 신비 조직 문제도 있고 혈교도 계속 준동을 하고 있는데, 그럴 여력이 될까요?”
“여력을 따질 때가 아니야. 천무공자란 자가 천신문에 나타나 천상신녀가 문주냐고 묻고 갔어.”
“아가씨 정체를 알고 나타났다면 그냥 묻고만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연히 그러겠지. 하지만 이미 내게 흥미를 가진 이상, 천신문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봐. 지금 부역자들 처단을 도맡아 하고 있는 천무공자는 무림맹의 총순찰이라고 했어. 정체가 밝혀지기 전에 안전장치를 확실하게 해 놓는 것이 우리에게는 신비 조직이나 혈교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어.”
“아닙니다. 중요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악불군이 자책하듯이 말했다. 근래 여러 일이 벌어지면서 잠시 무림 일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담수련을 비롯한 잠룡세가 가솔들의 보호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만 없으면 그냥 훨훨 날아 용이 될 수 있는데…….’
그런 모습을 보는 담수련은 가슴이 아팠다. 자신과 담수운, 거기다 남아 있는 잠룡세가의 식솔들까지 모두 다 악불군에게는 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밖에서 내당당주인 상경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주님, 수상한 서찰이 날아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것이 좋을 듯싶어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선 상경호는 봉투 하나를 공손히 바쳤다.
“봉투가 많이 구겨진 것을 보니 정상적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군요?”
“예, 방금 전에 화살이 하나 날아들었는데, 거기에 묶여 있었습니다.”
“화살을 날린 자는 잡았습니까?”
“날아온 쪽으로 수하들을 급히 보내기는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잡기 어려울 듯합니다.”
“고수였던가요?”
“어느 정도 고수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공력만은 저보다 상당히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검수하지 않고 그대로 나한테 가지고 오신 겁니까?”
“그 정도 고수가 장난으로 방주님 친전이라고 써서 서찰을 보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았습니다. 나가 보십시오.”
“예!”
‘천호방주 친전이라…….’
상경호가 나가자 악불군은 봉투의 겉면에 적혀 있는 글을 한 번 되뇌며 서찰을 꺼냈다.
서찰에는 작은 글씨로 상당히 길게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악불군은 서찰의 앞뒷면을 빠짐없이 손으로 문지르고는 코에 대고 냄새까지 맡았다.
담수련에게 가는 모든 외부 물건은 악불군에게 먼저 검수를 받은 후에야 담수련에게 넘어갔다.
특히 서찰은 종이 표면에 독을 묻혀 놓거나 봉투 안에 독 가루를 넣어 상대를 해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에 특히 조심했다.
“해로운 것은 없는 것 같으니 직접 한번 읽어 보십시오.”
담수련은 건네받은 서찰을 죽 읽어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악불군에게 물었다.
“소군 생각은 어때?”
“솔깃한 내용이기는 한데, 시기가 좀 이상하지요?”
“그러게……. 그리고 용건은 간단한데 너무 길게 썼어.”
서찰에는 무림의 정세를 뒤흔들 아주 중요한 정보를 팔고 싶으니 내일 자시까지 금자 천 냥을 가지고 자신들이 지정한 장소로 나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악불군이 반드시 들어야 할 정보라는 설명을 쓸데없이 장황하게 써 놓은 것이다.
“저를 반드시 불러내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받았다.
“더 의아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 글에는 대단한 극비 정보라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 막상 혼자 나오라는 말이 없어. 소군이 나올 때 수하들을 이끌고 나와도 된다는 의미겠지?”
“아가씨 생각에는 저를 유인하는 것 같으십니까?”
“소군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둘의 대화를 들어 보면 마치 저들의 속셈을 이미 눈치챘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사실 서찰의 내용은 상당히 치밀해서 둘처럼 금방 의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는 의심도 가지만 그렇다고 확신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가씨 말씀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소군 말대로 이 서찰이 소군을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라면, 내일 자시가 위지 대협을 제거하기 위해 들어올 시간이 되겠네.”
“저만 없으면 쉽게 제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백인막을 흡수한 것을 유모나 천화궁주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는 아가씨께서 자꾸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했는데, 아가씨 생각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담수련은 백인막과 무림사기와 그들과 함께 들어온 사십여 명의 고수들도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했다. 특히 적설에 대해서는 방주 호법은 물론 사화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강호에서 자신의 전력의 삼분지 일은 숨겨야 한다는 담무룡의 조언 때문이었다.
