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52화>
352화. 변화(2)
“어디쯤 오고 있느냐?”
오십여 명의 수하들을 대동한 칠보추혼은 전투태세를 갖추게 한 후 흑선산장의 무력대 대장인 표태인에게 물었다.
“보고에 의하면 한 시진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관도를 타고 오고 있느냐?”
“예. 천호방 깃발도 높이 들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놈이 진짜 우리와 전쟁을 할 생각인가?”
간부회의에서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악불군에 대한 소문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 소문이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무림에서 수십 년을 구른 노회한 마도인이었다. 약한 자가 이런 행동을 할 리 없다는 경험이 그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매복에 들어가라고 할까요?”
집단전에서 먼저 유리한 장소를 선점하는 것은 군이나 무림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표태인의 말에 칠보추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치해라.”
“예!”
칠보추혼의 명이 떨어지자 수하들은 매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삼십여 명이 주위 은밀한 곳에 숨어들었다.
“궁수들에게 활을 재고 대기하라고 해라.”
지금 있는 자들 말고도 이십여 명의 궁수들이 십장 정도 떨어진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
칠보추혼은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가 받은 정보가 맞다면 천호방의 수하들 수가 모두 사십여 명에, 마차를 호위하는 여무사들이 열 명 정도라고 했다. 더욱이 천호방 방도들이 낭인들 위주로 조직됐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반면 흑선산장의 수하들은 잘 수련된 정예들이었다. 객관적으로 절대 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칠보추혼은 왜 이렇게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 * *
“군사님, 예상대로 천호무적검이 흑선산장과 전쟁을 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급히 달려온 염후관의 말에 나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하냐?”
“예, 보고에 의하면 흑선산장 역시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본 듯, 비상을 걸었다고 합니다. 총단에 보고를 해야 할까요?”
“네가 혈뇌 님을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
“그게 무슨?”
“혈뇌 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실 거라는 말이다. 부군사.”
“예!”
“천호무적검과 흑선산장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 것인지 분석은 끝냈느냐?”
“책사들 간에 의견이 분분해서 아직 결론은 내지 못했습니다.”
“어떤 의견들이 있었느냐?”
“천호방 전체도 아니고 호위무사 몇십 명 데리고 수하들이 삼백 명이 넘는 흑선산장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좀 우세했습니다. 게다가 객관적으로도 흑선산장에는 초절정급의 마두가 열 명 가까이 있지만 천호방에는 그런 고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흑선산장이 이길 것이라고 결론을 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동안 천호무적검이 보인 위상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 무사할 수 없는 상황을 모두 돌파해 냈습니다. 더구나 천호방을 세우는 과정을 보면 상황 판단과 결단력 역시 대단히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자가 불리한 싸움을 하겠느냐? 란 의견이 모두의 공감을 받으면서 결론이 미루어졌습니다.”
“부군사, 네 개인적인 생각은 어떠냐?”
“저도 솔직히 아직 판단을 못 하고 있습니다. 책사로서 객관적인 전력을 믿는 것이 맞겠지만 천호무적검은 그동안 저희들의 예측을 매번 틀리게 만들었습니다.”
염후관의 말에 나채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흑선산장은 이번에 멸문할 것이다.”
“……전 군사님의 판단을 믿습니다만,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채현은 그의 반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악불군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악불군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냉철한 그가 악불군의 자신감을 분석보다 더 믿는다는 것은, 악불군의 존재감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였다.
* * *
“방주님, 흑선산장입니다.”
대독관은 멀리 흑선산장을 나타내는 깃발이 보이자 급히 악불군에게 말했다.
“대 호법.”
“예!”
“생각보다 준비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그렇습니다.”
악불군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지금 그를 따라다니며 감시하는 자들의 수는 대충 이십여 명이었다. 그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멀리서 따르는 자들까지 합한다면 오십 명을 상회했다.
최소한 이십 개 이상의 문파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무림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는 첫 포문을 여는 날이 될 것이다!’
악불군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자신을 따라오며 감시하는 자들을 매우 싫어하는 그가 지금 감시자들을 그대로 용인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을 통해 자신과 적이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천하에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담 군사의 마차를 호위하는 데 전력투구하십시오.”
“방주님 혼자 상대를 하시기에는 적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흑 호법과 흑 호법이 이끄는 방주 호위 이십 명이 저를 도울 것이니 혼자는 아니지요. 그리고 담 군사님 신변이 불안해지면 제가 전력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의 행렬은 기다리는 흑선산장의 무사들과 십여 장 남짓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멈추시오!”
앞으로 나선 표태인의 외침에, 선봉에서 행렬을 이끌던 대독관 역시 팔을 들어 행렬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전 흑선산장의 장로인 곡상수라고 합니다.”
칠보추혼은 우선은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한 사람씩 죽인다는 칠보추혼 곡 선배님을 이렇게 뵈니 영광입니다. 전 천호방의 방주인 악불군입니다.”
칠보추혼은 악불군의 모습을 한 번 훑었다.
‘소문대로 겉보기에는 매우 약해 보이는데, 왜 느껴지는 기세는 이렇게 강렬한 거지?’
