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338화 (338/472)

<천검지애 338화>

338화. 남궁세가(2)

“본 세가의 호법이십니다. 제겐 숙부님이시지요.”

남궁원익의 소개에 악불군은 급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천호방 방주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시오. 노부는 남궁세가의 호법인 남궁세준이라고 하오.”

인사가 끝나자 수십 명의 남궁세가 무인들은 양 옆으로 도열했다. 명문 세가에서 이런 도열식은 실로 중요한 손님에게나 하는 극진한 환영이었다.

“남궁세가의 명성이 왜 그렇게 높은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제가 이런 환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부끄럽습니다.”

도열된 무인 사이를 남궁원익의 안내를 받으며 남궁세준과 함께 걸어가던 악불군은 세가원들의 기세를 보며 말했다.

“노부가 볼 땐, 무림 역사상 악 방주만큼 단기간에 그런 명성을 얻은 분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소이다. 새로운 젊은 영웅에 대한 환영이야 무림세가로서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소?”

“어르신, 제가 비록 방주라 하나 나이가 어립니다. 그냥 편히 말을 놓으십시오.”

악불군의 겸양 섞인 말을 들은 남궁세준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확실히 어른들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그였다.

도열이 끝나자 커다란 연무장이 나타났다.

“예전에는 이곳에 제자들이 꽉 차 있었지만 지금은 좀 휑한 편이네.”

남궁세준은 자신이 어렸을 때 생각이 나는지 약간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태양천과 원나라 군사들의 합공으로 이곳에서 남궁세가의 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남궁세가의 저력이 있으니 곧 예전의 성세를 찾으실 것입니다.”

“악 방주의 말을 들으니 위로가 좀 되는구먼. 가주님께서는 당장이라도 뵙고 싶다고 하셨지만 악 방주께서 먼 길을 왔는데 강요할 수는 없고, 잠시 쉬고 이따 만찬 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악불군은 남궁원익이 남궁세가의 간부들에게 자신과 나눈 대화를 분석할 시간은 줄 생각이었다.

* * *

“악 방주는 잘 모셨느냐?”

남궁원웅의 말에 총관인 남궁원상이 급히 답했다.

“귀빈청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수하들 가까이 있겠다고 하셔서 객청으로 모셨습니다.”

“수하들을 아끼는 방주라……. 젊은 나이지만 배려심이 있는 것 같군.”

“수하들이 방주라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궁원익의 부언에 남궁원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 대화는 많이 했느냐?”

“이틀 동안 거의 같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예의가 바른지 명문 대파의 제자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지모(智謀) 또한 어찌나 뛰어난지, 모든 질문에 막힘이 없더군요.”

양민들은 무림인이라고 하면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힘은 일류급의 초기까지만 중요했다.

절정 고수 이상의 무공을 익히려면 그때부터는 머리가 중요했다. 물론, 단순히 머리가 좋다고 지식이 해박할 수는 없었다.

특히 악불군처럼 젊은 나이에 초절정 고수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매일 고된 수련을 해야만이 가능했다.

“무공뿐 아니라, 학문을 익히길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놀랐던 점이, 생각이 너무나 발랐습니다. 정의와 협의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이 어찌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지 대화하는 내내 절로 감탄이 일 정도였습니다.”

“네가 감탄할 정도라니 좀 안심이 되긴 하구나.”

“그런데 가주 형님, 악 방주가 깜짝 놀랄 제안을 했습니다.”

깜짝 놀랄 제안이라는 말에 모두의 귀가 쫑긋했다. 남궁원익이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슨 제안이냐?”

“남궁세가와 혈맹지약을 맺으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혈맹? 무림 문파끼리 혈맹을 맺어서 잘된 예가 없지 않느냐?”

“악 방주 말이, 자신은 남궁세가만은 믿는다고 하더군요.”

남궁원웅은 남궁세열을 쳐다보며 물었다.

“숙부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혈맹지약은 한번 맺으면 한쪽이 약조를 어기기 전까지는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주도 알지 않으신가?”