“적이 나의 전력을 완벽하게 안다면 대처 방법을 구상하기가 아주 쉬워지는 법이야. 우리가 지금 신비 조직이나 혈교에 대해 상대할 방법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이유도, 그들의 실지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기 때문이거든.”
“그런데 제가 나가지 않는다면 저들도 침입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아마 그럴 거야. 어디선가 숨어서 소군이 총단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확률이 높아. 만약 유인책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침입 시기를 늦추거나 우선 포기할 거야.”
“그럼 나가는 척이라도 해야겠군요?”
“그러긴 한데 이자들이 지정한 곳까지 가는 것은 너무 멀어. 하지만 거기까지 안 가면 공격을 안 할 수도 있고.”
“지금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으니 우리가 아예 먼저 그들을 치는 것은 어떨까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두 심증이지,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잖아? 아직 아무 행동도 안 했고 진짜 위지 대협을 찾는 것인지 모르는데, 그들을 쳤다가 아니라면 그들은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사파나 마도라면 의심만으로도 얼마든지 공격했을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의심받는 것 자체만으로 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호방은 정파를 표방하고 있고, 실질적으로도 악불군이나 담수련은 의심만으로 누구를 핍박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긴 그렇겠네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흑 호법 정도면 저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도망은 칠 수 있겠지?”
“글쎄요? 흑 호법의 능력은 인정할 만하지만, 적이 너무 강하면 도망을 못 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흑 호법이 도망을 못 칠 정도로 강한 자가 있을까?”
흑석영은 백인막에서도 특별하다고 할 정도로 자객술의 모든 정수를 완벽하게 익힌 자였다. 더구나 살수로서는 드물게 내공까지 일 갑자 이상을 지니고 있어서, 대놓고 도망을 칠 생각을 한다면 악불군이라 해도 일각 안에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강한 자라면 저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저를 유인한다는 것은 그 정도의 고수가 없다는 방증이겠지요?”
“그럼 흑 호법을 소군으로 변장시켜서 그들이 말한 장소로 보내자. 그리고 우리는 기다려 보는 거야.”
“그런데 만약 서찰의 내용이 저를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라면 어쩌지요?”
“우연이 세 번이나 겹치면 그건 절대 진짜일 수가 없어. 걱정 마.”
비밀을 가진 적동마수가 나타나고 그를 추적하는 자들이 항주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비밀 정보를 주겠다는 서찰이 온 것은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확실하게 연결된다는 것이 그녀의 분석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악불군이 나가자 담수련은 턱을 손에 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떤 대화를 해야 간세인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들어간 것이었다.
* * *
“사부님, 비밀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개방 방주의 최측근 장로로 방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는 신룡신개가 소걸아와 함께 사해신개의 방으로 들어왔다.
비밀 전서는 사해신개에게만 전해지는 특별 정보로, 오직 신룡신개만이 받을 수 있었다.
“이리 갖고 오너라.”
사해신개는 불안한 표정으로 급히 전서를 전해 받았다.
“사조님! 비밀 전서가 뭔데요?”
“네 사부에게 물어.”
“아이~ 사부님께서는 사조님께 물으라고 하는데요?”
“내가 물으라고 한다고 너도 물으라고 하면 안 되지. 넌 여쭈라고 하던데요. 그러는 거야.”
질책하듯 한마디 한 사해신개는 이번에는 신룡신개를 보며 말했다.
“신룡아.”
“예, 사부님.”
“아무리 거지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좀 가르쳐라. 이놈하고 무림 명숙들을 만나면 내가 불안하다.”
“저도 여러 번 말했지만, 예의 지킬 거면 학사를 하지 왜 거지를 하냐면서 말을 안 듣습니다.”
말하는 신룡신개는 소걸아가 마냥 예쁜지 그 와중에도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예의 같은 거 안 지켜도 된다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그놈이 뭘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는 거냐?”
“예쁘지 않습니까.”
“스물도 넘은 놈이 뭐가 그렇게 예쁘냐?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뻐 죽는다고 하더니, 쯧쯧! 네가 그러니까 저놈이 천방지축이 된 거야.”
사해신개는 못마땅한 듯 말하고는 둘 다 나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물론 소걸아가 그대로 나가면 소걸아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