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29화>
329화. 백룡신군(1)
“소 제, 아무래도 이건 너무 무례한 짓 같네. 최소한 배첩이라도 보내고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소걸아의 말에 악불군을 직접 만나 보기로 결정한 백룡신권은, 막상 천호방의 정문에 도착하자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무림 명문가인 황보세가의 자손인 그에게 예의는 매우 중요했다.
“아이고, 참!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분명 오늘 만남은 서로에게 유익한 시간이 될 게 분명합니다.”
“아니, 내가 무슨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악 방주를 만나서 뭐라고 한단 말인가?”
“악 방주 당신 정체가 뭡니까,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시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악 방주는 무림 십왕에 봉해진 사람이야. 나 정도가 그런 무례를 저지를 상대가 아니란 말이네.”
“지금까지 한 말 또 하게 하실 겁니까? 지금은 공적인 만남이 아니라 제 친구를 만나러 가는 사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하시라니까요.”
“악 방주와 소 제가 친구인 것은 분명하지?”
“그렇다니까요!”
“……알았네, 들어가세. 그런데 오늘 경계가 좀 삼엄한 것 같지 않아?”
“이제 새벽이 지나가니까 그런 거겠지요.”
무림인들은 가장 깊은 밤인 삼경이나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녘에 기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절강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천호방을 계속 주시했는데, 이 시간에 저렇게 삼엄한 적이 없었어.”
“들어가 보면 알겠지요.”
소걸아는 별걸 다 걱정한다는 얼굴로 정문을 향해 걸어가자 백룡신권은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길을 비켜라!”
정문에 서 있던 경계대장은 소걸아를 보자 공손히 포권을 하더니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모두는 소걸아가 지나갈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진짜…… 악 방주와 친구인가?’
소걸아가 거짓을 말하는 성격이 아님은 알고는 있었다. 하나 그래도 악불군과 친구라는 사실은 무림맹에서 안다면 큰일로 칠 만큼 너무 엄청난 일이라 긴가민가하던 백룡신권은, 정문을 무사통과하자 눈이 커졌다.
“소 제.”
“예.”
“악 방주와 어떻게 친구가 된 건가?”
‘이제야 진짜로 믿으시네, 헤헤!’
백룡신권의 말에 소걸아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악 방주와 저 사이에는 아주 긴 역사가 있지요. 세세한 내용까지 다 아시면 다치실 수 있으니 모르시는 것이 좋습니다.”
소걸아는 뭔가 큰 사연이라도 있는 듯 허풍을 떨었다.
친구하자고 했더니 친구해 주더라고 말한다면 어중이떠중이 몰려와 친구하자고 조를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네가 악 방주와 친구라는 것을 무림맹에서 알면 당장 중요한 직책을 내려줄 텐데, 왜 그것을 숨기고 있는 건가?”
“거지가 직책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전 무소유를 생활화한 진짜 거지입니다. 그래서 대협께도 비밀로 해 달라고 한겁니다.”
‘무소유? 그렇게 먹는 거하고 돈 좋아하던 친구가 그동안 진짜 무슨 깨달음이 있었나?’
백룡신권은 소걸아의 옆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시꺼먼 때가 덮인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여전한 짓궂은 장난꾸러기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백룡신권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소걸아도 약간 놀란 듯 걸음을 멈추었다.
수십 명이 넘는 무인들이 말을 타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한 번이 아니었다. 이내 수십 명 단위로 연달아 무인들이 나가고 있었다.
“소 제, 아무래도 오늘 날을 잘못 잡은 것 같지 않나? 천호방에 뭔가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일이지? 분명 분타에서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는데?”
소걸아도 의아한 듯 밖으로 나가는 무인들을 보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열 명의 무인이 나타났다.
백룡신권은 긴장한 표정으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오셨습니까?”
그러나 무인을 몰고 온 중년인은 소걸아를 보자 공손히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그는 백인막 구 호였던 총관 구여풍이었다.
