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34화>
334화. 풍운(2)
“솔직히 저도 승리할 수 있다고 보장하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성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백리옥빙과 비등한 수준이라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와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석이 잘못된 거야, 아니면 그동안 늘었다는 거야?’
톡톡-.
성후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생각에 잠겼다.
구양봉은 참지 못하고 다시 나섰다.
“성후님, 만약 검후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궁주님께서 정하지 않으셨다. 내가 마음대로 악불군을 제거할 수는 없다.”
“건의를 하셔야지요.”
구양봉의 말을 듣고 있던 백리옥빙이 비소(誹笑)를 지으며 말했다.
“무후, 너는 지금 궁주님의 뜻을 거역할 생각이냐?”
“뭐? 거역이 아니고 건의라고 했다!”
거역이란 말이 나오자 구양봉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럼 너도 건의할 자격이 있는데 왜 성후님께 건의하라는 거냐?”
“성후님이 계신데 내가 직접 건의하는 것은 성후님을 무시하는 행동이 아니냐!”
“그래서 성후님을 위해서 한 말이라는 거냐? 설마 넌 궁주님께서 이미 내린 명을 거스르는 건의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는 게냐?”
“그만둬라!”
듣고 있던 성후가 다시 소리치자 둘은 입을 닫았다. 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백리옥빙의 얼굴과 굳을 대로 굳은 구양봉의 표정으로 누가 승리했는지 알 수 있었다.
* * *
“소 소협께 상당히 무리한 일일 텐데, 어떻게 약속을 받아 냈네?”
“세상 모든 경험은 다 한 것 같이 큰소리는 치지만 대단히 순진한 친구입니다. 그동안 아가씨 옆에서 배운 것을 좀 흉내 내 본 것뿐인데, 정말 통할 줄은 몰랐습니다.”
“나를 흉내 내서 된 게 아니고, 소군의 말에는 진심이 느껴져. 소 소협도 그 진심을 느꼈기 때문에 받아들인 걸 거야.”
“어쨌든 너무 부담스러운 일을 맡긴 것 같아서 좀 미안하긴 했습니다.”
“난 친구가 없어서 모르지만, 책에서 보면 남자들의 우정은 태산만큼 무겁고 단단하다고 하더라. 소군이 소 소협을 흔쾌하게 친구로 받아들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저도 왜 그렇게 쉽게 그 친구를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보는 순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친구 같았습니다.”
“소 소협도 소군이 친구로 받아 준다니까 진심으로 기뻐하더라.”
담수련은 소걸아 생각만 해도 재미있는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친구 위험은 없을까요?”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것도 소 소협께서 커 나가는 데 도움될 거야. 물론 소 소협께서 위험해지면 소군이 도와줘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 이제 떠날 준비하자.”
“이미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외유를 나간다는 소문은 냈지?”
“지금 퍼지고 있을 겁니다. 동선까지 알려 줬으니 많은 무림인들이 따라붙을 겁니다.”
“적들이 소군을 노릴지, 소군이 없는 총단을 노릴지 아직은 모르니까 모든 방비를 확실하게 해야 해.”
“추 호법님과 고 장로님 그리고 동방 장로님께서는 서로 다른 방면으로 백전노장들입니다. 거기다 아가씨께서 사방에 진까지 쳤습니다. 어떤 적이 쳐들어온다 해도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덫에 어디가 걸릴지 두고 보자고.”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이번 외유는 물속 깊숙이 숨어 있는 적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 위한 미끼 작전이었다. 미끼는 악불군과 천호방 총단이었다.
둘 중 어디를 물지, 그리고 얼마나 큰 고기가 걸릴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미끼의 옆에 담수련이 같이 있다는 점이었다.
* * *
합비에 자리 잡은 남궁세가는 수백 년 동안 안휘성의 절대자로 군림해 왔다.
무림 오대세가의 수좌라는 말을 듣는 남궁세가는, 전성기 시절에는 구파일방까지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래서 많은 무림인들은 당연하다는 듯 대(大)남궁세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원나라와 태양천의 침공으로 인하여 남궁세가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 갑자가 넘는 시간 동안 남궁세가는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며 더욱 강해지기 위해 자손들에게 강도 높은 수련을 시켰다.
그 결과 영웅회 시절 오대세가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천호무적검이 남궁세가에 들르겠다고 배첩을 보냈다는 것이냐?”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원웅의 말에 총관인 남궁원상이 답했다.
“예, 방금 도착했습니다.”
“천호무적검이 본 가에 오겠다고 하는 이유에 대해 너희들 생각을 말해 보거라.”
남궁원웅은 주위에 앉아 있는 간부들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장로이자 남궁원웅의 아우인 남궁원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 안휘를 통과할 때 저와 약조한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연락했었는데, 이번에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 아닐까요?”
“내 생각은 다르네. 이미 먼저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다고 유감의 뜻을 표했는데, 그것 때문에 온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보네.”
호법인 남궁세열의 말에 남궁원웅이 반문했다.
“그럼 숙부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가주도 들었겠지만 천호무적검이 놀라운 공표를 했네.”
“내용은 저도 받았습니다.”
“혈교는 우리도 어느 정도 수집한 정보가 있으니 그렇다 할 수 있지만, 그 신비 조직이라는 곳에 대해서는 가주께서는 들어 본 적이 있으시오?”
“…….”
남궁원웅이 즉답을 하지 않자 청 안에 조용해졌다.
“가주는 들어 본 적이 있으신 모양이구려?”
“사실은 세황 숙부님께서 제게 넌지시 비춘 적이 있었습니다.”
