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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320화 (320/472)

<천검지애 320화>

320화. 격변(3)

“악 방주님께서 제게 약속하신 한 달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압니다. 그런데 오늘…….”

악불군이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자 적동마수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안타깝지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한창 이들에게 충성을 바칠 때는 잡히면 자결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무림 세력들은 수하들을 하찮게 여기는 곳이 참 많지요. 조금만 실수를 해도 죽이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수하들에게 스스로 자결하게 만드는 것은 가장 비열한 짓이라고 봅니다. 가장 아껴야 할 자기 자신까지 버리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전 그들을 빨리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방주님, 그들은 강하기도 하지만 누가 그들인지 아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지 대협께서 가지고 계신 정보를 제게 줬으면 합니다.”

적동마수가 머뭇거리자 악불군이 부언했다.

“지금 그들이 이미 우리 코앞까지 왔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실기할 위험이 큽니다. 우리에게 대처할 수 있는 정보가 급박한 상황입니다.”

적동마수는 자신을 압박하거나 제압하여 고문할 수도 있음에도 설득하는 악불군의 태도에 믿음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그것을 넘긴다면 저를 천호방에서 받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대협께서 원하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적동마수는 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의 피부를 벌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는 피부를 접어 그 안에 봉투를 넣고 다닌 것이었다.

“기상천외한 방법이군요.”

“제가 익힌 무공 덕분이지요. 저도 이것이 천후의 밀지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천후요?”

“저도 그 밀지를 받을 때 처음 들었습니다. 아마 제가 속한 조직의 수장인 듯합니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악불군은 적동마수가 넘긴 봉투를 받았다.

‘드디어 그들의 진정한 정체가 이 안에 들어 있을 것인가…….’

얻고 싶었던 것을 생각보다 쉽게 받았지만 악불군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밀지는 적동마수가 이미 뜯어 본 듯 열려 있었다.

“안을 보셨습니까?”

“보긴 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밀지를 꺼내 펼쳐 본 악불군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종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문이 가득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밀지 품에 넣으며 다시 물었다.

“전에 그 조직에서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말해주겠다고 하셨는데, 그게 뭡니까?”

“죄송합니다. 큰소리는 쳤지만 사실 저도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우연히 들은 말인데……”

“정확한지 아닌지는 저희가 분석합니다. 듣거나 느낀 것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십시오.”

“그 밀지를 전달하던 내부영주가 구천마성과 시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상당한 부상을 입고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를 사방에 남겼는데, 그것을 제가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밀지를 전달하던 내부영주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녀는 적동마수를 보자 우선 자신을 호위하라고 명했고 곧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하루가 넘게 운기조식을 했지만 그녀는 내상을 고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기다리던 내부영주들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피를 토해 낸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밀지를 적동마수에게 전하며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높은 분들의 밀지이니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무후께서 원하던 세상이 눈앞이거늘 여기서 죽다니 너무 원통하구나.’ 한탄을 하고는 숨을 거뒀다는 것이었다.

“분명 무후께서 원하던 세상이라고 했습니까?”

“죽기 직전, 마치 취한 듯 말한 목소리였지만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일 수석장로님께서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분과 입방에 대해 조율하십시오. 장로급으로 지위를 준비하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자, 장로입니까?”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분인데 그 정도의 대우는 충분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적동마수는 그대로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 * *

“이 밤중에 찾아온 것을 보니 생각을 많이 한 모양이구나?”

추국이 아혈을 풀어 주자, 차성령은 담수련에게 회심의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듣자 듣자 하니까 입이 너무 거칠구나! 아가씨께 예의를 지켜라!”

매향은 차성령의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녀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차성령의 말에 담수련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신이야말로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 애들은 나에게 자매 같은 애들이다. 당신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나 역시 똑같이 대해 줄 수밖에 없지. 이제부터 내게 공손한 말투를 보이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배려해 줄 수 없다.”

갑자기 달라진 담수련의 말투와 눈빛에, 차성령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화가 담수련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배려 따위는 원하지 않으니 마음대로 해라.”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에 대한 기대는 이제 덮도록 하겠다. 추국 다시 점혈해. 그리고 내일 감찰당으로 넘겨. 더 이상 대우는 시간 낭비일 것 같다.”

“알겠습니다.”

추국이 신난다는 듯 아혈을 짚으려 하자 오히려 다급해진 것은 차성령이었다.

“잠깐, 내가 한 얘기는 생각해 보았느냐?”

“저 말투 듣기 싫다.”

담수련의 차가운 말에 추국은 그대로 아혈을 짚었다.

“당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이제 알게 될 거야.”

눈동자를 굴리는 차성령을 보며 한마디 남긴 담수련은 그대로 나가 버렸다.

자신이 모욕당하는 것은 쉽게 넘겨 버릴 수 있지만,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 모욕받는 것은 참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렇게 다시 어두워진 방 안에 꼼짝 못 하고 남겨진 차성령의 표정은 후회로 일그러졌다.

* * *

보름달이 휘영청 밝히는 거대한 황야.

수십 개의 화톳불이 사위를 밝히는 커다란 군막 주위로 천 명은 됨직한 무인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군막 앞 높은 연단에 올라선 한 노인이 언월도를 받아들더니 하늘을 향해 언월도를 내리쳤다.

