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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326화 (326/472)

<천검지애 326화>

326화. 재회(2)

악불군 정면 삼 장 앞에 선 백리옥빙은 아미를 좁히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따라온 이유가 뭐지요?”

“우리가 검후를 따라간 게 아니라 검후께서 저희를 따라온 것 같은데, 아닙니까?”

“제가 소호에 온 것은 낮이에요. 저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면 악 방주께서 여기에 올 이유가 없지 않나요?”

악불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뭔가 착각을 하시는 모양인데, 제가 따라다닐 정도로 검후께서 중요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도 아닙니다.”

“뭐라고?”

백리옥빙의 얼굴에 얼음이 깔렸다. 태어나서 이런 취급을 당한 적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바르르 떨었지만 공격을 당장 하지는 않았다.

성후가 악불군을 건드리지 말라는 명을 내렸지만, 그녀의 성정상 이런 모욕을 당하고 참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다.

“검후 같이 고귀하신 분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소호의 풍광을 보면서 머리를 식히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악 방주께서는 자신이 대단한 줄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제가 대단하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저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검후야 말로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순간 대로한 백리옥빙의 등에 매여 있던 검이 저절로 빠지더니 그녀의 손에 잡혔다.

그녀의 손에 검이 잡히자,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하고 날카로운 검기가 악불군을 향해 몰려갔다.

투다다다닥!

어느새 천륭검을 뽑아 정면으로 내밀자, 연이어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아직 검이 맞닥뜨리지도 않았음에도 격렬한 검기와 검기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호법들은 끼어들지 마라!]

악불군은 흑석영을 포함한 호법들이 움직이려 하자 전음을 날려 멈추게 했다.

그들이 합세한다면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보타검각에게 명분만 줄 뿐이기 때문이었다.

백리옥빙의 눈 밑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림에는 각 시대를 풍미한 열 명의 고수를 선별해 무림 십대고수라 부르는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천년 무림 역사에서 변하지 않는 열 명의 고금 십대고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활동한 시대는 달랐지만 누구나 인정한 절대 고수들이었다.

이들은 가장 강한 무인들이라기보다는 현 무림의 무공의 기초를 만든 조사들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정파에서는 달마대사가 있었고, 마도에는 천마가 있었다. 마도인 중 명호에 천마가 들어간 자는 수십 명에 달하지만, 천마라는 단 두 자만으로 불리는 자는 그가 유일했다.

그 열 명의 고금 십대고수 중 여인이 한 명 있었다. 벽옥수라선자였다.

여인으로 생사경에 도달한 유일한 무인이었던 그녀의 벽옥수월천라검과 벽옥수월마라강은, 그녀가 활동하신 시기 삼 초를 받아낸 무림인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신비하게 사라진 후 그녀의 무공은 실전이 되어 전설로만 떠도는 무공이 되어 있었다.

백리옥빙이 그녀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악할 노릇인데, 그 무공을 악불군이 태연하게 받아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의 명성은 또 한 단계 높아질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둘이 지금 대결하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천륭검보의 무공이 강하기는 하지만 벽월수월천라검강을 이렇게 쉽게 막아내다니……. 공격을 해도 막아낼 수 있을까?’

백리옥빙은 호승심이 돋았지만 결국 공격은 포기하고 말았다.

악불군을 건드리지 말라는 성후의 명도 걸렸지만, 세 번째 맞닥뜨린 악불군의 무공에 자신감을 좀 잃은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같은 정파끼리 우연히 만난 것을 쫓아다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싸운다면 천하가 조롱거리가 될 겁니다.”

악불군의 말에 백리옥빙의 몸에서 뻗어 나오던 검기가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악 방주 말대로 제가 오해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어차피 검후와 저는 한 번은 서로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후회 없이 싸울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런 식의 만남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검을 거두고는 담수련을 완전 품 안에 안듯이 보호하며 몸을 돌렸다.

순간 백리옥빙은 이해 못 할 섭섭함과 담수련에 대한 분노가 다시 올라오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눈에 악불군에 대한 적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악불군의 보호를 받으며 걸어가던 담수련은 슬쩍 고개를 돌려 백리옥빙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갸웃했다.

“소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검후와 세 번을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어.”

“자신의 무공에 자부심이 강한 여인입니다. 제가 무림 십왕이 된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나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은 해. 그런데 겉으로는 분명 태도가 거칠어지는데, 소군에 대한 적대감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백리옥빙은 보타산에서 처음 만날 때부터 매우 도전적이었지만, 많은 무림인들이 처음에 기세를 잡기위해 그런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이 이상하게 느낀 것은, 처음 만났음에도 살기를 보일 정도로 강력한 적대감을 보인 태도였다.

그는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 하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천호상단에서 만났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도전적인 말투로 강탈의 범인이 아니냐며 압박까지 했지만, 그에 대한 적대감이 현저히 줄어든 것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일촉즉발의 상황에 갈 정도로 긴박한 상황까지 갔음에도 전혀 살기를 느낄 수 없었다.

“아가씨 말씀을 들으니까 좀 이상하긴 하네요.”

“내가 느낀 검후의 성정은 매우 강해. 방금 전 같은 상황에서 스스로 먼저 기를 멈춘 것도 매우 특이한 거야.”

“아직 우리와 싸울 생각은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좀 기분이 이상해.”

말하며 다시 고개를 돌린 담수련은 이미 백리옥빙이 사라진 것을 보자 괜한 불안감이 올라왔다.

