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341화 (341/472)

<천검지애 341화>

341화. 담화(1)

‘저 계집이 담 군사군…….’

천호방의 담 군사는 이미 많은 문파의 책사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어찰단을 여러 차례 함정에 빠뜨리며 큰 수훈을 세웠다는 현기수사가 저 사람?’

현기수사는 만진선생으로 불리는 제갈우명과 함께 정파 최고 지낭으로 불렸다.

전쟁에서 졌을 때 생길 피해를 생각한다면 무조건 이기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담수련은 그의 책략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함정을 잘 파는 사람은 항상 소리장도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호방의 악불군입니다. 명성이 자자하신 태웅왕 어르신과 현기수사 대협을 이렇게 뵙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악불군이 공손히 포권을 하자 태웅왕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파금왕의 말대로 전혀 고수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몸에서 배어나는 기세는 그가 하늘처럼 따르는 천제무황과 필적할 정도였다.

더욱이 공손하게 허리까지 숙이며 포권을 했지만 조금도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악 방주의 명성이 이 늙은이를 이미 넘어섰거늘,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부끄러워지지 않겠는가?”

태웅왕의 말에 악불군은 미소를 지며 답했다.

“태웅왕 어르신의 명성은 수십 년에 걸친 활약에 의해 만들어진 진정한 명성이지만, 저는 황상께서 십왕에 봉해 주시는 바람에 만들어진 급조된 명성인데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말을 마친 악불군은 현기수사를 보며 살짝 목례를 했다.

“모두 모인 것 같으니 먼저 앉으시지요.”

남궁원웅은 우선 자리를 권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어느새 자리를 잡고 서 있던 남궁세가의 간부들도 같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 인사를 겸한 덕담이 오가며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현기수사가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악 방주께서 혈교와 신비 조직에 대한 공표를 갑자기 하면서 무림 전체가 상당히 술렁이고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 공표는 무림맹과 의논하고 했다면 더욱 신빙성이 있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쉽군요.”

“저도 그럴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림맹에 친분을 맺은 분이 없다 보니, 어느 분과 의논할지 막막했습니다.”

“제갈 군사님과 만난 적이 없습니까?”

“예전에 사천에 가기 전에 비공식적으로 한 번 뵌 적은 있습니다.”

‘제갈 군사를 만난 것을 감출 필요가 없다는 건가?’

악불군이 너무 쉽게 시인을 하자 현기수사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제갈 군사님께 먼저 의견을 물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의논하자고 연락을 취할 만큼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원나라가 물러난 후, 평화롭던 무림이 악 방주의 공표로 인해 또다시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현 무림이 평화로웠다는 말씀은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 악 방주는 지금 무림이 혼란스럽다고 생각하신 것입니까?”

“평화와 혼란, 단둘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주 위험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요. 혈교에 대한 정보는 무림맹에서도 받아 보셨을 테니 부언하지는 않겠습니다. 문제는 신비 조직의 전력이 혈교에 비해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신비 조직이라는 곳이 어떤 문파를 말하는 것이오?”

“제가 안다면 신비 조직이라고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럼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사실인 양 공표한 것이 아닙니까?”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매우 집요하게 묻는 현기수사를 보며, 담수련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끼어들었다.

“현기수사 선배님께서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단어가 왜 생겼는지 모르시나 봅니다. 현기수사 선배님 말씀대로 신비 조직에 대한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조직이 정말 없다면 실로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만약 그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담 군사는 군사로서 만약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시오?”

“전 언제나 만약의 경우도 염두에 둡니다. 선배님께서는 본 방에서 공표한 혈교와 신비 조직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무림맹과 의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당돌한 그녀의 말에 정청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현기수사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상당히 당황했다. 제갈우명조차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어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담 군사에게 하나 물어보겠소. 혈교는 그렇다 치고, 신비 조직은 아무도 얻지 못한 정보를 어디서 얻으신 거요?”

“이미 개방과 남궁세가에는 그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는지 말씀드렸습니다. 무림맹에도 들르게 되면 말씀드릴 생각이었고요.”

개방과 남궁세가에 이미 말했다는 말에 현기수사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다. 곡해한다면 무림맹을 무시하는 말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은 즉각적으로 현기수사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다시 부언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천호방에서는 무림맹과 연락할 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림맹에 먼저 연락을 못 드린 것뿐입니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연락할 사람이 없어 못 전했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시오?”

“무림맹은 정파의 연합체이자 무림의 구심점입니다. 저희 같은 신생 문파가 먼저 연락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전 무림맹에서 방주님을 먼저 공식적으로 불러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말 하나는 정말 잘하는 계집이군…….’

겉으로는 무림맹을 띄워 주면서 오히려 포용성을 보여 주지 못한 무림맹을 질책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현기수사는 뾰족하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자! 이러다가는 음식들이 다 식겠습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식사 먼저하시고 다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남궁원웅은 더 나아가다간 분위가가 차가워질 것을 걱정한 듯 급히 중재에 나섰다. 그러자 담수련은 기다렸다는 듯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이렇게 큰 환대해 주시니 정말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결국 첫 번째 격돌은 현기수사가 담수련에게 한 방 먹은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대로 끝날 리 없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지나자 태웅왕이 술잔에 술을 가득 담더니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악 방주.”

“예.”

“노부가 악 방주에게 술 한 잔 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순간 음식을 먹던 모두의 손길이 멈췄다.

경험이 많은 모두는 태웅왕이 술을 주겠다는 말이 무공을 시험하기 위함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태웅왕 어르신께서 주시는 술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악불군이 만면에 미소를 지며 공손히 답했다.

