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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315화 (315/472)

<천검지애 315화>

315화. 암약(2)

그동안 없었던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없기를 바라던 그에게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럼 뭔가 큰일이 생겼다는 건데…… 교통에게 말해서 그들의 감시를 부탁해 봐라.”

“잘못해서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일인데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면 그것으로도 죽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가 혈교의 절강 분타를 맡은 것이 십 년이 넘었지만 총단에서 직접 밀사가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절강이 중요해졌다는 의미였다.

‘잠룡세가 때도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는데 천호방이 생긴 후에 더 불안한 일이 자꾸 생기니,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살지도 모르겠군…….’

부분타주가 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의 표정은 불안으로 일그러졌다.

* * *

바위틈으로 사라졌던 가면인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분지였다.

그러나 하늘은 나무의 잎사귀들과 넝쿨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마치 동굴 안처럼 보였다.

가마는 중앙에 있는 작은 전각 앞에서 멈췄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전각 안에서 네 명의 여인이 뛰어나왔다.

“루주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러자 가마 안에서 가면인이 나왔다.

“단주는 안에 있느냐?”

“지금 나오고 계십니다.”

가면인은 기분이 상한 듯 한마디 했다.

“내가 오는 것을 알았을 텐데 감히 먼저 나와 기다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때 안에서 또 다른 가면인이 나타나더니 포권을 했다.

“루주님께서 오신 것은 들었습니다. 하필 방금 각주님의 전서가 도착해서 그것을 먼저 확인하느라 늦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루주라 불린 가면인은 주먹을 꾹 쥐었다.

‘이것들이 내 위치가 불안해졌다고 멀리하기 시작했구나…….’

자신보다 높은 각주의 전서라는데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각주는 지금 이곳에 없으니 얼마든지 융통성을 발휘해 먼저 인사를 할 수도 있었다.

“알았다. 들어가자.”

“예.”

가면을 써서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공경하는 자세가 아님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화가 시작되자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호방 총단에 차 영주를 들여보낸 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는 아십니까?”

자리에 앉자 단주는 마치 질책하듯 물었다.

“지금 네가 감히 나에게 따지는 것이냐?”

“전 각주님의 뜻을 전달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밀지조차 회수하지 못하고, 적동마수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천호방 총단에 들어간 차 영주를 비롯한 궁도들의 생사가 불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알아낼 수 있을 거다.”

“그들이 만약 생포라도 되었다면 적동마수를 죽인지 못한 것보다 더 큰 실수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루주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부들거렸다.

예전 같으면 ‘네가 죽고 싶으냐!’하고 호통을 쳤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단원들 이십 명이 필요하다.”

“…….”

단주는 잠시 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곤란하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루주는 굳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네가 도움을 줬음에도 일이 잘못된다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지만, 도움을 안 줌으로써 일을 시작도 못하여 심대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단주 너도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단원들 이십 명을 어디에 사용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것까지 내가 네게 보고해야 하냐?”

“전 단주로서 단원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 천미각 소속입니다. 단원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전 각주님께 질책을 받게 됩니다. 루주님과는 소속이 다르다는 것을 감안해 주십시오.”

“각주님께는 내가 직접 양해를 얻겠다.”

뜻밖에도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이들조차도 나름 서열과 분파의 갈등은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것은 담수련이 그렇게 찾는 그들의 단점일 수도 있었다.

* * *

천제무황의 부름을 받은 제갈우명은 현기수사가 같이 있자,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악불군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인물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맹주님의 부름을 받아 왔습니다.”

제갈우명이 인사를 하자 현기수사가 살짝 목례를 했다.

“부군사께서도 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맹주님께서 의견을 듣고 싶다고 부르셨습니다.”

제갈우명은 천제무황을 보며 물었다.

“어떤 일 때문에 부르셨는지요?”

“제갈 군사도 보고는 받았겠지?”

“혈해사계에서 공동파를 협박한 사건에 대해 물으시는 것입니까?”

“공동파가 아직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는 있지만, 구파일방의 일원이자 무림맹의 구성원이고 영웅회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혈해사계에서 대놓고 모욕을 주었는데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다고 지금 혈해사계와 전쟁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군사님의 정책은 너무 유약합니다. 지금 무림맹이 세워진 지 일 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하지만 총순찰이신 대공자님께서 부역자들을 제거하며 온 힘을 쏟고 있지만 어느 문파도 도움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혈해사계의 도발까지 그냥 참고 넘어간다면 무림맹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예상대로 현기수사의 반박이 곧 뒤를 이었다.

“부군사, 유약한 것이 아니라 지금 상황에 맞는 분석을 하는 것이오. 지금 혈해사계는 황상과 어떤 연계도 없는 상황이오. 그들은 무림맹과 황실 사이에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소이다.”

“무림맹으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게 해서 황상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기 위한 도발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소.”

“물론 황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황상은 어차피 무림인들에 대해 매우 배타적입니다. 황상의 심기 때문에 정파인들의 믿음을 잃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소탐대실(小貪大失)이 될 것입니다.”

“황상이 배타적이라고는 하나 우리를 대놓고 배척하지는 못할 것이오. 하지만 명분을 준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시오?”

“지금 황조가 시작되는 시기입니다. 황상은 어차피 무림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황상이 무림맹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그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겠소이다.”

“우리의 도움이 없이 정국을 안정시킬 대안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미 황상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소이다.”

