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18화>
318화. 격변(1)
[아직 순찰 천강대장 지위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지위가 없으시기 때문에 지금은 제 지휘를 받으셔야 합니다.]
[사조님께 직접 통보받았는데 뭐가 아직 지위가 없다는 겁니까?]
[그럼 순찰 천강대장패를 보여 주십시오.]
‘우씨! 내가 아직 패가 없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제가 패를 깜빡 잊고 왔습니다.]
[거짓말하시면 안 됩니다. 패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왜 사질이 가지고 있습니까?]
소걸아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태상호법님께서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면 그때 넘겨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조님도 어떻게 사손을 믿지 않고 이러냐?’
속으로 구시렁대던 소걸아는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며 말했다.
[패를 사질이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네요. 이제 보았으니 주시지요.]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했으니 드릴 수 없습니다.]
[사질, 우리 사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사숙,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공적인 사안입니다. 사사로운 정을 여기에 연결하시면 안 됩니다.]
‘오 년 만에 만났는데 달라진 게 없네? 하여간에 저놈의 고지식한 성격은 나와는 완전 안 맞는데, 에이!’
[사질도 알다시피 내가 시간을 지키기 싫어서 안 지킨 것이 아니라, 본 방을 위해 내 한 몸을 희생한 거라니까요?]
[저 안에 들어갔다는 자들이 정말 그만큼 중요한지 알아본 후에 총단에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혼원개가 절강의 분타주가 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사방에 적이 있는 악불군을 간접적으로 돕기 위해 무공이 강하면서도 천방지축인 소걸아를 견제할 인물을 찾다가 그를 낙점한 것이었다.
[지금, 제자들 몇 명이나 이 근처에 있습니까?]
[이십 명 정도 됩니다. 그리고 천호방의 방도들도 열 명 이상 있을 것입니다.]
[천호방에서 이미 저곳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사숙을 찾다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잘됐네. 악 방주를 이리 오라고 연락 좀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사숙! 악 방주님의 무림 십왕입니다. 사숙께서 오라 가라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순간, 소걸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잘하면 혼원개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악 방주가 대단한 것은 사질도 아시는군요?]
[사숙께서는 요즘 악 방주님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모르십니까?]
[그럼 내가 사질에게 보여드리지요. 천호방도에게 전하기나 해 보세요.]
* * *
“추국아, 나갈 준비해라.”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담수련이 갑자기 사화를 보며 말했다.
“어디 가시게요?”
“생각해 보니까 곧 나갈 일이 생길 것 같네.”
“어디요?”
“소화루.”
“거긴 왜요?”
“그냥 준비나 해.”
추국은 나간다는 말에 신났는지 다른 사화를 보며 급히 말했다.
“너희도 들었지? 빨리 모두 나갈 준비해.”
모두는 오랜만의 외출에 기분이 좋은 듯 급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악불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접니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선 악불군은 담수련과 사화가 모두 외출복을 입고 있자 의아한 듯 물었다.
“어디 나가십니까?”
“지금 나가자고 온 거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나가자고 할 것을 아셨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소걸아 소협에게 가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녀는 소걸아가 소화루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 그가 오는 도중 누구를 만났을까를 생각했었다.
그러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순간 악불군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떠올랐다.
사정은 좀 다르지만 나가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방금 소걸아에게서 제가 좀 왔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예상대로 상당히 중요한 자들을 감시하고 있나 보네?”
“그렇지요.”
“그럼 가자고.”
* * *
[사질.]
[예.]
두 손을 올리고 구걸을 하던 소걸아는 혼원개의 구걸통을 슬쩍 보더니 약간 못마땅한 듯 물었다.
[한 장소에서 둘이 같이 구걸하는 것은 거지의 율법에 어긋나는 거 아시지요?]
[그건 구걸할 때 얘기입니다. 지금은 임무 중이지요.]
[그래도 동냥이 지금 나눠지고 있지 않습니까?]
소걸아는 사람들이 혼원개의 구걸통에 던지는 적선이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는 가정이 영 찜찜한 듯했다.
