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46화>
346화. 혈맹지약(2)
“소군.”
“예, 아가씨.”
“어떤 결정을 하실까?”
담수련은 상당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남궁세가와 혈맹지약을 맺을 수만 있다면 그녀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은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잠룡세가에서 남궁세가에게 한 행동을 생각한다면 그런 기대를 품는 것조차 미안했다.
“되건 안 되건 저희는 그냥 계획한 대로 밀고 나가면 된다고 봅니다. 기대한 대로 안 된다 하여도 아가씨 잘못은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아버지께서 지은 업보를 자식인 내가 받는 것은 당연한데, 그게 어떻게 나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
“가주님의 업보는 제가 전부 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소군에게 큰 짐을 지게 하는 게 싫은 거야…….’
담수련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모든 계획은 오로지 악불군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의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것이 너무 싫었다.
[주군, 남궁원상 대협께서 객청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때 들려온 흑석영의 전음에 악불군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아가씨, 어쩌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흑 호법이 전음을 보냈는데, 남궁원상 대협께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순간 담수련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 시각에 남궁원상이 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 *
강서성과 절강성의 경계에 있는 태홍장은 혈족끼리 가문을 이어가는 무림 세가이자 돈을 받고 양민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무관이기도 했다.
작은 지역이기는 했지만 자신만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주위 평판도 괜찮았다.
그런 그들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한 시진 전이었다.
동이 틀 무렵 나타난 일단의 무림인들은 다짜고짜 태홍장의 제자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입에서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태홍장주의 앞에 나타난 자는 철무정이었다.
태홍장주는 주위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수십 명의 제자들을 보며 원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지만 반 가까이는 아직 살아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런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냐?”
“천호방의 협력 세력이 되었다고 들었다.”
“지금 다짜고짜 이들을 죽인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란 말이냐?”
“말이 짧구나. 공손하게 대답하지 않는다면 남아있는 놈들도 모조리 죽일 수 있다.”
태홍장주는 이를 바드득 갈았지만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아직 살아있는 제자들을 모두 죽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홍장은 천호방의 협력 세력이 아니오.”
“협력 세력이 아니라고? 내가 듣기로 천호방에서 찾아왔었다고 들었는데?”
“찾아온 것은 맞소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경고만 하고 갔소이다.”
“어떤 경고를 했느냐?”
“본 장의 세력이 절강과 강서에 걸쳐 있었소. 천호방은 절강의 세력을 포기하라고 했소이다.”
“그래서 포기한다고 했느냐?”
“본장 같이 작은 문파가 무림 십왕에 봉해진 천호무적검에게 대항이 가능키나 하겠소이까? 포기한다고 했소이다.”
“포기하는 대신 그들이 너희에게 준 당근이 있을 것 아니냐?”
“본 장이 위험에 처하면 도와주겠다고 했소이다.”
“그게 바로 협력 세력인 거다.”
“그런 정도의 약속은 무림 세력 간에는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일이오. 고작 그걸로 이런 혈겁을 저지르다니, 구천마성에서도 이따위 짓은 하지 않소이다!”
“구천마성 따위와 나를 비교하지 마라!”
철무정의 말에 태홍장주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변했다. 구천마성조차 우습게 보는 세력이 왜 태홍장 같은 작은 문파를 공격한단 말인가…….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오?”
“그건 알 필요 없다. 지금 네가 살아있는 것은 네가 강해서가 아니라, 내가 죽이지 말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내상은 좀 입었지만 신법을 사용할 힘은 아직 남아 있을 게다. 내가 놓아줄 테니 당장 천호방으로 달려가서 태홍장을 구해 달라고 해라.”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질문은 나만 한다. 넌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천호방 놈들을 끌고 오너라. 일주일 안에 안 오면 남은 식솔들은 모조리 죽는다는 것을 명심해라.”
태홍장주는 그때서야 이들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태홍장을 미끼로 천호방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수작이구나?’
속셈을 알게 되자 그는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싸우려면 직접 천호방에 가서 싸울 것이지, 무관에 가까운 작은 문파인 자신들을 왜 이용한단 말인가? 더욱이 그냥 가라고 해도 갈 것인데, 아직 꽃도 피워 보지 못한 제자들을 이렇게 많이 죽일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태홍장주는 혼자만 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싸우고 싶었다.
몸을 부들거리는 태홍장주를 보며 철무정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네놈의 무공으로 덤벼 봐야 내 손짓 한 번이면 그냥 죽는다. 복수하고 싶으면 빨리 천호방에 달려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다친 제자들을 치료해 주시오.”
“일주일은 살 수 있도록 해 주겠다.”
태홍장주는 피를 흘리며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는 제자들을 보더니 훌쩍 몸을 날렸다.
“모조리 죽여라.”
태홍장주가 사라지자 철무정은 차갑게 명을 내렸다.
[군주님, 숨어 지내도 위험한 상황인데 이렇게 대 놓고 사건을 벌이니 걱정입니다.]
철무정과 태양전사들이 태홍장의 제자들을 죽이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금령사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자랐으니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르는 거야. 그놈의 피라는 것이, 실수가 없는 대공 전하의 눈까지 흐리게 만든 것 같네.]
금잔화는 철무정이 태양천의 소천주가 되기에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능력을 가장 중요시하는 대공이었지만 결국 혈족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천호방에서 올까요?]
[악불군은 지금 안휘에 있다고 하니 못 올 거고, 수하들이 몰려오겠지.]
[악불군이 오지 않는다면 소천주와 태양전사들을 이길 수 없을 겁니다.]