“설마…… 천호무적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젊은 그를 영웅대회를 거치지도 않고 십왕패를 건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만약 무림맹에서 황상이 원치 않는 전쟁을 일으킨다면 천호무적검에게 힘이 쏠리게 될 겁니다.”

“군사님까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천호무적검을 무림맹에 가입시키거나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정책이 아니겠습니까?”

현기수사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제갈우명은 현기수사를 본 순간 이미 이런 결론을 낼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현기수사의 언변에 어울려 준 것은 정면 돌파를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천호무적검에 대한 대비는 맹주님께 한 달 안에 보고를 드리기로 했소이다. 아직 보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때까지 분석을 끝내고 확실한 의견을 낼 생각이었소.”

그러자 아무 말 없이 둘의 논쟁을 듣고 있던 천제무황의 입이 열렸다.

“제갈 군사.”

“예, 맹주님.”

“나와 제갈 군사가 함께한 시간이 꽤 됐지?”

“이십 년이 넘은 것으로 압니다.”

“지금까지 제갈 군사는 모든 사안을 정말 빠르게 정리해 왔지. 한데 천호무적검 문제만은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을 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현기수사가 다시 끼어들었다.

“천호무적검이 출중한 인물이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군사께서 그를 너무 크게 보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크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는 스스로 커졌소이다. 황상께서 십왕패를 내리신 것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시는 게요?”

“황상께서는 무림맹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는 근본이 불명확한 천호무적검을 키워 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장 군사님조차 그 문제로 고심하고 있지 않습니까? 황상과의 친분이 없었다면 그저 뛰어난 후기지수의 한 명으로 알려졌을 겁니다.”

“부군사께서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제가 잘못 본 모양이군요? 본 맹의 정보망을 동원해 알아낸 바로는 그는 황상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이 지금의 천호방을 만들었소이다. 더욱이 지금 절강에서 양민들에게 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소이다. 난 그를 영웅의 한 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소이다.”

“제갈 군사.”

“예.”

“자네가 그렇게 인정을 한다니 대단한 젊은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구먼. 하지만 말일세. 그 아이를 무림맹에 가입시키지 않는다면 천하는 또다시 혼란에 빠지고 말 게야.”

“저도 무림맹에 가입하는 문제에 대해 말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조건을 붙이더군요.”

“무림맹에 가입하는 데 오히려 조건을 붙이더란 말인가?”

“예.”

“허허허허! 배짱이 아주 두둑하군. 그래서 뭐라고 했나?”

“거절했습니다.”

“영웅으로 인정할 정도인데 거절을 하다니, 이유는 뭔가?”

“연맹체에는 형평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를 무림맹에 가입시키고 싶다 해도, 다른 문파에는 없었던 예외를 적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한 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맹 전체에 위화감을 조성할 수는 없으니까요.”

천제무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 좋네. 약조한 대로 보름을 더 기다려 주지. 그때까지 무림맹에 가장 유리한 대책을 가져오게.”

“감사합니다.”

제갈우명이 나가자 현기수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군, 악불군의 정체에 모호한 점이 있다는 것을 왜 추궁하지 않으셨습니까?”

“넌 제갈우명의 영향력을 너무 간과하는 것 같구나. 그는 정파의 명숙들에게 대단한 신뢰를 받고 있다. 그가 악불군의 정체에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 모른 척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터, 이제부터 네가 밝혀 내거라.”

“존명!”

현기수사가 나가자 천무사왕이 나타났다.

“얘기 다 들었지?”

“예!”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제갈우명의 말도 일리가 있고 현기수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팔수권왕의 말에 천제무황은 혀를 차더니 다른 삼왕을 보았다.

그러자 파금왕이 나섰다.

“천호무적검과 직접 손을 섞었던 저로서는 현기수사의 말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의미냐?”

“그는 확실히 저를 능가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에 그런 무공이라면 황상의 후광으로 지금의 명성을 얻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천학이와 비교하면 어떻더냐?”

“용호상박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용호상박이라…….”

천제무황은 한 번 되뇌더니 한세도왕을 보며 물었다.

“네 의견은 어떠냐?”

“저는 주군의 의중을 그냥 따를 것입니다.”

“내 의중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고 네 의견을 말해 보라는 거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됐다. 너희들의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내가 직접 그 아이를 만나 봐야 할 것 같구나. 나가 보거라.”

모두가 나가자 천제무황은 몸을 일으키더니 창가로 갔다. 창밖은 그가 좋아하는 대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져 있었다.

“구문황이 나타났을 때를 다시 보는 것 같군…….”

젊은 날,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강호에 발을 디뎠다. 단숨에 천하에 이름을 알리고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대협이 되겠다는 것이 그의 호연지기였다.

그리고 그는 정말 단시일에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그와 맞먹을 정도로 빠르게 명성을 얻은 후기지수가 더 있었다.

마도의 영웅인 구천마황과 사파의 영웅인 혈해사황이었다. 그가 용호상박이라는 말을 되뇌인 것도 당시 천하가 그들에게 용호상박이라는 말을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명성이 올라가던 셋은 그들보다 일 년 정도 늦게 나타난 한 청년에 의해 밀리기 시작했다.

구문황이었다.

당시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천륭검가였기에, 그가 명성을 얻어 가는 과정은 악불군과 많이 흡사했다.

‘천학이에게 나와 같은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지.’

입술을 꾹 다문 천제무황의 얼굴이 굳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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