[임무가 끝나면 사숙께 전부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래 봬도 양심있는 거지입니다. 구걸한 돈을 그냥 받지는 않습니다.]
지금 구걸통에 모여진 돈은 전부 합쳐도 동전 열 문도 안 되는 푼돈이었다. 개방의 거지들은 말만 거지지, 무림인답게 생기는 돈이 많아서 제법 부유했다.
그러나 천성이 거지인 소걸아는 어디서 공짜로 생긴 돈보다 구걸해서 생기는 돈을 더 좋아했다.
툭!
그때 소걸아의 구걸통에 제법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땅에 박고 있던 소걸아는 살짝 고개를 들고는 구걸통 안을 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은자가 무려 다섯 냥이나 넣어져 있었던 것이다.
“혹시 잘못 넣으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
은자를 넣은 사람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며 말하던 소걸아의 말이 멈췄다.
그가 사해신개와 같이 악불군을 만나러 왔을 때 첫눈에 반했던 여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화인 매향이었다.
“소걸아 소협이시지요?”
“그렇습니다만? 저를 아십니까?”
몽롱한 표정을 보이던 소걸아는 매향의 말에 급히 대답했다.
“방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곳으로 와도 되는지 물어보고 오라고 하셔서 먼저 왔습니다.”
“악 방주가 여기 왔다고요?”
“예.”
“오라고 하십시오.”
말을 마친 소걸아는 엎드린 자세를 풀고는 정좌를 하고 앉았다.
둘의 대화를 듣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혼원개는, 정말 악불군이 면사를 쓴 여인과 다가오자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악 방주님…….”
혼원개는 급히 포권을 했다.
그는 진짜 악불군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 했던 것 같았다. 무황이 개방의 천강대장이 오라고 했다고 나타난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악 방주, 우리 친구인 거 맞지……요?”
소걸아는 막상 악불군이 나타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 형, 친구하기로 해 놓고 갑자기 이러면 어떡하나? 당연히 우린 친구지.”
소걸아는 악불군의 말에 감동한 듯 벌떡 일어서더니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림인들이 손을 잡는 것은 절대 금기 사항이었다. 급소인 맥문과 가깝기도 했고, 손을 잡힘으로써 기습에 대응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미소를 지며 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말했다.
“자네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나? 그래도 이렇게 멀쩡하게 나타나 주니 고맙네.”
악불군의 말은 진심이었다. 소걸아는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얻은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던 혼원개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손을 서로 잡았다는 것은 악불군이 소걸아를 진정으로 믿는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여긴, 혼원개라고 절강성의 분타주야. 나한테는 사질이기도 해.”
소걸아는 어깨에 힘을 빡 주며 혼원개를 소개했다.
“이미 인사는 했네. 그래 무슨 일인데 갑자기 사라졌다가 여기서 구걸을 하고 있는 건가?”
소걸아는 자신이 막간산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역시! 하는 표정으로 지었다. 그들의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소걸아 소협, 그곳이 어딘지 다시 가실 수 있지요?”
담수련은 가마를 탄 자가 바위틈 사이로 사라졌다는 말이 가장 흥미로웠던 듯 반문했다.
“당연하지요. 원래 거지는 한 번 갔던 곳은 절대로 잊지를 않습니다.”
자신이 거지라는 점에 너무나도 큰 자부심을 보이는 소걸아의 모습에, 담수련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의 그런 점이 그녀가 소걸아를 좋게 본 이유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조금의 욕심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여기는 왜 오신 거지요?”
“그 가마를 따르던 자들 둘이 소화루로 들어갔습니다.”
“아직 있을까요?”
“제가 느끼기에는 아직 있습니다.”
천방지축인 소걸아였지만, 담수련이 악불군에게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지 상당히 예의 있게 대답하고 있었다.
* * *
“미진아!”
소화루 최고의 기녀인 미진은 가장 친한 이화가 들어오자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쉬! 왜 이렇게 목소리가 높아?”
“밖에 좀 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미진은 이화의 눈에서 불안함을 느끼자 창가로 다가가 천을 살짝 들추며 밖을 쳐다보았다.