[그러겠지. 아마 이번 전투는 크게 이길 거야. 그리고 곧 위기에 봉착하겠지.]
[군주님께서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양전사들이 온 후, 자신이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내가 뭐라고 한다고 들을 것 같으냐?]
[이러다가는 귀중한 전력인 태양전사들을 어이없이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원나라가 몰락한 이유가 힘이 없어서인지 아느냐? 철무정처럼 상황 판단도 못 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 바람에 자멸한 것이다.]
[군주님께서 대공 전하께 지금 상황에 대해 보고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공 전하께서는 지금 새외연합과 만나고 있다. 대화가 잘되면 곧장 중원으로 들어오실 게다. 그때까지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
금잔화는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말투와는 달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공은 나를 신임하면서도 힘은 주지 않았어. 철무정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알게 되면, 결국 나밖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땐 어쩔 수 없이 태양천의 숨은 힘을 내게 물려줄 수밖에 없을 거야.’
금잔화, 그녀는 도대체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 * *
남궁세가의 회청에 도착한 악불군과 담수련은, 분위기가 상당히 딱딱하자 조심스럽게 포권을 했다.
“악 방주, 어서 오십시오.”
남궁원웅은 급히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했다.
“어르신들이 모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중요한 안건이 있어 논의가 좀 길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너무 일찍 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악 방주와도 연관이 있는 논의였습니다. 우선 앉으십시오.”
악불군과 담수련이 자리에 앉자 남궁세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주, 제가 먼저 악 방주께 물어볼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남궁원웅은 악불군을 먼저 쳐다보았다.
“전 괜찮습니다.”
“악 방주께서 승낙하셨으니 물어보십시오.”
“악 방주.”
“예.”
“혈맹지약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는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만약 본 가에 위기가 닥친다면 악 방주가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올 건가?”
“위험하다는 말을 들으면 무조건 달려올 것인지, 아니면 도움을 청해야만 달려올지는 남궁세가에서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천호방은 이미 절강성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아는데, 굳이 혈맹지약을 맺으려는 이유가 뭔가?”
“본 방이 구천마성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는 것은 아십니까?”
“말을 들었네.”
“저는 그 조약을 성실히 지킬 생각입니다. 하지만 구천마성도 저랑 같은 생각일지는 장담을 못 하겠더군요. 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욕심은 쉽게 버릴 것 같지가 않으니까요. 본 방과의 약속을 지킨다면 결국 돌파구는 안휘성이나 호남이 될 것입니다. 어느 쪽이건 혼자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구천마성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것을 예로 든 것입니다. 제가 걱정하는 곳은 혈교입니다. 이미 놈들은 천하 곳곳에 근거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이 아직까지 조용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결국 준동을 할 것입니다. 그때 도움을 청할 곳이 남궁세가밖에 없더군요. 물론 남궁세가 역시 가장 가까운 문파가 천호방이니 서로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궁세준은 악불군의 말에서 어떤 허점도 찾을 수 없자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악 방주는 정파를 표방하면서 왜 무림맹에 가입을 하지 않는 건가?”
“무림맹은 영웅회에서부터 이어진 결속체입니다. 남궁세가처럼 큰 공이 있는 문파와는 달리, 천호방은 영웅회에 어떤 도움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처지에 들어가서 발언권이나 제대로 있겠습니까?”
“그럼 무림맹에서 위치가 별 볼 일 없을 것 같아서 가입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특별한 권한을 가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서 칼받이를 하는 것도 원치는 않습니다. 거기다 혈교나 신비 조직을 추적하는 일도, 무림맹에 들어가면 독자적으로 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혈교와 신비 조직을 악 방주가 직접 상대하겠다는 말인가?”
“그 두 세력을 없애지 않는다면 무림에는 평화란 없을 것입니다. 전 그 두 세력을 제거하는 데 전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남궁세준이 놀란 듯 잠시 멈칫하자 남궁세열이 끼어들었다.
“악 방주의 진심을 알았으니 아우는 그만 묻게. 혈맹지약은 말 그대로 혈맹일진대, 자꾸 그러면 결례네.”
“전 괜찮습니다.”
“아니네, 그 정도면 할 말은 다 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네.”
말을 마친 남궁세열은 남궁원웅을 보며 말했다.
“이제 가주님의 결정을 말하시게나.”
악불군의 대답으로 더욱 마음을 굳힌 남궁원웅은 직접 술잔에 술을 따라 악불군에게 건네며 말했다.
“본 가는 천호방과 혈맹지약을 맺기로 결정했네. 우리 두 문파의 우정이 변치 않기를 바라겠네.”
“저희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악불군은 두 손으로 잔을 받으며 공손히 목례를 했다.
“두 문파의 관계가 이렇게 돈독해졌으니 저도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기쁨으로 만면에 미소를 지은 담수련이 끼어들었다.
“말해 보시게.”
“혈교와 신비 조직을 상대하기에 본 방만의 힘은 많이 부족합니다. 저는 남궁세가에서 가장 믿을 만한 후기지수 열 명을 선별해, 방주님이 혈교와 신비 조직을 제거하는 데 힘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궁원웅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담 군사 말대로 선별해 둘 것이니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게.”
‘됐다. 남궁세가에서 후기지수들까지 보낸다면 정파를 설득하기는 이제 쉬워질 거야.’
하지만 담수련은 기쁨과 함께 걱정도 같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부터 강적들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을 이기기만 한다면, 천하의 누구도 악불군과 적이 되는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