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321화 (321/472)

<천검지애 321화>

321화. 의혹(1)

“맞아, 자결한 여인들도 희생자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고 봐.”

담수련은 상당히 냉정하게 사안을 판단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모르고 저지른 죄도 죄는 죄지요. 그런데 그동안 모은 정보를 모두 종합해 본다면, 간세의 실체를 알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천호방에 있는 간부들도 모두 주위에 여인이 한두 명은 있었다. 제자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으며 딸일 수도 있었다.

심지어 식사 준비하는 주방의 여인들, 친우들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만나는 기녀들까지 모두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조직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간세인지도 몰랐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내가 소군에게 속닥거리며 뭔가를 부탁하면 소군은 어떻게 하겠어?”

“당연히 들어드리겠지요.”

“자신이 믿는 여인이 모르는 척 슬쩍 뭔가를 묻는다면, 아마 많은 남자들이 비밀을 말할 거야. 즉, 소군에게 충성하는 와중에, 스스로 반역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

악불군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담수련이 만약 간세라는 가정을 한다면 그가 어떤 자세를 취할까?

자신조차 확답할 수 없을 만큼, 남자들이 여인으로 인해 조직을 배신하는 상황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저희만으로 대비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탕마회 어르신들과 의논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조금씩 실체에 다가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아직까지는 우리의 추측이야.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가 오히려 어려워질 수 있어. 각 문파에 자신의 어머니, 아내, 딸을 의심하라고 한다면 뭐라고 할까? 아마 우리를 미친놈 취급할걸?”

“하긴 그렇겠군요.”

“우선 이 비문부터 해석하고 생각해 보자. 여기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때 흑석영의 전음이 들려왔다.

[주군, 마 당주가 급히 만나 뵙고 싶다고 합니다.]

“오라고 해.”

[예!]

잠시 후, 마진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특급 살수인 그가 이렇게 허둥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벌어졌음을 시사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걸 한번 보십시오.”

마진우가 내미는 서찰을 보자 악불군은 담수련을 슬쩍 쳐다보았다.

“또 누가 던져 놓고 간 것입니까?”

“예, 어떤 놈인지 간덩이가 부은 놈이 감히 외당 집무실 앞에 놓고 사라졌습니다. 지금 총단 전체에 비상을 걸고 내당 수하들이 샅샅이 조사하고 있습니다.”

“읽어 보셨습니까?”

“예,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혈교에 대해 아주 자세한 정보가 적혀 있었습니다.”

“정말 재미있네? 한쪽은 신비 조직에 대해 정보를 보내고, 또 한쪽은 혈교에 대한 정보를 보내고.”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다 시기상으로 거의 동시라고 봐도 될 정도 아닙니까?”

먼저 서찰을 죽 읽은 악불군은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담수련에게 건넸다.

“마 당주님.”

“예, 군사님.”

“이 서찰을 놓고 사라진 자를 찾되, 잡지는 마세요.”

“그게 무슨?”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나가 보겠습니다.”

마진우가 사라지자 서찰을 찬찬히 읽기 시작한 담수련이,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군 생각은 누가 보낸 것 같아?”

“혈교에서 신비 조직에 대한 정보를 보냈으니, 이번에는 신비 조직에서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 생각하고 같네. 그럼 왜 보냈을까?”

“차도살인(借刀殺人)을 노린 것 같습니다.”

“그래, 차도살인지계야. 똑같은 놈들이 하는 짓까지 똑같네. 그런데 동시에 같은 계획을 세웠다고 하기에는 정보의 양이 너무 방대해. 오래전부터 서로 계획을 세운 것이 분명해.”

“이들이 저희에게만 이런 것을 보냈을까요?”

“확실치는 않지만 다른 곳에도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아무래도 혈교와 신비 조직을 없애지 않는다면 천하에 평화는 오기 어려울 것 같군요.”

악불군이 뭔가 결정한 듯 말하자 담수련이 받았다.

“그래, 이들이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언제나 위험을 감수하며 지내야 해. 하지만 정면으로 싸우려 하면 피해가 너무 클 거야.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희도 세력을 이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분(二分)? 지금 전력을 다해도 그들을 상대하기 어려운데, 둘로 나누기까지 하면 너무 전력이 약화하지 않을까?”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제거할 특별 무력대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와 백인막의 십 호 그리고 무림사기만으로 그들을 은밀하게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은밀하게 공격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이 준 정보를 이용해서 오히려 그들이 싸우도록 반전을 꾀한다는 말이네?”

“최소한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된다면 대단히 큰 효과를 볼 것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이 계획의 핵심은 악불군이 직접 적의 중심지로 뛰어드는 것인데, 그녀는 그게 싫었다.

“우선 이 밀지를 해석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자.”

“만약 이 정보를 받은 세력에서 혈교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다들 머리가 있을 텐데, 정보를 보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까? 만약 공격하는 세력이 있다면 정말 미련한 거지.”

무엇보다 그녀가 만난 제갈우명이나 만통광심은 절대 쉽게 움직일 사람들이 아니었다.

* * *

“천호무적검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자들이 전서만 날리고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죽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악뇌사심의 보고에 혈마종은 고개를 갸웃했다.

“형패가 직접 갔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 형패가 갔습니다.”

“내가 알기로 형패는 경험도 많고 대단히 신중하다고 했는데, 가자마자 죽었다는 말이냐?”