기녀들의 창은 모두 대로 쪽을 향해 만들어져 있었다. 어두워지면 창을 활짝 열고 길을 오가는 한량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유혹을 하기 위해서였다.
“왜 애들이 모두 창밖으로 나온 거야?”
아직 기녀들이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기 전임에도 상당수의 기녀들이 창을 열고 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자, 미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
“저기 왼쪽 황나무 앞에 젊은 무인 한 명이 거지들과 대화하는 게 보일 거야.”
미진은 이화가 말한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기녀들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 늠름하고 잘생긴 청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잘생기긴 했네? 그런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춘월 언니 말이, 대화하고 있는 거지들이 개방의 거지 같다는 거야.”
미진은 밖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며 소걸아와 혼원개를 살폈다.
“확실히 무공을 아는 거지들은 맞네. 하지만 개방의 거지들은 그동안에도 자주 보였잖아?”
“저 거지 둘이 앞에서 구걸한 시간이 꽤 됐다고 하더라고. 거기다 저 젊은 무인과 여인들이 나타난 후에는 소화루를 자꾸 보고 심지어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하더라고.”
밖을 보던 미진은 이번에는 악불군과 같이 있는 담수련과 사화를 살폈다. 그러고는 경계하는 눈으로 말했다.
“우리를 추격한 자들이 있었을까?”
“있을 리가 없지. 우리가 얼마나 조심했는데.”
이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미진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거지와 대화를 나누던 청년의 옆으로 십여 명의 무인들이 다가가더니 허리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그 무인들은 천호방의 방도들이었다.
“천호방인데?”
미진의 말에 이화도 창가로 오더니 조심스럽게 밖을 쳐다보았다.
정면에 천(天)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복장은 분명 그들이 천호방의 방도들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들킨 거 아닐까?”
이화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짓던 미진의 얼굴이 확 변했다.
천호방도들이 소화루를 포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화 역시 당황한 듯 미진을 보았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미진은 급히 침상으로 달려가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옷은 벗어?”
“아직은 우리를 노린 것인지 모르잖아. 거기다 이미 포위를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빠져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해. 상황을 보니까 기녀들 방을 하나하나 조사할 거야. 아무리 무식한 무림인들이지만 우리가 옷을 벗고 같이 누워 있다면 조사하지 못하고 돌아갈 거야. 너도 빨리 벗고 이리 들어와.”
이화도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급히 옷을 벗더니 속옷만 입은 채 미진의 침상으로 올라갔다.
* * *
소화루를 책임지고 있는 춘월은 오십 명은 됨직한 무인들이 소화를 완전히 포위하더니, 곧 십여 명의 무인들이 안으로 들어닥치자 사색이 되어 달려나왔다.
“난 천호방에서 나왔다. 소화루에 수상한 자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조사를 해야 하니 협조해 주기 바란다.”
천호 일대 단주를 맡은 조성박은 춘월을 보며 강압적인 말투로 말했다.
“수상한 자라니요? 지금은 손님도 없습니다. 거의 다 기녀들밖에 없는데 수상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협조를 못 하겠다는 것이냐? 소화루가 오늘 다 부서져도 상관이 없다면 그렇게 해 주마.”
“아, 아, 아닙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시끄러운 소리에 이 층 복도로 나왔던 기녀들은 조성박의 살벌한 말투에 겁을 먹었는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각자의 방으로 급히 들어갔다.
[소군, 조 단주가 너무 겁주는 거 같지 않아? 기녀들도 사실은 불쌍한 사람들인데 좀 친절하게 대하면 좋잖아?]
밖에서 조성박의 외침을 들은 담수련은 뭔가 못마땅한 듯 악불군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담수련의 전음에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못하게 주의를 주겠습니다. 지금은 조 단주에게 뭐라고 한다면 대원들 앞에서 단주의 권위가 떨어질 것입니다.]
담수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따르던 악불군이 그녀의 명을 조금 미루기는 해도 거절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그런 그의 행동이 더욱 기뻤다.
방주로서 수하의 체면까지 생각할 정도로 생각이 깊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생각해 보니까 지금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소군의 말이 맞아.]
누가 말하든 먼저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둘에게는 싸움이란 평생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