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22화>
322화. 의혹(2)
“방주님은 천호방의 지존이자 무림 십왕에 봉해지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정파를 표방하고 계시기에, 직접 살수행을 하셨단 사실이 알려지면 명성에 큰 누가 될 것입니다. 방주님의 뜻이라도 전 반대하고 싶습니다.”
고철황이 천부당만부당한 생각이라는 듯 즉시 반대를 했다.
고철황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이 여기에 없는 이유 역시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탐탁지 않아 해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담 군사님도 반대하시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태상호법의 말대로 이들과 정면 대결을 한다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어쩌면 천호방이 아예 멸문할 수도 있겠지요.”
회의에서 거의 말이 없던 흑석영이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이 가장 피해를 줄일 수 있다면, 방주님은 빠지시고 저희가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초특급 살수라는 명성을 지닌 호법들의 능력을 무시해서 제가 직접 하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전 솔직히 여기 있는 분 누구의 희생도 원치 않습니다.”
“방주님께서 저희를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방주님께서 위험한 계획을 직접 하시겠다고 하면 저희라고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우선 저희들에게 한번 맡겨 주십시오.”
흑석영의 간절한 말에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흑 호법과 태상호법께서 같이할 살수 이십 명을 선발하여 저를 암살하십시오.”
“예?”
둘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시간은 열흘입니다. 장소와 시간은 불문할 것이니, 언제든지 기회다 싶으면 공격하십시오. 제 옷깃에 무기가 닿기만 한다면 허락하겠습니다.”
어찌 보면 무림 최고의 살수 집단이었던 백인막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추명혼과 흑석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악불군의 의도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밖에서 마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주님, 보타검각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천호상단의 창고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약간 다급한 목소리에, 이미 천호상단에 도착했을 수도 있음을 느낀 악불군은 몸을 일으켰다.
“제가 천호상단에 다녀온 후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 * *
천호상단의 정문이 보이는 주루로 자리를 옮긴 백리옥빙은 정문을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일꾼들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얼굴이 밝다?’
일꾼들은 가장 하층에 속하는 생활을 하는 자들로, 대부분 고생으로 얼굴이 찌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전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천하의 양민들은 모두 힘든 시기를 보냈고 지금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천호상단 같이 무림 세력에 속해 있는 상단의 일꾼들은 실수할 경우가 죽을 수도 있기에 대부분 불안으로 얼굴이 경직되어 있기 일쑤였다.
그런데 천호상단의 일꾼들은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검후님, 정문 앞의 흙을 조사해 본 결과 상당량의 소금이 천호상단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는 분석입니다.]
백리옥빙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쳐들어가 창고를 뒤지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창고에 있는 소금이 압수한 것인지 강탈한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새하얀 백설을 탄 담수련이 악불군과 사화의 호위를 받으며 천호상단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보타검각에 나타났을 때 역용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는 면사를 썼지만, 담수련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즉각 알 수 있었다.
‘이미 절강에서는 패자로 군림하는 자가 대놓고 저런 행동을 한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백리옥빙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 문파인 보타검각에서도 위계 조직은 엄격했다. 수하가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간부의 앞에 서는 경우는 호위할 때뿐이었다.
무공도 약한 담수련이 악불군을 호위할 리는 없었다. 거기다 담수련과 이야기를 나누는 악불군의 표정 역시 그녀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그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악불군의 표정과 행동은 그녀가 배워 온 남자에 대한 교육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유 모를 감정의 파동에 흔들리는 모습을 잠시 보였던 그녀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악불군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에게 시선을 보낸 것이다.
* * *
“생각 외로 거물이 나왔는데요?”
백리옥빙과 눈이 마주치자 모른 척 고개를 돌린 악불군은 약간 놀란 듯 말했다.
“누가 왔어?”
“저희와 인사했던 검후란 여인입니다.”
“내가 따라오기를 잘했네.”
보타검각에서 나온 여인이 천호상단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담수련은 악불군에게 자신도 가겠다고 했다.
적동마수와 내부영주란 여인을 통해 신비 조직에 속한 여인들의 성향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담수련은, 보타검각에서 나온 여인과 대화해 봐야겠다는 판단한 것이다.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아직 모호한 보타검각과 신비 조직 간의 연관성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저 여인은 대단히 지위가 높아 보였는데 직접 나온 것을 보면, 보타검각이 소금을 통해 재정을 마련하고 있다는 아가씨의 추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담수련은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내렸다.
“올라가자.”
“너희는 상단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
담수련을 따라 말에서 내린 악불군은 사화에게 이르고는 주루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악불군이 나타난 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던 일과 걸음까지 멈추고 모두 경의를 표하듯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지금 악불군이 절강에서 얼마나 큰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 *
[검후님, 올라오고 있는데 막을까요?]
[놔둬, 그리고 너희들이 막을 수 있는 상대도 아니야.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너희는 절대 나서지 마라.]
[알겠습니다.]
전음이 끝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담수련과 악불군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리옥빙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보타검각에서는 속세로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검후께서 여기까지 나오시다니 뜻밖입니다.”
악불군이 포권을 하자 백리옥빙은 앉은 채로 건성으로 포권을 하며 물었다.
“저를 감시하셨나 보군요?”
