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45화>
345화. 혈맹지약(1)
악불군 역시 천미루주가 객청까지 쉽게 들어온 것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렇다면 남궁세가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알릴 때 알리더라도, 우선 심문해 봐야지 않겠어?”
“직접 하시게요?”
“먼저 이들이 침입한 동선에 대해 좀 자세하게 말해 줘.”
담수련은 종이와 붓을 내밀며 말했다.
“총 열한 명이 침입했습니다. 그중 두 명은…….”
악불군이 종이에 객청을 그리고는 자신이 제압한 자들이 움직인 동선을 설명하자, 담수련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뚫어지게 악불군이 그린 그림을 보던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나를 납치하려면 모두 힘을 합쳐도 쉽지 않을 것을 알 텐데, 왜 분산시켰을까?”
“이쪽으로 다섯 명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본 방의 방도들이 가장 많이 자고 있던 전각이지요. 제 생각으로는 이곳에 불이라도 지를 요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불을 질러서 소군과 호위 무사들을 유인하려고 했다는 건가?”
“그렇게 보았습니다.”
“유인책을 벌일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객청 주위까지 은밀하게 숨어들었다면, 계속 은밀하게 움직여서 납치하는 것이 더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거기다 불까지 지른다면 남궁세가 무인들까지 몰려올 텐데……?”
“제가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생각으로는 이런 동선을 펼칠 이유는 한 가지뿐이야. 소군, 지금 심문이 가능하겠어?”
“지금 말입니까? 너무 늦었는데 우선 주무시고 일어나신 후에 하시지요?”
“아니야, 어차피 잠은 다 깼어. 그리고 지금 확인하지 않으면 잠들기 힘들어.”
확인이라는 말에 악불군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 * *
‘이익! 이놈이 어떻게 점혈을 했기에 혈도가 풀리지를 않는 거지?’
천미루주는 여인들만이 익힐 수 있는 특이한 신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신공의 특징 중 하나가 점혈된 혈도를 풀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각 이상을 노력했지만 악불군의 점혈한 혈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개는 돌릴 수 없었지만 눈동자만은 움직일 수 있는 그녀는, 주위에 같이 온 수하들이 모두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악불군과 담수련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분이야?”
“예.”
“점혈까지 했는데, 가면이나 벗겨 드리지. 얼마나 갑갑하시겠어?”
“여인들이라 손을 대기가 좀 그랬습니다.”
“그래도 이런 경우에는 손 좀 대도 돼.”
악불군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만족한 미소를 지은 담수련은 천미루주의 가면을 벗겼다.
천미루주는 얼굴이 긴 말상을 지닌 중년의 여인이었다. 더구나 태양혈이 불룩 튀어나와 있어 상당히 거세 보였다.
“여인의 몸으로 태양혈이 이렇게 튀어나오다니, 정말 수련을 열심히 하셨나 보네요?”
담수련의 말에 천미루주는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혈도 막아 놨어?”
“예. 입에 독단이 있을지도 몰라서 막아 놨습니다. 전음을 할 정도의 내공을 움직이게 할 테니,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십시오.”
악불군은 눈썹 위에 있는 양백혈을 향해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감히 내 가면을 벗기다니 반드시 너희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전음이 가능해지는 것을 느낀 천미루주는 대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원래 얼굴이란 것이 남들에게 보이라고 있는 거랍니다. 그래, 궁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계신가요?]
[중원을 배역(背逆)한 담무룡의 딸년과는 할 말이 없다.]
[말을 함부로 하시네요? 저희가 당신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미 제압당한 몸. 모욕하지 말고 죽여라.]
[지위가 좀 높은 귀한 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시는 것을 보니 하급 간부인가 보네요.]
[뭐, 뭐야!]
천미루주는 하급 간부라는 말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만큼 자신의 지위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생각보다 빨리 통하네?’
담수련은 그녀가 흥분한 것을 느끼자 슬쩍 다시 말했다.
[당신 정도의 하찮은 무공을 가지고 저를 납치하려고 오다니, 정말 배짱이 좋으시네요?]
[네, 네가 감히!]
자부심이 강한 자에게 무공까지 하찮다고 하자 천미루주의 눈에 살기가 가득 담겼다. 움직일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담수련의 목을 꺾어 버릴 태세였다.
[하긴, 저희 쪽에 심어 놓은 간세가 호응해야 하는데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는 것이 좀 의아하지 않나요?]
순간 천미루주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간세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호호호~ 참 머리도 없으시네. 간세가 진짜 없더라도 있는 척해야 우리가 혼란에 빠지지 않겠어요? 그렇게 정색하며 간세가 없는 듯 행동하시면 오히려 간세가 있다고 알려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이이이…… 익]
천미루주가 당장 발작이라도 할 듯 침음성을 터뜨리자 담수련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소군, 다시 점혈해. 그리고 내일 전부 남궁세가에 인계해 버려.”
“벌써 확인이 끝나셨습니까?”
“응, 아니길 바랐는데…….”
담수련은 그녀들의 동선에서 발견한 한 가지 이유.
그것은 침입한 여인들과는 별개로 자신을 납치할 사람이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미루주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어두워져 있었다.
어수선한 상황에서 자신을 납치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아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 *
천마전의 군사 나채현은 갑작스런 호출에 급히 천마전주의 집무실로 달려왔다.
“주군, 벌써 인시가 넘어가는데 아직까지 안 주무셨습니까?”
나채현은 천마전주가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자, 급히 예를 올리며 물었다.
“이거 한번 읽어 봐라.”
천마전주가 서찰 하나를 던지자 공손히 받은 나채현은 천천히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그 계집들의 짓 같습니다.”
