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51화>
351화. 변화(1)
마차 옆에서 천천히 말을 몰며 전음으로 담수련에게 개방의 거지에게 들은 정보를 전한 악불군은 답을 기다렸다.
태홍장에서 발견된 시신은 태홍장 식솔들 칠십여 명과 진태욱이 이끌고 온 무사 삼십여 명 등 백여 구가 넘었다.
근래에 없던 상당히 큰 혈겁이었다.
[전부 죽은 것은 어떻게 안 거야?]
[부식을 대던 상인이 태홍장에 갔다가 시신을 보고 관에 신고한 모양입니다.]
담수련은 마차 안, 악불군은 마차 밖에서 천천히 말을 몰며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그때까지 분타에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네?]
[상인이 시신을 발견했다는 시간과 분타주가 분타를 떠난 시간을 계산해 보면, 태홍장에 도착하자마자 공격을 받고 모두 당한 것 같습니다.]
[상산현 분타주는 백인막 출신이지?]
[예.]
[태상호법님께서 내게 말한 적이 있는데, 백인막의 살수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칠 수 있는 수련을 받는다고 했어. 삼십 명이나 되는 수하들까지 있는데 도망치지 못했다면, 그들이 월등하게 무공이 높았다고 봐야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이렇게 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담수련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태홍장은 천호방에서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공언했던 문파였다. 그런데 거의 멸문됐고 심지어 도와주러 간 분타원들까지 모두 죽었으니, 천호방에게는 크나큰 악재였다.
천호방을 절강의 패자로 인정하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이나 아직 절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무림 세력들에게는 다시 한번 절강에 눈독을 들일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강서로 간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소군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어?]
[태홍장의 혈겁을 일으킨 세력이 어디냐에 따라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악불군의 답에 담수련은 감탄한 듯 말했다.
[역시 소군답네. 맞아, 어떤 자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에 따라 대응이 달라지는 것이 맞겠지. 그럼 소군 생각에, 어떤 세력이 이런 짓을 저지른 것 같아?]
[우선 신비 조직은 이런 식의 혈겁을 직접적으로 일으킨 적이 없었다고 하니 제외해도 될 것 같습니다.]
[혈교 역시 지금 시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이유는 없을 것 같아.]
[그렇다면 이제 구천마성과 태양천 두 세력만 남는군요?]
[구천마성은 우리와 불가침조약을 맺었어. 물론 믿을 수 없는 곳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파기할 거면 굳이 만통광심이 우리를 직접 찾아오는 수고를 한 것이 말이 안 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범인은 태양천으로 압축되고 말았다.
[아가씨, 계획대로 그냥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짜 태양천이 천호방을 노린다면 분타들이 위험하지 않을까?]
[싸우지 못하게 해야지요. 무림맹에서 태양천을 추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림맹에 태양천이 나타났다고 정보를 주면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입니다.]
악불군의 전음을 들은 담수련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나타났다. 지금 악불군이 보이는 모습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지도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살짝 창문을 열었다.
갑자기 악불군의 얼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창문이 열리자 악불군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이런 것일까…….
사실 그도 담수련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담수련과 악불군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둘은 눈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담수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문을 닫았고, 악불군은 말을 몰아 선두로 돌아갔다.
잠깐의 마주침으로 서로의 생각과 이후의 행보까지 합의를 본 것이었다.
* * *
“안휘성 거점이 네 곳이나 파괴됐다는 것이냐?”
부군사 염후관의 보고를 들은 나채현은 검미를 좁히며 반문했다.
“악불군과 그 수하들이 합비에서 안휘 북부로 이동하면서 양민들을 괴롭히는 세력들을 제거하고 있는데, 거기에 본 교의 거점들이 있었습니다.”
“악불군이 본 교의 거점인지 알고 그러는 건지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른다는 말이냐?”
“용서하십시오. 아직 분석이 안 되고 있습니다.”
“감시는 하고 있느냐?”
“예, 열 명 정도가 멀찌감치에서 감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으냐?”
“다음 행선지가 하남이라고 스스로 밝혔으니 개방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방을 가는데 왜 그 길로 가지?”
“하남으로 가려면 지금 가는 길이 가장 지름길이긴 합니다.”
“그냥 갈 때 얘기지. 지금 천호방 깃발을 들고 움직인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채현의 반문에 염후관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듯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요. 그대로 간다면 흑선산장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될 텐데, 스스로 정파라고 주장하면서 깃발까지 날리며 들어간다면 거의 싸우겠다고 도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놀라운 놈이구나…….”
나채현은 악불군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군사님, 설마 악불군이 진짜 흑선산장과 싸우려고 하는 걸까요?”
“지금 남궁세가에서 가장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곳이 흑선산장이다. 악불군 이놈이 흑선산장을 없애 주는 조건으로 남궁세가와 모종의 거래를 한 것 같다.”
천마전의 군사답게 그는 악불군의 동선만으로 정확하게 담수련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지금 악불군을 따르는 천호방도들이 사십여 명쯤 된다고 보고받았습니다. 그 정도로 흑선산장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어렵지. 하지만 악불군 그놈의 지금까지의 행태를 본다면 상식적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만약 그 정도 수하를 이끌고 흑선산장과 싸워 이긴다면 악불군 그자는 전주님께 큰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나채현도 그 문제로 고심을 한 적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긴다면 분명 최대의 적이 되겠지만 아직은 추측일 뿐이다. 감시하는 수하들에게 잠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전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염후관이 나가자 나채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지도를 펼치더니, 악불군에 의해 사라진 혈교의 정보 거점들이 있던 장소를 하나씩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놈…… 본교인지 알고 공격했어…….”
