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39화>
339화. 진실(1)
“무상 진인과 사해신개가 자네를 보기 드문 젊은이라고 그렇게 극찬을 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만.”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두 분을 아시는 것을 보니 어르신도 탕마회의 일원이신 모양입니다.”
“젊을 적, 아니 어린 나이라고 봐야겠지. 당시 남궁세가는 크나큰 내분에 휩싸여 있었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네.”
“그 이유가 신비 조직이라고 확신하시는군요?”
“이젠 확신하고 있네. 그런데 또다시 세가 내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네. 이제 겨우 세가를 다시 일으키려는 상황에서 내분의 기미가 보이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걱정이 되겠나?”
자신의 문파에 관한 일을, 그것도 치부가 될 수 있는 일을 처음 본 타 문파의 방주에게 말한다는 것은 그가 이미 악불군을 믿고 있다는 의미였다.
“어르신께서 방주님을 믿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듣고 있던 담수련이 포권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사해신개는 남을 잘 안 믿고, 무상 진인은 사람 관상을 아주 잘 본다네. 그 둘이 신뢰를 하고 탕마회에 대해 다 말했는데, 당연히 자네들을 믿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에 혈맹지약을 했으면 어떻냐고 제안했다던데, 사실인가?”
“남궁세가 같은 거대 문파에게 천호방 같은 작은 문파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은 직시해야지. 지금은 천호방이 남궁세가보다 더 크다고 볼 수 있으니 그런 말은 하지 말고, 그런 제안을 하게 된 배경이나 한번 말해 주겠나? 노부가 개인적으로 자네를 믿지만, 남궁세가의 태상호법으로서 본 가에 이익이 될지 아닐지를 알아보는 것 또한 노부가 할 일이 아니겠는가?”
“당연합니다. 이것을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악불군은 품에서 두 개의 서찰을 꺼내 공손히 두 손으로 전했다.
남궁세황은 악불군이 건넨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얼굴이 굳어졌다.
반 시진 가까이 두 개의 서찰을 꼼꼼히 읽어 본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본 방으로 누군가 보냈더군요. 전 남궁세가에도 이것이 전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닙니까?”
“여기 혈교에 대한 서찰은 본 가에도 전해졌다네. 하지만 신비 조직에 대한 서찰은 처음 보네.”
“혈교에서 왜 저희에게만 이것을 보냈는지 모르겠군요.”
“혈교에서 보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그건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담수련이 나서자 남궁세황은 그녀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더니 말했다.
“설명해 보거라.”
“혈교에 대한 정보는 신비 조직에서 혈교와 무림 간에 싸움을 붙이기 위해 보낸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게 짐작하는 이유는, 신비 조직과 혈교가 견원지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사이가 나쁘다는 것이 어느 정도 증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담수련은 그동안 얻은 정보와 자신의 추측을 더해 자세히 설명했다.
“자네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그럼 우선 탕마회와 의논한 후 공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나?”
“방주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또다시 신중하자고 하셨을 겁니다. 그러면 혈교건 신비 조직이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지금처럼 또다시 그들을 쫓는 숨바꼭질만 계속하게 될 겁니다. 전 그들은 소수만으로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공표하고 전 무림이 쫓아야 그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남궁세황은 잠시 생각하더니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일리가 있긴 하구나. 하지만 그 공표로 인해 천하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
“그 정보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들 조직의 힘은 대단히 강합니다. 그런 자들이 저희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는데, 지금 당장 혼란만 막으면 그게 평화일까요? 전 그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는 무림에 평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담수련의 말을 들은 남궁세황은 그녀를 찬찬히 주시하더니 물었다.
“네 말을 노부가 백분 이해한다 해도, 지금 천호방의 공표로 인해 그들의 주적이 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이렇게까지 열심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
담수련은 잠시 멈칫했다.
“왜, 말하기 어려우냐?”
남궁세황은 그녀가 답을 하지 않자 약간 의아한 듯 물었다.
“아닙니다. 어르신께서 솔직히 말하자고 하시니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다만 지금 들으신 얘기는 얼마간 비밀로 해 주십시오.”
남궁세황은 대단한 비밀이 나올 것을 직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이라면 언제까지를 말하는 것이냐?”
“혈교와 신비 조직의 정체를 완전히 밝힌 후를 말합니다.”
“흠…… 그러자꾸나.”
“무림에서는 저를 천상신녀라고도 부른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악 방주의 명호가 천호무적검인 이유가 바로 너 때문이 아니더냐?”
“제 이름은 담수련이라고 합니다.”
“담수련?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잠룡세가에 타격을 주기위해 담수련을 납치하려고 계속 시도한 무리 중 가장 많은 수가 남궁세가 출신이었으니, 그 역시 이름을 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저는 잠룡세가 출신입니다.”
순간 남궁세황의 표정이 확 변했다.
“악 방주에게 비밀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더니, 그게 바로 너였구나?”
“악 방주님께서는 잠룡세가와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다만 저를 보호하실 뿐이지요.”
“잠룡세가의 천금을 보호한다면 그게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제 아버님께서 무림에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압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빈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라.”