남궁세황은 현 남궁세가의 최고 어른이었다.
“세황 형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 신비 조직은 실존한다고 봐야겠지 않겠소?”
“사실 처음에는 그 내용이 너무 황당해서 긴가민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호무적검의 공표를 듣고는 다시 생각 중입니다.”
남궁세열을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가주로서 그런 신중함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진짜로 있다면 어찌할 생각이신가?”
“만약 진짜로 있다면 반드시 없애야 할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혈교나 신비 조직의 전력이 대단히 클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라네. 어느 한 세력의 힘만으로는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혹시 숙부님께서는 이미 그들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사실 본 가에서 그 둘의 존재에 대해 주시하고 있던 분이 몇 명 있었다네.”
“그걸 어찌 제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세황 형님께서 말했다고 하지 않았소?”
“그건 그렇지요.”
“아마 가주님께서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더 자세히 말씀을 못 드렸다고 보네.”
“제 불찰입니다. 그럼 숙부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노부 생각에는 천호무적검이 본 가에 오는 이유가 이번 공표한 문제로 의논하고자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천호무적검은 그 두 세력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거야 오면 말해 주지 않겠소?”
“만약 증거가 없다면 의논하는 것 자체가 무림맹에 문제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궁원상의 말에 남궁세열은 그를 보며 질책하듯이 말했다.
“조카는 지금 천호무적검이 엄청난 거물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지금 천하가 그의 공표를 듣고도 어느 곳에서도 아무런 논평도 없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아마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벌써 항의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려 천하에 혼란을 가져올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을 게다.”
남궁세열의 말을 듣던 남궁원웅은 결정한 듯 모두에게 말했다.
“천호무적검이 온다고 한 날이 언제냐?”
“보름 후입니다.”
“원익이는 그가 안휘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직접 본가까지 안내하거라.”
“제가 직접 말입니까?”
남궁원익은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악불군이 일 방의 방주이니 장로인 그가 직접 마중을 나가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절강의 경계까지 가서 안내한다는 것은 솔직히 너무 과한 것이었다.
“숙부님 말씀을 듣지 못했느냐? 이왕 맞이한다면 최대한 성대하게 하는 것이 좋다.”
“가주 형님, 세민 숙부님 말씀이 무림맹에서 아직까지도 천호방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환영을 했다가 무림맹에서 천호방을 정파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본 가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남궁세민은 현재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무림맹의 장로였다.
“원익아.”
남궁원웅이 목소리를 깔자 남궁원익은 뭔가 불안을 느낀 듯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예, 가주 형님.”
“넌 내 명령을 듣느냐, 무림맹주의 명을 듣느냐?”
“그, 그거야 무조건 가주님의 명령이 먼저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내 명대로 따라라.”
“알겠습니다.”
* * *
“맹주님 들어오십니다.”
무림맹 대회랑에 모인 장로들은 맹주 호위대장 철검삭도의 목소리를 듣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했다.
“앉으십시오.”
자리에 앉은 천제무황은 모두에게 앉으라고 한 후, 제갈우명을 보며 말했다.
“시작하게.”
“예!”
공손히 인사를 한 제갈우명은 연단으로 가더니 입을 열었다.
“장로님들께서도 천호방에서 공표한 혈교와 신비 조직에 대해 들으셨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그 문제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장로회를 소집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산의 현천진인이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제갈 군사, 천호방의 공표가 사실이라면 지금 천하에 큰 우환이 있는 것도 우리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겠소? 본 장로는 우선 그 공표가 사실인지 아닌지부터 말씀해 주시겠소?”
“우선 혈교에 대한 공표는 사실입니다.”
순간 대회랑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악불군이 공표한 혈교의 전력이 거의 무림맹과 맞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장로회의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오?”
“군사전에서는 혈교가 천년마교의 후신이라고 짐작하고 이미 그들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신비 조직은 아직 조사 중에 있습니다.”
“아직 조사 중이라는 말은 천호방의 공표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점창파의 점창일검의 외침에 제갈우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천호방의 공표가 잘못된 것이라면 거기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해야 하지 않겠소?”
“지금 조사 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 사실일 확률이 더 높다는 점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일 확률이 더 높다는 말에 대회랑은 다시 한번 술렁였다.
“아미타불, 소림의 무애입니다. 사실일 확률이 높다면 조사한 것이 이미 오래전이라는 말인데, 그것을 지금까지 장로회에 보고하지 않은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소?”
“그들의 마수가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우리 장로들까지 의심했다는 말이오!”
누군가가 대로한 듯 소리치자, 여러 곳에서 동의한다는 듯 반박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찌 장로님들을 의심하겠습니까? 하지만 주위 사람들까지 의심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갈우명의 말을 들은 천제무황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가 원했던 흐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갈 군사.”
“예! 맹주님.”
“아직 확실하지 않다면서 그런 발언을 하면 무림맹의 단결에 해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천호방에서 천하에 공표한 이상, 장로님들께 솔직하게 상황을 말씀드리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천제무황의 말에도 불구하고 제갈우명이 자신의 생각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자 장로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 * *
염상들에 대한 악불군의 강력한 조치는 양민들에게 더 큰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동안 양민들이 염상들의 행패에 크나큰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이를 누구도 그들을 제어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에 대한 칭송이 항주를 넘어 절강 전체로 퍼져 나갈 즈음 또 다른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악불군이 외유를 떠난다는 것이었다.
양민들에게 무림 세력의 장이 외유를 떠난다는 사실이 화제가 된다는 것은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 주는 방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