“구 총관, 악 방주 안에 있습니까?”
“본 방에 비상이 걸려 간부들과 회의 중이십니다.”
“비상이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소걸아의 반문에 백룡신권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쿡 찔렀다. 남의 문파에 비상이 걸린 것에 대해 다른 문파에서 묻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여풍은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제가 말씀드리기는 좀 어렵습니다. 곧 회의가 끝날 것이니 방주님께 직접 물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비상 중인데 악 방주가 저를 만나 주겠습니까?”
“방주님께서 소 소협만은 언제나 환영한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빈청에 가 계십시오. 제가 방주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구여풍이 한 무사를 쳐다보자 그는 앞으로 나서며 공손히 말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소걸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백룡신권을 보더니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백룡신권은 이제 놀람을 넘어 경악을 하고 있었다. 친분이 있는 정도보다는 더 친한 사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 구여풍이 소걸아를 생각 이상으로 극진히 대우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방주를 만난다는데 백룡신권이 누구인지조차 묻지 않았다. 그것은 소걸아에 대해 큰 신뢰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였다.
“소 제, 자네 정말 악 방주와 굉장히 친한 모양이구만?”
“서로 죽고 못 삽니다.”
악불군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지금 그 말은 소걸아의 현 마음 상태를 말해 준 것이었다.
자유분방하고 틀에 박힌 생활을 싫어하고 남들 눈치 안 보던 그였다. 심지어 상대가 싫어할 말도 서슴없이 하며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골통으로 찍혀 있던 그는 친구다운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백룡신권 정도가 그나마 영웅회에서 가장 친했던 인물이었다.
자신의 막무가내로 친구가 되긴 했지만 소걸아는 그것만으로도 매우 만족했었다.
진정성이 없어도 명성과 지위에서 큰 차이가 나는 자신을 친구로 받아줬다는 것만으로도 그로서는 자랑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딜 가나 불청객 취급을 받던 그를 수하들까지 이런 대우한다는 것은, 악불군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악불군이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받아 준 이상, 자신 역시 악불군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친구가 되겠다고 소걸아는 다짐하고 있었다.
* * *
“소걸아가 왔다고요?”
“예.”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빈청으로 모셨습니다.”
“잘했습니다. 제가 곧 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방주님, 혼자 오신 것이 아니라 백룡신권과 같이 왔습니다.”
뜻밖에도 구여풍은 이미 백룡신권에 대해 알고 있었다.
“백룡신권과 같이 왔다는 겁니까?”
“예.”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빨리 가는 것이 좋겠군요.”
백룡신권이 무림맹에서 천호방을 감시하도록 심어 놓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악불군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소걸아와 같이 왔다는 것은 그에게 절대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나를 부른 이유가 뭐냐?”
기다리고 있던 천화궁주는 예전에 만났던 가면인이 나타나자 빠르게 말했다.
“전주님을 만나야겠다.”
천화궁주의 말에 가면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금 전주님께서 너에 대해 매우 화가 나 계신데 만나 주시겠냐?”
“대단히 중요한 정보다. 시간이 없다.”
“얼마나 중요한 정보인지 내게 말해 봐라.”
“네겐 그런 자격이 없다. 오늘 안으로 연락해라. 만약 늦어져서 문제가 생기면 네가 책임을 져야 할게다.”
가면인은 천화궁주의 말에 잠시 말없이 노려보더니 물었다.
“만약 그만한 가치가 없는 정보라면 넌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넌 전하기만 하면 된다.”
가면인은 입술을 잘근 씹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네가 전주가 되려고 나를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하지만, 네가 꼴 보기 싫어서라도 난 반드시 살아날 거다.”
천화궁주와 가면인은 다음 대 전주가 되기 위해 서로를 그토록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악 방주!”
소걸아는 악불군이 안으로 들어서자 반갑다는 듯 부르며 그의 몸을 껴안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었는지 옷은 때로 절어 까맣게 보였고 코를 찌르는 악취까지 풍기는 그가 안으려 든다면 누구든 피할 것이었지만, 악불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같이 껴안았다.