그러자 태웅왕은 들고 있던 술잔을 휙 돌렸다. 내공에 관한한 천제무황과도 맞먹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있는 그가 팔성이 넘는 공력으로 돌린 술잔은 엄청난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술잔을 넘칠 정도로 담긴 술은 마치 회오리바람이 시작된 호수 물처럼 공중으로 빨려 올라갔다.

‘태웅왕의 내공이 더 높아졌구나…….’

그 모습을 본 남궁세준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술잔을 공중에 띄운 채 저렇게 빠른 속도로 돌리는 것은 초절정 고수들도 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수법이긴 했지만, 남궁세준도 집중하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술이 밖으로 전혀 흐르지 않고 딱 술잔 크기만큼 빨려 올라가 같이 돌고 있는 것은, 최소한 삼 갑자 가까운 내공이 없다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모두의 눈이 악불군에게 향했다.

저렇게 강한 내공에 의해 도는 술잔을 그냥 받을 경우 손 자체가 다 찢겨져 나갈 위험이 있었다.

다행히 다치지 않고 받아 낸다 해도, 술잔이 깨지거나 술을 다 흘린다면 그것 역시 정파 무림인들에게는 큰 결례가 되기 때문이었다.

정파인들은 받을 자신이 없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거절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지 않은 행동으로 여겼다.

“그럼 잘 받게.”

태웅왕은 미소를 지며 술잔을 밀었다.

순간 모두의 표정이 변했다. 태웅왕이 술잔을 너무 빠른 속도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과 태웅왕 간의 거리는 반 장도 채 안 되었다. 거기다 빠르게 보내는 것보다 멈추게 하기 위해선 더 큰 내공이 필요함은 상식이었다.

남궁원웅은 물론 대부분의 남궁세가 간부들은 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악불군에게 창피를 주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그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렇게 빨리 오던 술잔이 악불군의 손바닥 위에서 그대로 딱 섰기 때문이었다.

‘설마 악 방주의 내공이 태웅왕 선배의 두 배가 넘는다는 말인가?’

남궁원웅은 있을 수 없다는 듯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무림인들에게 태웅왕의 내공은 삼 갑자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보인 신위도 그 말이 헛소문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두 배라면 육 갑자라는 말인데, 그것은 무황들의 내공도 상회한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맹렬하게 돌던 술잔의 회전이 천천히 멈추자 잔 위에서 돌던 술도 잔 안으로 떨어졌다.

악불군은 술을 한 입에 털어 넣더니 감사하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어르신께서 따라 주신 술이란 그런지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답례로 저도 한 잔 올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악불군의 내공에 심히 당혹해하고 있던 태웅왕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보인 악불군의 내공으로 자신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술잔을 보낸다면 그는 창피를 당할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자신이 없다고 거절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 그가 대선배였고 먼저 도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받아야지 않겠나. 주게.”

태웅왕은 어쩔 수 없이 승낙을 하고 말았다.

고개를 다시 숙인 악불군은 몸을 일으키더니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태웅왕에게 잔을 건넸다.

똑같이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두는 놀란 듯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악불군의 대협의 풍모에 감탄한 표정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하하하하! 장강의 뒷물결은 언제나 앞물결을 밀어낸다고 하더니, 딱 그 말이 맞구먼. 술은 고맙게 마시겠네.”

태웅왕조차 악불군의 배려에 탄복한 듯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리더니 술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아직 소문을 긴가민가하던 남궁세가의 사람들 뇌리에 악불군이 영웅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악 방주에 대한 소문이 너무 파다해서 좀 과장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오늘 보니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된 것 같습니다.”

남궁원웅이 진짜 탄복했다는 듯 칭찬을 하자 현기수사가 슬쩍 끼어들었다.

“악 방주의 신위는 실로 누구라도 탄복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혹시 악 방주의 사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현기수사의 질문에 모두는 기대 섞인 표정으로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아가씨 예상이 맞았구나…….’

“소군.”

“예.”

“태웅왕 어르신과 현기수사 선배를 만나면 분명 소군의 신분에 대해 물을 거야.”

“그러겠지요.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니까요.”

“남궁세황 어르신도 소군에 대해 약간 의심쩍어하는 느낌을 받았어. 아무래도 소군의 무공에 대한 의구심 때문일 거야.”

“그렇다고 제가 잠룡세가에서 무공을 익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랬다가는 당장 무림 공적이 될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이 사문은 밝히기 어렵다고 해야겠지요.”

“아니야, 그렇게 자꾸 숨기면 의구심만 점점 커질 거야. 정면 돌파하자.”

“정면 돌파요?”

“응.”

“어떻게 말입니까?”

“소군의 사문은 이제부터 천륭검가야.”

“아가씨, 천륭검가는 중원 무림인들이 모두 존경하는 명가인데, 제 말을 믿어 주겠습니까? 그리고 가주님께 천륭검보에 대한 말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천륭검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어. 사문이 천륭검가니까.”

“그래도 거짓을 말하는 것은 제가 싫습니다.”

“왜 거짓이야? 무림사기 어르신들이 소군을 천륭검가를 잇는 주군으로 인정했잖아? 그분들이 분명 말했어. 천륭검가의 후계자는 혈족이 아니라, 천륭검보를 누가 가장 강하게 익혔느냐로 결정된다고.”

담수련과의 대화를 잠시 생각한 악불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의 사문은 천륭검가입니다.”

악불군의 말이 끝나자 청 안은 곧 술렁임으로 시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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