“백리 소저께서는 우리가 별로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담수련은 슬쩍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건네며 앞에 앉았다.
“전 소저라는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검후라고 불러 주세요.”
백리옥빙은 차갑게 담수련의 말을 잘랐다.
“소저란 말은 여인들에게 하는 호칭일 뿐인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시네요?”
“소저는 여인들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자각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예요. 그런 일반화된 호칭을 원하지 않는 것뿐이지요.”
담수련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내부영주라는 여인과 달리 직설적이지 않게 순화된 단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타검각에서 소금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높을 줄은 몰랐네요?”
담수련은 살짝 화제를 돌렸다. 너무 집요하게 말꼬리를 잡는다면 그녀가 눈치채고 조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언제 소금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했던가요?”
담수련의 이어지는 질문에 백리옥빙이 아주 불쾌하다는 듯 받았다.
“지금 이 근처에서는 소금 강탈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럽답니다. 그래서 검후께서도 그 일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닌가 해서 말한 것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나오신 것이 아니라면 다행이네요.”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를 저는 모르겠군요?”
“천호방에서 조사를 했는데 범인들의 무공이 대단히 높다는군요. 검후께서 그 일로 범인들을 만나 다치시기라도 한다면, 절강의 패자인 천호방으로서는 보타검각을 뵐 면목이 없어지겠지요?”
“감히 나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자부심이네? 하긴, 소군도 엄청난 고수인 것 같다고 하긴 했지.’
“대단한 자신감이시네요. 그럼 이곳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여기 온 이유까지 말해야 한다는 건가요?”
“항주는 천호방의 총단이 있는 곳이고, 앞에 보이는 천호상단은 천호방에서 직접 운영하는 상단이에요. 검후께서 이곳을 우연히 왔다고는 믿기지 않아서 드린 말이에요. 만약 진짜 우연이라면 우연이 맞겠지요.”
백리옥빙은 그 말에 화가 난 듯 담수련의 얼굴을 가린 천년잠사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 쳐다보며 말했다.
“말투가 좀 비꼬는 것 같군요? 전 성격이 아주 못됐어요. 자꾸 그런 식의 말투를 계속하면 제가 화날 수도 있습니다.”
“정말 너무 날카로우신 것 같아요. 전 단지 친해지고 싶어 그냥 한 말인데.”
백리옥빙은 담수련의 눈에 웃음이 가득한 것을 보자 짜증스럽게 말했다.
“더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만하고 싶군요. 같은 여자로서 한마디 한다면,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그런 미소는 제 앞에서 짓지 마세요.”
“왜 제가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미소를 짓는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순응하도록 키워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지도 자각을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후일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제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겁니다.”
담수련의 눈에 웃음이 사라졌다.
‘보타검각, 신비의 조직과 연관이 있어. 아니 연관이 아니라 어쩌면 신비의 조직 그 자체일지도 몰라.’
백리옥빙의 말에 담수련은 추측이 아닌 확신을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천호상단 구경이라도 좀 하시고 가시겠어요? 다른 것은 거대 상단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창고만은 상당히 크게 만들었답니다.”
백리옥빙의 눈이 꿈틀했다.
담수련의 말은 절강에서 패권을 노리지는 않으나 이미 성지로 일컬어질 정도로 뿌리 깊은 보타검각의 고수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왜 하필 창고에 대해 강조한단 말인가…….
‘이 계집, 이미 내가 온 이유를 눈치챘어.’
백리옥빙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구경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초청의 주체가 마음에 안 드네요. 최소한 방주께서 조심스럽게 부탁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백리옥빙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악불군을 보며 반문했다.
“제가 원래 여인들과는 대화를 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탁을 하는 형식이 중요하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주께서 직접 부탁하시는데 거절한다면 예의가 아니겠지요? 그래요, 온 김에 잘 만들어졌다는 창고를 한번 구경하고 가야겠군요.”
“역시 호탕하시네요.”
백리옥빙이 쇠뿔도 단숨에 빼자는 듯 몸을 일으키자, 담수련은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같이 오신 분들인 모양인데, 같이 들어가셔도 됩니다.”
이어지는 악불군의 말에 벡리옥빙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에 제 동행이 있다는 말인가요?”
“제가 느끼기에 이 주루 안에만 최소한 네 명의 무인이 검후를 호위하고 있군요. 거기다 밖에 있는 분들까지 합치면 최소한 서른 명은 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역시 대단하시군요. 이렇게 만나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왕 만난 김에 검각에서 끝내지 못했던 비무를 이번 기회에 끝내는 것은 어떻겠어요?”
“뭐, 저야 상관없습니다.”
태연하다 못해 너무 흔쾌하다는 느낌까지 주자, 백리옥빙의 표정에서 잘 벼른 검을 보듯 강력한 검기가 나타났다.
‘검을 생각하자마자 몸 전체에서 검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최소한 현경의 경지야.’
이미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경지가 그의 예상을 뛰어넘자 악불군의 얼굴에 살짝 긴장이 나타났다.
만약 그녀가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담수련을 노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무공으로도 완벽하게 막아 내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어떤 일이든 거기에 맞는 예의를 갖추는 것은 무림인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검후께서도 잘못된 판단으로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드는 일은 삼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정중했지만, 함부로 까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확실한 경고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