“내가 반가워해서 받아 주기는 했는데, 우리가 헤어진 게 겨우 이틀 전인데 이렇게 안기까지 할 정도로 오랜만에 본 것은 아니지 않나?”
몸을 뗀 악불군이 한마디 하자 소걸아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언제 만났는지가 무에 그리 중요하겠나? 우리가 이렇게 또다시 만났다는 게 중요하지! 안 그런가?”
“그렇다 치지, 뭐.”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은 악불군은 백룡신권을 보며 포권을 했다.
“오랜만입니다. 황보 대협.”
“저를 기억하십니까?”
“전 한 번 본 분들은 잊지 않습니다. 특히 황보 대협처럼 정의감이 투철하신 분은 더욱 잊기 힘들지요.”
백룡신권은 악불군의 말에 감탄한 듯 공손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배첩도 없이 이렇게 무작정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소걸아가 끼어들었다.
“황보 대협은 황보 세가 분으로 정파인들에게 신망이 아주 높으신 분이라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림맹의 절강 책임자가 되신 모양인데, 혼자 고민이 있는지 끙끙거리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러지 말고 악 방주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모셔 왔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잘했네.”
“보십시오. 악 방주가 이런 걸로 기분 상하고 하는 성격이 아니라니까요.”
소걸아가 자랑스러운 듯 백룡신권에게 말하자 악불군이 말을 받았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모르지만, 제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악불군의 말에 백룡신권은 잠시 고심하는 듯하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분께서 계속 방주님께서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다며 조사를 강요했습니다. 그분이 가져온 자료를 보니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되어, 어쩔 수 없이 군사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제가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다라……? 그럼 황보 대협께서는 그 말을 믿으셨습니까?”
“제게 정보를 주신 분이 제가 존경하던 분이셨습니다. 악 방주님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이 없기도 했고요. 하지만 보고한 후, 악 방주님께서 절강에서 하시는 일들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지금은 믿지 않으신다는 말씀이군요?”
“제 마음은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원체 집요하게 저를 설득하고 있고, 누군가를 해하려는 욕심으로 가짜 정보를 주는 분은 아니기에 어찌할지를 몰라 고심 중이었습니다.”
“황보 대협께서 또다시 제가 의심스럽다고 보고를 하면 제갈 군사께서도 의구심을 가지시겠군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럼 제 입으로 직접 그 사안의 진위를 말해 달라고 오신 것입니까?”
“죄송합니다. 솔직히 지금 말하자마자 후회하고 있습니다.”
백룡신권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진짜 악불군이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다면 절대 이렇게 의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역자를 찾는 것이군요?”
“제가 어찌 감히 악 방주님을 부역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의문점은 푸시는 것이 무림맹과의 관계에도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소걸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천호방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이렇게 예민한 문제인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악 방주,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것 같으이.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문제인지는 몰랐네. 대답 안 해도 되네. 황보 대협은 내가 다시 모시고 돌아가겠네.”
그는 자신 때문에 악불군이 난처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듯했다.
“아닐세, 황보 대협 말씀대로 의문점은 풀어야 오해도 없는 법이지.”
괜찮다는 듯 말한 악불군은 백룡신군을 보며 다시 말했다.
“제가 태어난 곳이 절강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우학현 출신이고, 할아버님 대부터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절강은 잠룡세가의 세력권이었고, 절강의 백성들은 모두 잠룡세가의 수하나 마찬가지였지요. 더욱이 세가 내에서 일하는 수많은 하녀들과 하인 같은 식솔들은 대부분 절강성의 백성들이었으니, 그 연관성을 따진다면 걸리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 식으로 엮으면 그것은 정말 말이 안 되지요.”
“그럼 고심하신 문제에 대해 해답이 되었습니까?”
“예, 되었습니다.”
“종산은자께 더 이상 그런 말을 퍼뜨리고 다니지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악불군의 말에 백룡신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