약조를 어기기 전까지라는 말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약조를 파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가훈이 ‘신의를 지켜라’일 정도로 약속을 목숨처럼 중요시하는 곳이었다.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남궁세가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 그들이 오대세가의 수좌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은 절대로 약속을 지키는데 상대가 안 지킨다면 생겨날 피해는 실로 막대할 수도 있었다.

남궁세열의 말에 잠시 숙고한 남궁원웅은 남궁원익을 보며 다시 물었다.

“지금 악 방주를 가장 많이 접촉한 사람이 너다. 네 생각을 한번 말해 보거라.”

“악 방주가 신뢰도 쌓지 못한 상황에서 그런 제안을 한 것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안다고 제게 그러더군요. 그러면서 작은 인사치레 정도로 흑선산장을 자신이 없애 주겠다고 했습니다.”

또다시 간부들의 눈이 커졌다.

흑선산장은 절대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천호방에서 그들을 없애려면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인데?”

“아마, 본 가와 혈맹지약을 맺는다 해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 주기 위해 한 말 같습니다.”

“원상이 너는 악 방주의 제안에 대해 의견이 없느냐?”

남궁원상은 총관이지만 군사 역할도 같이 하고 있었다.

“우선 악 방주가 그런 제안을 한 저의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의라면 무엇을 말하느냐?”

“천호방은 진짜 놀랄 정도로 짧은 시간에 절강을 장악했습니다. 심지어 구천마성과 불가침 조약까지 맺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쪽은 바다고, 남쪽은 불가침 조약을 했고, 북쪽은 황궁이 있으니, 가장 취약한 곳은 서쪽이라고 봐야겠지요.”

“설마 본 가에서 천호방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냐?”

“무림이라는 곳이 원체 천변만화하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정파이고 서로 세력이 정해져 있으니 척질 일이 없다고 하지만,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럼 본 가와 혈맹지약을 맺으면 절강은 완벽하게 보호된다고 할 수 있겠구나?”

“사실 전 악 방주와 무림맹 간에 어떤 대화도 없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구심이라면 무엇을 말하느냐?”

“천호방이 정파라면 무림맹에서 당연히 접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호방이 무림맹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지 않았느냐?”

“그렇다 해도 주도권은 무림맹에 있습니다. 가입을 다시 권할 수도 있고, 만나서 무림맹의 원칙을 따라 주기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정식으로 만났다는 말이 없습니다.”

남궁원웅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챈 듯 턱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무림맹에서 천호방을 적으로 규정한다면 혈맹지약을 맺은 남궁세가로서는 진퇴양난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약속이고 천호방과 혈맹지약도 약속이니, 그야말로 곤궁지혈(困窮之穴)에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가주.”

남궁원웅이 고심하는 것을 본 남궁세열이 그를 불렀다.

“예, 숙부님.”

“그렇지 않아도 세황 형님께서 악 방주와 독대하고 싶다고 하셨네.”

“저도 얘기는 들었습니다.”

“세황 형님께서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하시니, 형님께서 악 방주를 만난 뒤에 찾아가서 의견을 듣고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는가?”

순간 남궁원웅의 표정이 밝아졌다. 남궁세황이라면 올바른 판단을 내려 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 * *

“침대들이 아주 푹신하네요.”

담수련의 방으로 간 악불군은 그녀의 침상을 하나하나 살핀 후 만족한 듯 말했다.

“소군은 긴장도 안 돼?”

“긴장해서 일이 잘될 수만 있다면 언제나 긴장을 하겠습니다. 허나, 일의 성사라는 것이 제가 안달복달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아마 지금쯤 소군의 제안 때문에 그 의미를 찾느라 분주하실 거야.”

“좀 꺼림칙하시겠지요.”

“만찬에 가면 아마 그 얘기가 나올 거야. 혈맹지약을 맺음으로써 남궁세가에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을 최대한 보여 줘야 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 도중 슬쩍 해남검문도 우리와 혈맹지약을 맺었고 당문과도 비슷한 약조를 했다는 것을 흘려.”

“그 얘기, 벌써 세 번째 하십니다.”

