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24화>
324화. 검후(2)
‘벽월수라천라검기를 정면으로 모두 받아쳐? 천륭검보의 무공이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태연하게 자신의 검기를 모두 받아 내는 악불군을 보며 백리옥빙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했다.
단순히 무공만 따진다면, 그녀가 성후보다도 강했다. 실지로 그녀는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해서 무황과도 견줄 만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물며 자신과 비슷한 나이를 가진 악불군 정도는 언제라도 패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하시죠? 정파를 표방하는 두 분께서 여기서 싸운다면, 천하는 보타검각이나 천호방을 비웃을 거예요.”
담수련의 외침에 백리옥빙은 입술을 잘근 씹더니 공력을 거두었다.
“천호방주의 무공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네요. 담 군사 말대로 여기서 이러는 것은 볼썽사나우니, 다음에 정식으로 한번 비무를 하는 게 어떻겠어요?”
“정식으로 요청을 하시면 제가 시간을 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악불군이 의연하게 답하자 담수련이 다시 끼어들었다.
“오늘 제가 검후께 무례를 저질렀다면 사과드리지요. 제가 오늘 창고를 보여드린 이유는 앞으로 천호방을 조사하는 행동을 멈춰 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의 있게 말했지만, 더 이상 천호방이나 천호방과 연관이 있는 장소에 어슬렁거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래요. 더 이상 조사할 필요도 없는 것 같네요. 이번에는 그냥 가지요. 하나, 자신들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은 져야 할 거예요.”
* * *
“종산은자 선배는 영웅밀단에서도 가장 은밀하다는 정탐원 소속 아닙니까?”
술 한 잔 들이켠 소걸아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더니 슬쩍 종산은자에 대해 물었다.
“대단하신 분이지. 맹주님께서 직접 불러 치하까지 했을 정도니까.”
“맹주님께서 치하했다면 총단에서 높은 지위를 받으실 수도 있을 텐데,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이제 나이도 들고 하셨으니 좀 쉬셨으면 좋겠는데, 왜 저러고 다니시는지…….”
백룡신권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친하셨던 모양입니다.”
“영웅회 활동을 하던 당시, 내가 많은 도움을 받았다네. 굉장히 판단이 빠르고 치밀하신 분인데, 좀 이상해.”
“어떤 면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데요?”
백룡신권은 잠시 머뭇거렸다. 본인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 얘기를 하는 것은 뒷말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선배께서 그렇게 느꼈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씀해 보세요.”
“절대 딴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되네.”
“제가 소걸아입니다. 제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 아시잖습니까?”
분명 꼴통 짓으로 유명한 소걸아였지만, 막상 친해지면 그만큼 진국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
“내가 소 제야 당연히 믿지.”
“제가 개방의 절강성 특별 천강대장입니다. 저와 이제부터 많은 일을 협력하셔야 하는데, 서로 숨기고 하면 되겠습니까?”
“숨기는 것은 아니고…….”
백룡신권은 그동안 종산은자와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물론 소걸아에게 가진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종산은자 선배님과 천호방주 간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나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래서 이상하다고 한 거네.”
“선배, 이럴 경우에는 양쪽 말을 다 들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양쪽 말? 누구 말인가?”
“천호방주의 말도 들어 보자는 것이지요.”
“내가 어떻게 천호방주를 만나겠나? 그리고 만난다 해도 그런 말을 물어서는 안 되네.”
“왜 안 됩니까?”
“나는 무림맹 소속일세. 내가 무례를 저지르면 무림맹이 천호방을 무시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네.”
“그거야, 다짜고짜 찾아갈 때 얘기고요. 제가 중재를 해 드리겠습니다.”
“소 제가 천호방주와 친분이 있나?”
“선배, 지금 제가 하는 말을 맹에 보고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백룡신권은 대단히 고지식한 인물로 자신의 임무를 사적인 이유로 허술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보고할 걸세.”
“그럼 묻지 말아 주십시오.”
소걸아의 대답에 백룡신권도 쉽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리고 이왕 만나는 김에 종산은자 선배님도 같이 만나면 어떨까요?”
“예전 같으면 나도 그러자고 하겠지만, 지금은 많이 변하셔서 괜찮을지 모르겠네.”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경우는 없다고 사조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변했다면 이유가 있겠지요. 우선 그 이유부터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소 제도 많이 변한 것 같아. 자네가 변한 이유는 뭔가?”
“저요? 하하하! 선배께서는 확실히 사람을 보는 눈이 다르군요. 당연히 많이 변했습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근래에는 저를 보는 사람들마다 제게서 후광 같은 것이 보인다고 하더군요.”
“내가 잘못 생각했구먼. 자네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 * *
“보타검각과 신비 조직 간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해.”
총단으로 돌아온 담수련은, 악불군과 단둘만 남자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믿겠습니까?”
정파인에게 수백 년 동안 정파로 알려져 있고 검의 성지로까지 불리는 보타검각이었다.
그런 곳과 창방한 지 일 년도 채 안 되는 신생 문파인 천호방 중 누구를 믿겠냐고 묻는다면, 보타검각을 믿겠다는 사람이 월등하게 많을 것은 당연지사였다.
“함부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우리만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연관이 있다는 것만 알아낸 것도 소기의 성과라고 생각해. 보타검각은 너무 가까이 있잖아.”
“그리고 천화궁주께서 항주 가까이 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하긴, 늦게 오면 의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천화궁 분타기루에 도착하면 즉각 만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놓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이제 조금씩 단서들이 잡혀 나가니 그나마 다행이야. 그런데 소군.”
“예.”