“사라지기 전, 천호무적검의 무공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으니 원군이 필요하다는 전서를 보내왔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혈마종은 뭔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서를 보내고 사라졌다? 설마 전서를 추격하는 방법은 없겠지?”

“매를 이용해 추격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전서가 여러 곳을 거쳐 왔기 때문에 추격은 불가능합니다. 조사단을 보내야 할까요?”

혈마종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천호무적검 그놈에게 죽은 수하들이 한둘이 아니다. 더 피해를 입는다면 세력 싸움에서 밀릴 수 있다. 어쨌든 이놈이 절강성으로 돌아갔으니, 이제 천마종이 알아서 하게 놔둔다.”

“교주님께서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이미 아수마종이 점수가 좀 깎였으니 나도 좀 깎이지, 뭐.”

혈마종은 혈우대마종에게 실망을 주더라도 자신의 전력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미 적설에 의해 혈마전의 위치가 악불군에게 발각되었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 * *

‘천호방이 신생 문파라고 들었는데 이 정도의 경계를 펼친다……?’

천호방 총단이 보이는 주루 창문에 앉은 백리옥빙은, 생각 외로 천호방의 경계가 매우 철두철미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무림 세력들이 낭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무공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실지로 문파의 하급 무사들 중에는 낭인들보다 약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낭인들은 거칠고 충성도가 약했다. 당연히 윗사람에게 대들거나 도망을 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특히 협동하는 생활에 적응을 못 해서, 절도 있고 일사불란한 조직 생활에 큰 하자가 있었다.

천호방 방도들이 대부분 낭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무림인들 중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본 천호방은 명문 대파 못지않았다.

[검후님, 운반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수법이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때 백리옥빙의 귀에 양미려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직 흔적을 전혀 못 찾았다는 것이냐?]

[아무리 추적의 대가라 할지라도 삼십 대가 넘는 우마차를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진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이라면 너도 일가견이 있지 않느냐?]

[제가 눈치조차 못 챘다면, 제 실력보다 월등히 뛰어난 자일 겁니다.]

[그 정도의 진의 대가라면 제갈세가밖에 없지 않느냐?]

[제갈세가의 진이라면 제가 파훼는 못한다 해도 흔적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염상들이 작전을 시작하는 날이 언제지?]

[오 일 남았습니다.]

백리옥빙의 아미가 살짝 좁혀졌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염전들은 그동안 계속된 전쟁과 황조가 바뀌는 급격한 변화로 인해 소금의 산출량이 대폭 감소했다. 소금값이 오를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이 염상들은 벌써 새로 온 관리들까지 뇌물로 구워삶아 놓은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돈을 쓸어담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이익을 창출할 소금이 모조리 사라졌으니 비상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백리옥빙이 이곳까지 온 이유도 소금을 강탈한 자들의 흔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천호방이 범인이라면 그 많은 소금을 어디에 두었을까?’

백리옥빙은 소금을 강탈한 범인이 천호방이라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검후님, 흑염회에서 좀 의심스러운 정보를 받았습니다.]

[뭐냐?]

[절강성 성주의 명으로 군부에서 염상들의 비밀 창고를 급습해, 비축해 둔 소금을 모두 압수해 갔다고 합니다.]

[뭐야? 언제?]

[이틀 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압수한 소금을 천호상단에게 판매하라고 넘겼다고 합니다.]

순간 백리옥빙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소금을 강탈한 세력이 천호방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그녀는 강탈한 소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소금은 돈과는 달라, 시중에 판매하지 않는다면 보관료만 들어가는 애물단지가 된다. 그러나 강탈한 막대한 양의 소금을 판매한다면 누구의 짓인지 즉각 알 수 있었다.

‘압수한 소금과 함께 판매하면서 양을 잘 조절한다면 강탈한 소금을 파는지, 압수한 소금을 파는지 눈치채지 못할 수 있어. 이건 갑자기 나온 행동이 아니라 잘 짜인 각본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야.’

백리옥빙은 싸늘하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천호상단의 창고가 어디인지 알아 와라.]

* * *

천호방 방주 집무실.

악불군의 좌우로 열 명의 간부들이 앉아 있었다.

추명혼과 흑석영을 비롯한 호법 다섯 명과 고철황과 무림사기를 비롯한 장로 다섯 명이었다.

현 천호방의 최고 실세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회의에는 빠지지 않는 담수련이 보이지 않았다.

“방주님, 만약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경천동지할 일이 아닙니까?”

고철황은 아직도 놀라움이 가시지 않는지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혈교가 보낸 신비 조직의 정보와, 신비 조직에서 보낸 혈교의 정보를 담은 종이들이 놓여 있었다.

더 이상 둘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벅차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경천동지할 일이지요. 저도 처음 이들의 실체를 듣고서 믿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가 이 정보를 공유하는 이유는 확실하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여기 정보가 사실이라면 본 방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추명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인막의 막주였던 그는 상대를 가늠하는 판단이 아주 빨랐다.

그 판단을 잘못하는 순간 십 년 넘게 공들여 키운 살수를 잃는 것은 물론 청부의 실패에 대한 배상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 이들을 각개격파하는 방법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각개격파라면 어떤 방법을 말하시는지요?”

동정어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인막에서 사용하던 방식을 사용할까 합니다.”

“살수행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적들의 지휘부를 암살할 수 있다면 혼란과 공포를 동시에 심어 줄 수 있으니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적동마수 같은 고수가 저항조차 못할 정도로 강한 고수들을 암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할 생각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