* * *
“장주님, 천호무적검의 동선이 심상치 않습니다.”
흑선산장의 장로이자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적미신군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를 했다.
“본 장의 영역과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지금 속도라면 오늘 중으로 본 장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자 청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도 문파로서 원나라 시절 태양천과 어찰단의 압박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실로 듣도 보도 못했던 애송이가 갑자기 벼락출세하듯 큰 명성을 입더니 흑선산장까지 우습게 보는 것 같자, 어이가 없다 못해 화까지 날 정도였다.
“몇 명 정도라고 하더냐?”
“겉으로 보이는 수하들의 수는 이십여 명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숨어서 호위하는 자들이 이십여 명 정도 더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들 역시 악불군이 안휘에 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첩자들을 보내 동태를 살피게 하고 있었다.
“사십 명이라? 정말 그 정도의 수로 본장에 시비를 걸 생각이란 말이냐?”
일성마황은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호방 깃발을 높이 들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냥 지나칠 생각이라면 당연히 저희에게 사신을 보내 허락을 구해야 했습니다. 만약 방문을 원한다면 배첩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를 고려하면 지금 저들이 우리를 도발하는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러자 얼굴 전체에 섬뜩할 정도로 많은 자상을 가진 노인이 일성마황에게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장주님, 제가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건방진 그 애송이에게 천외천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오겠습니다.”
그는 장로인 칠보추혼이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자신이 없다면 이런 도발은 하지 않는다.”
“어린놈이 큰 명성을 얻자 세상 모두가 자신의 밑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이놈이 본 장의 세력권에 들어왔는데도 그냥 둔다면 천하가 우리를 조롱하고 얕볼 것입니다.”
칠보추혼이 다시 외쳤지만, 일성마황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을 들더니 다시 적미신군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우리가 먼저 건드리지 않는다면 천호무적검이 본 장에 시비를 걸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칠보추혼 장로 말대로 천하가 우리를 우습게 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과 싸운다면 본장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떡했으면 좋겠는지 묻는 것 아니냐?”
“우선 외당 당주를 보내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만약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면 본장의 영역임을 알리고 정식으로 허락을 받으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정이 대단히 폭급하기로 소문난 일성마황이 이렇게 신중한 것은, 지금 흑선산장이 큰 전쟁을 벌이기에는 상황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적미신군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흑선산장의 주변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빨리 말해 봐라.”
“장주님, 그동안 본장은 태양천에게 많은 치욕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본장의 존속을 위해서였습니다. 이번 결정은 장주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이 맞다 사료됩니다.”
분명 악불군이 흑선산장의 영역을 천호방의 깃발까지 날리며 의기양양하게 지나가는 것을 그냥 둔다면 흑선산장의 전력은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치욕이지만 그 무게가 달랐다.
태양천은 천하 전체를 무릎 꿇린 역대 최강의 세력이었다.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해도 크게 창피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악불군에게 굽힌다면 그것은 천하의 조롱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문파로서 존립조차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고심하던 일성마황은 결단한 듯 입을 열었다.
“여기서 천호방 같은 신생 문파에게까지 밀린다면 흑선장은 존속의 의미가 사라질 것이다. 천호방이 본 산장의 영역 가까이 오면, 우선 온 이유를 묻고 허락을 받으라고 경고해라. 이를 무시하고 세력권으로 들어오면 그때 공격한다.”
그래도 마황으로 불리는 그로서는 이립도 안 된 악불군에게까지 머리를 숙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전력 손실은 좀 있겠지만 악불군을 제거한다면 십왕을 죽인 문파로서 더 클 수도 있다는 오판을 한 것이다.
일성마황이 결정을 내리자 흑선산장은 전쟁 준비로 바빠졌다.
* * *
[주군, 척후를 나갔던 수하들이 돌아왔습니다.]
흑석영의 전음을 들은 악불군은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다고 합니까?]
[흑선산장에서 싸우기로 결정한 것 같다고 합니다.]
[어떤 준비를 하고 있답니까?]
[비상을 걸고 외부로 나갔던 흑선산장의 모든 무인들을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아마 전력을 정비한 후 저희를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싸움은 대규모 집단전이 될 듯하니, 방도들에게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흑석영이 사라지자 악불군은 대독관에게 말했다.
“대 호법.”
“예.”
“흑 호법이 보고했습니다.”
“흑선산장에서 싸우기로 결정한 모양이군요?”
악불군의 표정을 보자 대독관은 상황 파악이 된 듯 말했다.
“안타깝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악불군은 일성마황이 흑선산장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겠다고 하면 굳이 전쟁까지 벌일 마음은 없었다.
남궁세가가 바라는 것은 흑선산장을 모두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안휘에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도 자신의 생각이 그저 희망일 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작은 문파도 아니고 백대고수의 상위권에 있는 초절정 고수가 장주로 있는 문파가 말 몇 마디에 문파를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모두에게 전투 포진을 하라고 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말을 마친 악불군은 고개를 돌려 마차를 호위하며 따라오는 방도들을 쳐다보았다.
‘휴우~ 이들 중 몇 명이나 죽을까? 내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권리가 있는 것일까?’
오는 동안 매일 얼굴을 보던 방도들을 보며 악불군은 안타까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