엄청난 위력의 도강이 공중을 가르는 듯싶더니 커다란 만월이 그대로 반쪽이 났다.

강렬한 도기가 공간을 완전히 자르면서 마치 달이 갈라진 듯한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순간 황야의 모든 무인들은 탄성의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

언월도를 수하에게 다시 넘긴 노인은 커다랗게 외쳤다.

“우리 태양천은 위대하신 영웅 칭기즈 칸을 도와 천하를 정복했다. 헌데 지금 태양의 전사들끼리 내분을 일으키고 원나라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다. 본 천주는 태양천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인내를 하며 기다렸지만, 더 이상 기다리기에는 우리의 상황이 너무 위험하다. 여기 모인 너희들은 나와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

“되어 있습니다!”

천 명이 넘는 무인들의 입에서 마치 한 사람이 외치듯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다시 천하에 태양천을 거역한 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알려 줄 것이다!”

“와아! 모두 죽이자!”

“태양천에 거역하는 자에게 죽음을!”

열광의 도가니로 변한 황야를 뒤로하며 노인은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전왕들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느냐?”

“족장들이 황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며 떨어져 나갔습니다. 올 리가 없습니다.”

하북까지 잃고 몽고로 밀린 원나라는 서달이 이끄는 명나라군의 공격을 계속 받고 있는 와중에 황제 계승에 불만을 품은 부족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내우외환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지금 대공을 따르는 전왕들은 겨우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침통한 표정을 지은 대공은 허리를 굽히고 있는 한 무인에게 다가더니 그의 손에 어깨를 올리며 말했다.

“철장표.”

“예! 천주님.”

“철무정이 다음 대 태양천의 천주가 되기 위해서는 철룡세가의 힘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천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철룡세가의 모든 목숨까지 바칠 것입니다.”

“너를 철 전왕으로 임명할 것이니 칭기즈 칸의 직계 자손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도록 해라.”

“견마지로를 다할 것입니다.”

흡족한 듯 미소를 지은 대공은 태 전왕을 보며 물었다.

“금령군주는 아직 연락이 안 되고 있느냐?”

“저희가 보낸 연락은 받는 것 같은데 답을 주지 않습니다. 설마 금령군주까지 배신한 것은 아니겠지요?”

금령군주는 자신이 악불군에게서 천륭검보를 찾아오겠다고 스스로 지원을 했었다. 그리고 그는 허락을 했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가 보인 행동은 의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철무정은 아직도 금령군주와 같이 있느냐?”

“예. 천주님의 명령대로 소천주께 권한을 더 부여했습니다.”

“그럼 철무정이라도 연락해야 하지 않느냐?”

“권한을 주기는 했지만, 소천주께서 부릴 수 있는 수하들이 없습니다.”

“율 전왕.”

“예!”

“철 전왕과 의논해서, 소천주에게 금령군주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태양전사들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야 전왕.”

“예.”

“혈교와는 어떻게 됐나?”

“아직 답이 없습니다. 그들도 갑작스러운 제안인지라 고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혈교의 교주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느냐?”

“사대마종이 중원을 사등분해서 암약하는 것은 알아냈지만, 교주는 누구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대공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토록 완벽하게 정체를 감출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을까?

“이번 협력 건이 성사된다면 혈교에게 중원 반을 넘긴다고 해라.”

“대공 그것은 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이 예전과 같다고 생각하느냐? 중원의 반을 주더라도 혈교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다시 접촉해 보겠습니다.”

내분으로 정신없던 태양천을 간신히 다시 정리하는 데 성공한 그였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결국 삼분지 이나 되는 전력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만약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사부님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겠지.’

* * *

“해석이 가능하겠습니까?”

악불군에게 밀지를 전해 받은 담수련은 비문들을 뚫어지게 보더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방식을 사용한 것 같아. 하지만 무조건 해석해 내야지 뭐.”

담수련의 여러 취미 중 하나가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어 한 것이 비문이나 기호를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부영주를 감찰당으로 넘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응, 스스로 벌주를 원하니 들어주려고.”

“또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것은 아니십니까?”

“그런 것 같아?”

“아가씨답지 않은 결정을 하셔서요.”

“위지 대협이 말하길, 신비 조직이 원하는 것이 무후가 원하는 세상이라고 했지?”

“예.”

“그 여자가 내게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어. 무후라는 것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천후의 밀지라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보아 이들의 지도자들은 후(后)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후(武后)는 현존하는 인물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봐. 한마디로 무후의 유지를 이어받는다, 이건데……. 왜 남자들을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무후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남자들이 가장 큰 방해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도 맞기는 하지만, 단합을 위해 그러는 것인지도 몰라.”

“절대적인 적을 만들어 조직을 강화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입니까?”

“이들은 종교 집단이 아니야. 그럼에도 이렇게 긴 세월 비밀이 엄수되고 세력까지 확장하기 위해서는 모두를 묶어 놓을 수 있는 강렬한 동기가 필요하다고 봐. 내 짐작이 맞다면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수하들을 세뇌하고 있는 것 같아.”

“세뇌요?”

“남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여인들에게 적대감을 불어 넣으려면 어려서부터 세뇌를 시키는 것이 가장 확실하잖아.”

“어쩌면 그녀들도 불쌍한 희생자일 수도 있겠군요?”

악불군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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