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17화>
317화. 염상(2)
[주군, 보타검각 감시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보고하세요.”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악불군은 흑석영의 전음을 받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흑석영이 스르르 나타났다.
“보타검각에서 십여 명의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악불군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보타검각에 다녀온 이후, 악불군은 이십 명의 방도들을 어부로 위장시켜서 번갈아 가며 보타산을 감시하게 했다.
어차피 들어갈 수도 없고 가까이 가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에, 그들의 임무는 왕래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보타산을 오가는 배는 부식을 전하는 정기선 이외에는 발견한 것이 없었다.
“소금을 빼앗기자 나왔다? 아가씨 예측대로 염상들과 보타검각 사이에 연관이 정말 있는 것인가?”
주산군도에 비밀 염전이 있고 상당히 많은 소금들이 계속 반출되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담수련은 보타검각의 재정을 소금으로 충당하고 있을 거라는 예상을 했다.
대단히 신빙성 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절묘한 시기에 보타검각의 여인들이 나왔다는 말에, 악불군은 그 정도면 증거로 보아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계속 감시하라고 하십시오.”
“이미 천호특별단 단원들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염상들과 만난다면 즉시 보고하라고 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과 시비가 붙지 말아야 합니다.”
“몇 번에 걸쳐 당부했으니, 죽더라도 대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을 위험이 있다면 대적해도 됩니다. 죽이려고까지 한다면 그것은 시비의 범주를 넘어간다고 봐야지요.”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마 당주님은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소걸아 소협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는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만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소걸아 소협은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하니 재촉을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흑석영이 사라지자 악불군은 몸을 일으켰다.
보타검각에서 사람들이 나왔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는 담수련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전과 달리 악불군은 담수련의 옆에 하루 종일 붙어 있는 밀착 경호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그가 즉각 도착할 거리에서만 움직이고 있었다.
* * *
“아이구! 저놈들 때문에 일도 못 하고 큰일났네.”
가장 많은 소금을 강탈당한 동려포구는 조사를 위해 달려온 흑염회의 무사들과 그들로 인해 포구를 사용하지 못한 어부와 포구의 상인들이 모여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어부들은 겁이 나서 따지지도 못하고 원망스런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고 있었다.
포구가 보이는 주루에 챙이 넓은 낚시꾼의 모자를 쓰고 앉아 있던 백리옥빙은 고개를 갸웃했다.
‘소금을 가득 채운 삼십 대의 우마차가 어떻게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고 사라질 수 있을까?’
그녀는 동려포구에서부터 우마차의 바퀴 자국이 사라졌다는 일 마장 밖의 숲까지 이미 답사를 했다. 원체 통행이 많은 지역인지라 우마차의 바퀴 흔적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녀는 바로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 해도, 통행이 많은 관도에서 짐을 가득 실은 삼십 대의 우마차가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검후님, 다녀왔습니다.]
그때 그녀의 귀에 자신의 심복인 양미려의 전음이 들려왔다.
[어떻더냐?]
[총단은 겉보기에는 평온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백 명에 가까운 방도들이 막간산 부근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막간산? 소금이 강탈당한 장소와는 연관이 없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천호방 총단에 침입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막간산에서 침입자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아니냐?]
[아직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총단을 침입한 자들이 은우루주의 명을 받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은우루주면 천후 소속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상관하지 마라.]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일련의 사건들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은우루주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천미단에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천미단이라는 말에 백리옥빙은 고심하듯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성후께서 천후와 엮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우선 더 조사를 해 본 후에, 단서를 끝까지 찾지 못하면 그때 천미단에 가 보자.]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호무적검은 아직 총단에 있겠지?]
[예, 밖으로 나오지는 않고 있지만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가 봐라.]
[검후님, 천호무적검을 방문하실 생각이라면 좀 더 심사숙고하십시오.]
[그자와는 아직 끝내지 못한 것이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 말고 빨리 우마차의 흔적을 찾아라.]
[예!]
양미려가 사라지자 백리옥빙은 갑자기 악불군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타검각은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금남의 성지였지만 그녀는 많은 남자들을 보았다. 물론 만나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남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고, 실지로 그녀는 남자들을 혐오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처럼 툭하면 악불군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잠자리에 누울 때면 더 많이 생각이 났다.
‘그래, 승부를 봐야 했는데 못 봐서 아쉬움이 너무 큰 거야.’
백리옥빙은 그의 얼굴이 자꾸 생각이 나는 이유가 자신의 승부욕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 * *
“소군 생각은 어때?”
보타검각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담수련은 반문했다. 근래 그녀는 꼭 악불군의 의견을 먼저 묻고 있었다. 그의 의견이 대단히 정확하고 날카로운 것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최대한 그의 의견을 반영해 그의 권위를 세워 주기 위해서였다.
“염상들과 보타검각 간에 은밀한 거래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담수련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만약 보타검각에서 우리를 의심하고 추궁하려고 하면 어쩔 거야?”
“글쎄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했습니다.”
“왜?”
“보타검각은 무림인들이 정파인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단히 강하고요. 맞받아치는 것은 너무 큰 강적을 가까이에 두는 셈이 될 겁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준다면 무림 십왕인 소군의 권위가 추락할 거야.”