“혈교는 천년마교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또한 신비 조직은 수백 년에 걸쳐 무림에 분란을 일으키고 수많은 혈겁을 뒤에서 조장해 왔습니다. 아마 그들이 아니었다면 태양천이 그렇게 쉽게 무림을 유린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멸문한 잠룡세가와 부역자로 낙인이 찍힌 그 자손들을 죽이시는 것과 혈교와 신비 조직을 제거하시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남궁세황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잠룡세가는 남궁세가로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하지만 지금 혈교와 신비 조직은 태양천에 의해 풍비박산 났던 일 갑자 전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위험 요인이었다.
“그럼 혈교와 신비 조직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테니 부역자를 단죄하지 말라는 얘기냐? 매정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정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만약 이게 관례가 된다면 누구나 중원을 배신하고 또 다른 공을 세워 그것을 무마하려고 하는 풍토가 생기지 않겠느냐?”
“어르신의 말대로 그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하지만 고래(古來)로 예외는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바로 사소취대(捨小取大)라는 대승적인 판단이었지요. 물론 이것은 거래하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르신께서 용납하건 안 하건 악 방주님과 저는 혈교와 신비 조직을 제거할 것입니다.”
“……정말이냐?”
“자식으로서 아버님께서 중원에 행한 잘못을 조금이라도 속죄하기 위한 제 마음입니다.”
‘진심이구나…….’
남궁세황은 담수련의 말 속에 진정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악 방주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중원 무림이 이 아이를 용서할 수 없다고 결정한다면 어찌할 생각인가?”
“다른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를 죽이지 않고는 누구도 이분을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나온 악불군의 대답은 간결하지만 강력했다.
“자네가 지금 이룬 명성과 세력 전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인가?”
“제 목숨보다 소중한 분입니다. 중원 무림이 아니라 황상이라도 저는 막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혈교와 신비 조직을 모두 제거할 때까지 비밀로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저희까지 적으로 삼으신다면 너무 많은 피해를 입으실 수 있습니다. 우선 같이 그들을 제거한 연후에 저희 문제를 생각하시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담수련의 부언에 남궁세황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만약 천호방에서 ‘문제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혈교나 신비 조직을 돕겠다’고 나온다면, 이는 실로 위협적인 요구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제거할 때까지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은 오히려 무림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잠깐 생각을 하던 남궁세황은 옆에 있는 화분을 가져오더니 악불군 앞에 놓았다.
화분에 담긴 나무는 다른 화분의 나무들과는 달리 잎도 축 늘어지고 생기가 없었다.
남궁세황은 가지를 자르던 단검을 그에게 내밀고는 물었다.
“가지치기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아직 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 화분에 심어진 나무의 어느 가지를 잘라 줘야 나무가 생기를 얻을 것 같은가?”
악불군은 나무를 잠시 보더니, 받은 단검으로 이곳저곳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모습이 나타났다. 생기를 잃고 축 늘어져 있던 나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현상이지?’
남궁세황도 생각지 못한 현상인 듯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무와 꽃을 사랑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나무를 길러 왔다. 그리고 나무에서 풍기는 자연의 기를 짚어 낼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선한 자라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았다.
그는 악불군이 나무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찾아낸다면 믿을 만한 심성을 가졌다고 판단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찾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나무가 살아나 버렸다. 그가 수십 년을 나무를 돌봐 왔지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들은 적도 없었다.
“자네, 정말 가지치기를 해 본 적이 없는가?”
남궁세황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반문을 하고 말았다.
“제가 나무나 꽃과 가까이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남궁세황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남궁세가를 찾아온 이유가 혈맹지약을 하기 위해서인가?”
“아닙니다. 사실은 무림을 외유하는 척하면서, 거기에 적힌 정보를 바탕으로 혈교와 신비 조직의 분타들을 제거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제거한다면 그들이 옮길 수도 있지 않겠나?”
“그래서 각파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후기지수들 중 뛰어난 분들과 함께 그들을 제거할 조직을 만들 생각입니다.”
“무림맹이 있는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는가?”
“그래서 남궁세가와 혈맹지약을 맺고자 한 것입니다. 아무리 무림맹이라 해도 남궁세가와 혈맹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작정 막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담무룡의 딸을 보호한다는 말은 숨겨야 했던 것 아닌가? 그것을 내가 알았는데 혈맹지약을 허락할 수 있다고 보는가?”
“어르신께서 솔직하자고 하셔서 따른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숨겼다면 남궁세가를 기만한 것이 되는데, 혈맹지약을 맺자면서 할 수는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목적지가 개방이라고 했는가?”
“예.”
“그다음은 어디로 갈 생각인가?”
“소림사로 갈 것입니다.”
“그들 모두와 혈맹지약을 맺을 생각인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사실 이미 해남검문과 당문과는 혈맹지약에 가까운 혈우 관계를 맺었습니다.”
담수련의 당부대로 슬쩍 해남검문과 당문의 얘기를 꺼내자 남궁세황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특히 당문은 남궁세가와 오대세가의 수좌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였다.
“흑선산장을 없애 주겠다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남궁세가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애초에 이곳에 올 때부터 없앨 생각이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양민들을 너무 많이 괴롭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허허허~ 도대체 누가 진정한 정파인지 모르겠구나.”
남궁세황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남궁세가에서는 흑선산장을 세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제거할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양민을 괴롭히기에 없애려고 한다는 악불군의 말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