“나도 네 생각과 같다.”
“몇 개 문파나 그것을 받았을까요?”
“최소한 다섯 개 문파에서 받은 것 같다. 더 많을 수도 있겠지.”
열 개 세력에게 보내진 혈교에 대한 정보.
각 문파는 서찰에 대한 것을 최고의 극비로 정하고 무림맹과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 혈교에 정보가 전해진 것이다.
“다섯 개 이상의 문파에게 본 교의 정보가 전달됐다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그 계집들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본 교가 무림 문파에 많은 간세들을 심어 놓은 것은 그 계집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짓을 한 것은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
“교주님께는 보고하셨습니까?”
“좀 더 알아보고 보고할 생각이다.”
“먼저 보고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알았다면 다른 전주님들도 알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그렇다면 그들보다 먼저 보고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이런 정보가 우리에게만 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럼 당장 보고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분타들을 옮겨야 하지 않겠느냐?”
“아직은 옮기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무림인들에게 공격을 받으면 아까운 분타들이 몰살당할 수도 있다.”
“아직 그 정도로 중요한 내용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분타를 옮기려면 시간과 돈이 만만치 않게 들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옮기는 순간 그 계집들이 아직 파악하지 못한 분타까지 알려 주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인은 몇 개 분타를 잃더라도 우선 추이를 살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악불군, 그놈은 그 계집들의 정보를 받았으면 빨리 정파를 모아서 공격을 해야지, 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지금 본 교와 그 계집들에 대해 공표를 한 후에 강호행에 들어갔다고 하니, 곧 가시적인 행동을 보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교주님께서 우선 두고 보라니 두고 보기는 하는데, 난 자꾸 그놈을 죽이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이 든단 말이야.”
“저도 그자의 명성이 너무 높아지는 것 같아서 더 두고 보는 것은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교주님의 명을 어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우리의 정보가 중원 무림 세력에게 들어간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라.”
“존명!”
* * *
“성천이 너는 도대체 경비를 어떻게 선 거냐!”
남궁원웅은 대로한 표정으로 경비대장 남궁성천을 질책했다. 그 자리에 있는 남궁세가의 간부들 모두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가의 손님을 모시는 객청에 열 명이 넘는 살수들이 침입할 때까지 몰랐다는 것은 남궁세가로서는 실로 치욕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죽이신다 해도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남궁성천은 고개를 푹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본 남궁원익이 안쓰러운 듯 끼어들었다.
“성천아.”
“예, 백부님.”
“악 방주님 말이, 그들이 객청까지 걸리지 않고 들어온 걸 보면 분명 조력자가 있을 거라고 하셨다. 인시에 경계를 섰던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조사해라.”
“알겠습니다.”
“빨리 나가 봐라. 도망치면 골치 아프다.”
남궁성천은 남궁원웅을 슬쩍 보았다. 그리고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급히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집법장로인 네가 그렇게 유하니 제자들의 기강이 흐트러진 것이 아니냐?”
남궁원웅이 못마땅한 듯 말하자 남궁원익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가주.”
그러자 이번에는 남궁세열이 끼어들었다.
“예, 숙부님.”
“악 방주가 침입자들을 남궁세가에서 잡은 것으로 하라고 했다던데, 사실이오?”
“그들을 제압한 곳이 남궁세가인데 객(客)인 자신이 제압했다고 하면 본 가의 모양새가 안 좋을 것 같다며, 본 가에서 제압한 것으로 하자고 원익이에게 말했다더군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러자고 제가 허락을 했습니다.”
악불군의 말대로 제압한 여인들이 신비 조직의 일원이 확실하다면 대단히 큰 공을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을 남궁세가의 체면을 생각해 모두 남궁세가에게 돌린다는 것은 여간한 무림인들은 할 수 없는 통 큰 배려였다.
“정말 대단한 청년이로군…….”
남궁세열은 악불군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했다.
“원상 아우.”
“예, 가주님.”
“악 방주를 이곳으로 모셔 오너라.”
남궁원웅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거의 밤새도록 회의에 회의를 지속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는 데는 실패한 그들이었다.
무림맹과 논의 없이 천호방과 혈맹지약을 맺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는 남궁세준의 주장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청으로 돌아온 남궁원웅의 전언에 상황이 달라졌다.
남궁세황이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남궁원웅까지 동의하면서 찬성으로 무게가 실리자, 남궁세준은 더 이상 심하게 반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혈맹지약을 맺는 것으로 하되 조금만 더 악불군에 대해 알아보자는 절충안이었다.
물론 그 조금만이 얼마나 긴 시간이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아침 식사가 준비되면 만날 수 있는 악불군을 굳이 지금 데리고 오라니…….
“가주, 어쩌려고 악 방주를 부르시는 게요?”
놀란 남궁세준이 급히 물었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이신가? 설마 오늘 혈맹지약을 맺을 생각이시오?”
“숙부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상대가 선의로 제안한 혈맹지약입니다. 즉시 받아주는 것과, 다른 문파가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난 후 받아들이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이왕 신뢰를 보여 줄 거면 빨리 보여 주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그래도 간부 회의는…….”
“아우! 가주께서 말하는 데 지금 뭐하는 건가?”
남궁세준이 반박하려고 하자, 남궁세열이 못마땅한 듯 말을 끊었다.
“형님, 간부회의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 한 시진도 안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을 무시하고 혈맹지약을 당장 맺으시겠다는데, 호법으로서 어찌 그냥 보고 있겠습니까?”
남궁원웅은 그동안 간부들의 의견을 매우 존중해 왔다. 그러나 존중과 밀리는 것은 달랐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그는 남궁세준을 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숙부님, 가주의 결정은 간부회의의 결정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