“검후 말이야. 진짜 싸웠다면 이길 수 있겠어? 내가 보기에 그동안 보았던 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담수련의 무공으로는 백리옥빙의 경지를 알아채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악불군의 말대로 그녀의 눈치는 신경(神境)에 달해 있었다.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녀와 비슷한 공력을 가진 고수들은 몇 명 만나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검공은 정말 특이하더군요. 솔직히 생사결을 한다면 이긴다고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담수련의 얼굴이 확 변했다.
그녀에게 악불군이 다칠 수도 있다는 말은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군, 우리 그냥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가서 숨어서 살까?”
담수련의 걱정 어린 눈을 본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아가씨께서 원하시면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아가씨의 마음이 편치 못하실 겁니다.”
“그래도 난 소군이 다친다는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서워.”
“이긴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제가 다칠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소군은 혼자고, 보타검각은 검후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제게도 저를 돕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아가씨께서 옆에 계시면 전 힘이 배가 됩니다.”
담담하게 전하는 그 말에 감동한 듯, 담수련이 일어나더니 악불군의 뒤로 가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
“아, 아가씨…….”
악불군이 당황한 듯 말하자 그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냥 이대로 잠깐만 있자.”
악불군을 꼭 껴안은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소군, 정말 고마워. 소군이 없었다면 난 아마 살아갈 희망을 오래전에 잃었을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는 담수련의 마음에는 악불군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자신의 목을 꼭 껴안은 담수련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악불군도 그녀의 사랑이 느껴지는 듯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 * *
청월루에 도착한 천화궁주는 새로이 분타주가 된 일선향을 보자 물었다.
“요즘 항주의 상황은 어떠냐?”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일선향이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떤 문제냐?”
“운우루주께서 적동마수를 제거하기 위해 천호방 총단을 침입했다가 실패한 모양입니다.”
천화궁주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은우루주가 미친 것 아니냐? 어딜 마음대로 침입을 한다는 말이냐?”
“……제가 거기까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대노한 천화궁주의 말에 일선향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운우루주는 고위직이었다. 일개 천화궁의 분타주인 그녀가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천미단에서 저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도움을 청해? 이것들이 임무가 다를 경우 절대 연락해서는 안 된다는 궁의 규율을 어기다니!”
천화궁주는 담수련이 자신을 부른 것과 이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궁주님, 은우루주님이 직접 명령을 했다고 하는데 어찌할까요?”
“은우루주건 뭐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고 도와줄 수 없는 일이 있는 거다. 그냥 무시해라.”
“알겠습니다.”
“잠깐!”
“예!”
“부탁한 일이 무엇이었느냐?”
“천호방에 천미단원 십여 명을 잠입시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짜 돌았군. 은우루주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살겠다고 무리수를 쓰는 모양인데, 우리까지 엮일 필요는 없다. 아예 연락을 끊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천화궁주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매우 귀하신 분이니 조심해서 모셔 오너라.”
“예.”
“너는 그만 나가 보거라.”
일선향이 고개를 숙인 채 나가자 곧 한 여인과 청년이 기녀의 안내를 받으며 다가왔다.
악불군과 담수련이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천화궁주가 인사를 하자 담수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궁주님께서 오시지 못하는데 당연히 제가 와야지요.”
“악 방주께서는 갈수록 헌칠해지시는 것 같네요?”
천화궁주의 말에 악불군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자리에 앉자 천화궁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특별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궁주님께 직접 허락은 받아야 하는데 저희가 너무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오시라고 했어요.”
“무슨 허락이신지?”
“천화궁과 천호방간에 연계를 좀 긴밀하게 하고 싶어요.”
“연계요?”
“천화궁의 전서 때문에 연락망은 빠르게 구축이 됐지만, 요새 무림 상황이 매우 다급하게 흐르고 있어요. 그래서 천화궁의 정보가 필요해요.”
“어떤 정보든 아가씨께서 요구하시면 즉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긴급할 때 저희에게 연락하고 다시 궁주님께 연락한다면 너무 시간이 걸려요.”
“그럼 어떻게?”
“천화궁의 분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어요?”
천화궁주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담수련의 요구는 사실 다른 문파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천화궁 같이 정보로 먹고사는 문파에게 분타를 알려 달라는 것은 밑천을 전부 드러내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
천화궁주가 즉답을 하지 못하자 담수련이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지금 무림에…….”
담수련의 말을 듣던 천화궁주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신비 조직에 대한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그런 조직이 정말 있다는 말입니까?”
“궁주님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셨을 거예요. 그들은 감히 본 방의 총단까지 침입했어요. 그리고 지금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감시하고 있어요.”
“그들이 그렇게 신비하게 움직인다면 어떻게 감시를 하십니까?”
“그래서 궁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천화궁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분명 나도 모르는 엄청난 일이 있었어……. 만약 그것을 알아낸다면?’
문창현의 암살로 인해 자신의 위치가 궁에서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공을 세워야 하는 상황에, 담수련의 말은 너무 달콤했다.
“아가씨, 제가 비록 궁주이기는 하지만 분타를 모두 알려 드리는 것은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제가 돌아가서 장로들과 의논할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솔직히 제가 너무 급해서 말씀은 드렸지만, 요구가 너무 무리하다는 것은 압니다. 궁주님께서 단번에 거절하시지 않은 것만도 고마울 정도예요. 의논하시고 연락을 주세요. 단 저희가 급하니 결정은 빨리해 주시기를 바라겠어요.”
“걱정 마십시오. 당장 내려가서 의논한 후 수일 내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오래 여기 머무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 듯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담수련과 악불군이 떠나자 천화궁주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녀가 오라고 했을 때의 불안이 사라진 것이다.
그녀는 청월루의 하늘 높은 곳에서, 적설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