“최대한 싸움은 피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는다면 되지 않을까요?”
“그때 검후란 여인 봤지?”
“예.”
“대단히 호전적이었어. 그녀가 소군을 아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적개심을 보이더라고.”
“저도 느꼈습니다.”
“보타검각도 그 신비 조직의 일원이라면 그런 이유를 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좀 심한 것 같아.”
“내부영주라는 여인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좋아, 그들이나 혈교는 부딪쳐 가면서 상대를 하도록 하고 우선은 당장 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자고.”
신비 조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게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들이 얼마만큼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혈교 역시 상상을 초월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추측은 하고 있지만 역시 모르는 것이 많았다.
담수련은 모르는 상태에서 억지로 계획을 짜는 것보다는 우선 들쑤셔서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일종의 혼수무어(混水摸魚) 전법이었다.
그리고 그 단초는 염상 조직 와해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때 흑석영의 다급한 전음이 들려왔다.
[주군! 소걸아 소협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예, 멀쩡하시다고 합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게, 좀 이상한데…… 소화루라는 주루의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하던 임무를 내팽개친 채 조용히 구걸을 할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소걸아 소협에게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하세요.]
[저희도 의아해서 그냥 주시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분타주에게는 전해 주었습니까?]
[예, 지금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럼 나간 방도들은 모두 귀환하게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소화루는 뭐하는 곳입니까?]
[항주 환락가에 있는 기루입니다.]
[그럼 가 보세요.]
[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악불군은 궁금한 듯 자신을 보고 있는 담수련에게 전음의 내용을 얘기했다.
“소화루로 소걸아 소협이 쫓던 자가 들어간 모양이네?”
담수련은 얘기를 듣자 단박에 상황을 짐작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화루가 항주에 있는 기루라고 합니다.”
“점점 연결점이 드러나는 것 같지 않아?”
담수련은 기루라는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화궁이 바로 기녀들의 모임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나가면 신비의 조직의 면모를 곧 알게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그 규모가 어디까지인지 두려울 정도입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부언은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데도 참고 있는 것이 역력했으나 악불군은 묻지 않았다.
무엇이든 그에게는 숨기는 것이 없는 그녀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 *
‘이것 봐라, 항주가 은근히 짭짤하네?’
소화루 앞에서 구걸을 시작한 소걸아는 구걸통에 생각보다 돈이 잘 모이자 희색을 띠었다.
은우루주가 바위 사이로 사라진 후 두 흑영을 추적한 소걸아는 이번에도 산을 몇 번이나 빙빙 돌았다. 심지어 그들은 수시로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혹시 모를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소걸아로서는 너무 집요한 그들의 행태에 오히려 반드시 그들이 가는 곳을 찾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은 항주 성내로 들어왔고 갑자기 소화루 안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우선 소화루 앞에서 구걸하던 진짜 거지를 반 협박으로 쫓아낸 후 자리를 잡은 그는 소화루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흑영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코를 믿었다. 그들의 냄새가 소화루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흠흠…… 이거 뭔가 익숙한 냄샌데?’
짭짤한 수입에 미소를 짓던 소걸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뭔지 모를 익숙한 냄새를 풍기며 다가온 거지 한 명이, 얼굴을 볼 새도 없이 그의 옆에 새로운 구걸통을 놓고는 머리를 땅에 박았기 때문이었다.
“야! 거지들도 상도의가 있는 거다. 이 자리는 이미 내가 맡았는데 끼어들면 어떡하냐?”
자신의 구역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는 거지의 율법에 매우 충실한 소걸아는 당장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사숙, 혼원개입니다.]
‘잉! 혼원개? 어쩐지 냄새가 많이 맡았던 거다 했더니, 쯧!’
모든 문파의 제자들이 가장 꺼려하는 관계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질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말이 사질이지 형처럼 행동하기 일쑤였고 은근히 어리다고 무시도 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혼원개는 그를 무시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원체 성격이 대쪽 같아서 남들과 다른 행동을 많이 하는 소걸아와는 부딪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혼원개는 어릴 때 바쁜 사부를 대신해서 그에게 기초 무공을 가르쳐 준 적도 있었기에 사질이라해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혼원 사질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소걸아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소질이 절강의 분타주이니 당연히 여기에 있지요.]
‘이씨! 이젠 사질한테 잔소리 듣게 생겼네.’
찝찝한 표정을 지은 소걸아는 짐짓 놀란 듯 반문했다.
[혼원 사질이 절강의 분타주였습니까? 승진하셨네요?]
[딱히 승진했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중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태상호법님께서 사숙을 당장 찾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화가 단단히 나신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을 아시면 당장 총단으로 소환할 텐데, 어쩌실 겁니까?]
[그게 말입니다…….]
총단으로 소환한다는 말에 쫄은 소걸아는 급히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먼저 저희에게 연락해서 합동작전을 펼치셔야지요? 이런 식의 단독 행동을 하시다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제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거 모르십니까?]
말이 사질이지 완전히 막냇동생을 질책하는 말투였다.
그 순간 건수를 잡은 듯 소걸아의 눈이 빛났다.
[혼원 사질께서 뭔가 잊어버리신 것 같은데, 제 지위가 순찰 천강대장입니다. 혼원 사질보다 위거든요? 거기다 제가 사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