남자에게는 없는 여인 특유의 촉이 발동한 것이었다.

* * *

촛불을 켜고 학방에 앉아 무엇인가를 보고 있던 오익선은, 손님이 들어서자 읽던 것을 급히 품에 넣고는 말했다.

“시간이 늦어 문 닫았습니다. 내일 다시 오십시오.”

“접니다. 전기수.”

오익선은 전기수를 보자 인상을 쓰며 말했다.

“지금 시간에 이곳에 오면 안 된다고 했거늘, 왜 온 것이냐?”

“제가 왕흑과 함께 중앙로를 걷고 있는데, 천호무적검과 천상신녀로 보이는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정말이냐?”

“예, 제가 포구에서 봤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이 시간에 나온 적이 없었지 않느냐?”

“예, 저희가 알기로는 처음입니다.”

“누구를 만났는지는 알아냈느냐?”

“소호로 가서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여자? 정체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난 것도 길어야 일각 정도였습니다.”

대화하던 오익선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듯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들 실력으로 중앙로에서 소호까지 미행을 했는데 천호무적검에게 안 걸렸느냐?”

“백 장 이상 거리를 두고 따라다녔습니다. 다행히 천호무적검과 천상신녀가 흑백의 말을 타고 다녀서 미행하기가 수월했습니다.”

“왕흑과 같이 다녔으면 왜 너만 온 것이냐?”

“왕흑은 아직 천호무적검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전 중간보고를 위해……”

“보고는 다음에 다시 하고, 이만 나가거라. 그리고 나간 후에 천천히 창기루로 가거라.”

전기수는 오익선의 말에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는 듯 목례를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오익선은 벽에서 작은 통을 빼더니 눈을 댔다. 그러자 전기수가 술을 먹은 듯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반각가량 밖의 동정을 살피던 오익선은, 미행은 없었다고 판단한 듯 통을 눈에서 떼고는 다시 벽 사이 집어넣었다.

[대화는 들었느냐?]

[원체 작게 말해서 들을 수 없었습니다.]

[작게 말했다는 것은 비밀 얘기를 했다는 말이지. 총단에서 이렇게 가까운 데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

오익선의 바람과는 달리 이미 학방의 주위는 최욱걸이 이끄는 천호특수단이 포위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아직 방주님께 보고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절대 모습을 보이지 말고 감시하다가 드나드는 놈들은 모조리 조사해라.]

[알겠습니다.]

최욱걸은 학방을 비릿한 미소를 띠며 보더니 몸을 날려 사라졌다.

* * *

“일개 하부 조직이 감히, 내가 부탁한다고까지 했는데 답도 없다는 것이냐?”

운우루주가 대로한 듯 소리치자 천미단주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답이 없다는 것은 거절입니다. 그리고 강압적으로 명령할 수도 없습니다. 저희도 더 이상 도움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단원을 빌려주면 천화궁 도움 없이 내가 알아서 해 보겠다.”

“천화궁에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적동마수나 내부영주를 찾기 전에 전멸합니다. 루주님께서도 차 영주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이곳에서 차 영주보다 강한 사람은 저와 루주님밖에 없습니다.”

운우루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운우루에 연락을 했지만, 그들이 오려면 최소한 열흘은 걸릴 것이었다. 이미 삼 일 넘게 허송세월을 보낸 상황에서 열흘을 더 기다린다면 구출하거나 제거한다 해도 너무 늦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운우루주는 천미단주를 노려보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번 일 처리를 끝내면 내 반드시 네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운우루주가 나가자 천미단주는 급히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고선!”

“예! 단주님.”

“이걸 당장 전서로 보내거라.”

고선은 천미단주가 전해준 종이를 받더니 급히 달려 나갔다. 종이에 급(急)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우루주, 넌 이제 끝났어. 천화궁주가 얼마나 똑똑한데…….’

천화궁 하부 조직에서 답을 안 한다는 것은 천화궁주의 명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리고 그녀가 답을 보내지 말라고 결정했다는 것은 운우루주를 포기했다는 말이었다.

천하를 분열과 이간으로 혼란에 빠뜨려온 신비 조직에서도 분열은 피할 수 없는 듯했다.

* * *

“아가씨, 그냥 오지 않아도 됐는데 그랬습니다.”

백리옥빙 때문에 기분을 망친 담수련은 소호의 구경을 멈추고 다시 총단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런데 담수련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오늘 보니까 내가 너무 철이 없었던 것 같아. 아직은 편하게 구경이나 하고 다닐 상황이 아닌 것 같아.”

“항주는 천호방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제가 소리 한 번만 쳤으면 최소한 백 명은 당장 달려왔을 겁니다.”

“보타검각에서 항주로 오는데 반나절밖에 안 걸려. 언제라도 그들이 우리의 뒤통수를 치려고 한다면 우리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보타검각을 우리가 먼저 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보타검각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더욱이 보타산을 감싸고 있는 진을 파훼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맞아! 보타검각에서는 그 진을 믿고 경계가 허술할 거야.”

“아가씨, 설마 보타검각을 칠 생각이십니까?”

“이제부터 칠 방법을 찾아보려고.”

담수련은 방 내에 있는 간세들과 절강에서 암약하는 적들의 비밀조직 그리고 보타검각을 제거하지 않고는 천호방의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천호방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당할 거야. 그래서 소군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연합체를 만들 생각이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말은 무림맹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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