“그랬나? 난 솔직히 무척 긴장돼. 신비 조직에서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어. 그들이 왜 그 사실을 아직 터뜨리지 않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분명 터뜨릴 거야. 그때 그 위기를 벗어나려면 최대한 많은 문파와 혈맹지약을 맺어야 해.”

“지금은 모르고 혈맹지약을 맺지만,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오히려 배신감에 약조를 파기하고 더 집요하게 공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궁세가는 특히 잠룡세가에 원한이 크니까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다행히 혈교와 신비 조직이 나타났잖아?”

담수련은 혈교와 신비 조직의 등장이 오히려 그녀의 계획을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럴까요?”

“부역자는 정파에게 제거 일순위이기는 하지만, 적은 아니야. 상대가 안 되거든. 하지만 혈교와 신비 조직은 진짜 위험한 적이지. 그들을 없애는 데 소군의 도움이 절실하다면 부역자는 그들의 안중에서 사라질 거야.”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악불군의 시선이 밖을 향했다.

“누가 와?”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친 악불군은 밖으로 나갔다.

그의 눈에 객청으로 들어서는 남궁원익의 모습이 보였다.

“왜 나와 계십니까?”

남궁원익은 악불군이 나와서 자신을 보고 있자 급히 다가와 포권을 했다.

“장로님께서 오시는 기척이 있어 나왔습니다.”

‘내가 오는 것을 이미 느꼈다고? 겉으로 보는 것하고는 다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니, 정말 소문이 사실이었군.’

남궁원익은 사실 악불군의 무공이 진짜 소문대로 강한지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틀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한 번도 그의 내공이 자신보다 높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대단하시구려.”

“아직 만찬까지는 시간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본 가의 최고 어른이신 태상호법께서 악 방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최고 어르신을 만날 수 있다면 저로서는 영광이지요. 다만 본 방의 군사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아마 같이 가셔도 될 겁니다.”

* * *

원나라의 침공에 의해 중원의 모든 문파가 괴멸한 후, 각 문파가 다시 살아나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한 명씩 있었다.

남궁세가 역시 지금의 간부들을 키운 어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남궁세황이었다.

대나무로 지어진 소축(小竺)은 아주 정갈했다.

소축 안 벽에 늘어진 꽃가지들을 작은 소검으로 정성스럽게 다듬던 노인은 고개를 들더니 소검을 내려놓고는 화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숯만 담겨 있던 화덕은 그가 살짝 손을 대자 갑자기 불이 확 타올랐다. 강력한 양강의 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수법이었다.

노인은 화덕 위에 주전자를 올렸다. 차를 끓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남궁원익과 함께 악불군과 담수련이 소축 앞에 나타났다.

“숙부님, 원익입니다. 천호방의 악 방주님과 담 군사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 하고 너는 이만 가 보거라.”

“예!”

남궁세황의 말이 끝나자 남궁원익은 악불군과 담수련에게 들어가라는 듯 손짓을 하고는 사라졌다.

“천호방의 악불군, 어르신께 인사드립니다.”

“담 군사라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선 악불군과 담수련은, 신선풍의 노인이 물이 끓는 주전자 옆에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자 공손히 인사를 했다.

“자리에 앉게.”

“어르신이 서 계신데 어찌…….”

“내가 사해신개와 아주 친하네. 그 친구가 예의하고는 아주 벽을 쌓고 지내는지라, 나도 옮아서인지 예의 차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네. 빨리 앉게.”

“그럼.”

악불군과 담수련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내가 원래 차를 맛있게 못 끓여. 그래도 원체 귀한 손님이 왔으니 정성이라도 보여야 할 것 같아서 최대한 노력은 해 봤네.”

잠시후 주전자를 가지고 온 남궁세황은 자리에 앉더니 둘의 앞에 놓인 잔에 차를 따랐다.

“어르신 먼저 따르셔야지요.”

“어허! 괜찮다니까 그러네. 난 이런 예의보다는 진실한 마음을 더 좋아하네. 그러니 진짜 나를 위한다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해 주게.”

남궁세황의 의미심장한 말에 악불군과 담수련은 서로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께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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