악불군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에 가슴이 저려 오자, 칠보추혼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이런 강력한 기세는 엄청난 내공이 바탕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악불군은 전혀 내공을 흘리지 않고 있음에도 그를 압박할 정도의 기세를 뿜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흑선산장의 세력권입니다. 악 방주님께서도 아시겠지만, 강호에는 나름의 불문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나간다면 모르지만, 천호방의 깃발까지 올리고 수십 명의 수하의 호위를 받으면서 다른 문파의 영역에 들어간다면 먼저 허락을 받는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제가 허락을 해 달라고 하면 허락해 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악불군의 반문에 칠보추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악불군의 행렬을 감시하는 수하의 보고에 따르면, 흑선산장 외에도 꽤 많은 문파의 수하들이 지금 악불군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도 다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선 정식으로 본장에 이곳을 통과하는 이유가 적힌 문서를 보내시는 것이 순서겠지요.”
악불군의 한마디에 곧장 허락했다가는 흑선산장이 겁먹었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 뻔했다. 그는 한 번은 버텨 보기로 했다.
“전 흑선산장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이유가 됐습니까?”
칠보추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냥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흑선산장을 방문하는 것이라면 절대 좋은 목적이 아님은 분명했다.
좋은 목적이라면 배첩을 먼저 올렸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본장을 찾아오실 생각이셨다면 배첩 정도는 저희에게 보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첩을 보낼 생각도 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방문하는 이유를 적어야 하는데, 흑선산장에서 반길 이유가 아닌지라 직접 얼굴을 보고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반길 이유가 아니라는 말에 칠보추혼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선자불래라는 말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유의 선악을 불문하고 방문을 원하면 배첩을 보내는 것은 강호의 도의이자 무림의 예의입니다. 저는 흑선산장의 장로로서, 배첩이 도착하기 전에는 본장의 세력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관도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통행하라고 나라에서 만든 길입니다. 본방이 숨어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관도를 따라 정정당당히 움직이는데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좀 월권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배첩은 흑선산장이 있는 양구에 들어가 정중하게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비켜 주시지요.”
“본장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들어오고 싶다면 천호방 깃발을 내리고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오십시오.”
“흑선산장은 정치를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보통 시비가 붙는 경우 명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 하시는 행동은 누가 봐도 흑선산장에서 본방에 시비를 거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저보다는 흑선산장이 욕을 먹게 되겠지요.”
“남의 문파의 영역에 허락도 안 받고 이런 식으로 들어온다면 누구라도 막을 것입니다. 당연히 시비가 생긴다면 천호방의 책임임이 분명한데 어찌 명분이 천호방에 있다는 것입니까?”
“확실히 흑선산장은 본방과는 보는 관점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제 알아들었으니 비켜 주시지요.”
“악 방주! 지금 내가 한 말을 못 들으셨소? 아니면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겁니까? 만약 경고를 무시하고 더 들어온다면 본장으로서는 전쟁도 불사할 수밖에 없소이다.”
칠보추혼이 내공을 끌어 올리며 싸울 태세를 보이자 악불군은 안타깝다는 듯 머리를 살래살래 젓더니, 주위에 숨어 있는 감시자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음성에 내공을 담아 말했다.
“흑선산장에서 결국 본방과 척을 지겠다고 결정을 하시니 제 마음이 많이 안 좋군요. 하지만 저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자신의 검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그러자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더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기어검…… 예상대로군.’
이미 천호무적검의 이기어검은 그를 대표할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일성마황은 악불군이 이기어검을 사용할 때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칠보추혼은 공중으로 떠오른 천륭검을 보자 이제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무기를 빼 들더니 커다랗게 소리쳤다.
“공격해라!”
순간 칠보추혼의 뒤에 포진하고 있던 자들이 몸을 날렸다.
흑선산장의 무사들이 공격을 시작하자, 대독관을 비롯한 호위무사들은 같이 공격을 하지 않고 뒤로 몸을 날리더니 담수련이 탄 마차를 둘러싸며 방어진을 구축했다.
쉬이이이익!
“으아악!”
“아악!”
그리고 공중에 떠 있던 악불군의 검이 그대로 낙하하더니 공격하는 무사들의 몸을 사정없이 관통하며 지나갔다.
‘이놈들, 뭐 하는 거야?’
이기어검은 천고의 절기이기는 하지만 다수와 싸울 때는 약점이 하나 있었다. 검이 공중을 날며 적을 공격하는 동안, 그 검을 조종하는 자에게는 방어에 큰 허점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격의 시작은 숨어 있는 궁수들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악불군을 향해 날아들어야 할 화살이 전혀 날아들지 않았다.
[뭐 하는 거냐! 빨리 쏴라!]
칠보추혼은 급히 전음을 날렸다. 하지만 화살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고, 전음에 대한 답도 없었다.
흑석영이 이끄는 최고의 살수들이 이미 궁수들을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칠보추혼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좌우에 매복한 수하들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태인!]
칠보추혼의 외침에 당황하고 있던 표태인이 정신이 든 듯 급히 답했다.
[예!]
[아무래도 매복한 수하들에게 뭔 일이 생긴 것 같다. 내가 천호무적검을 공격할 것이니, 넌 수하들과 함께 저 마차를 공격해라.]
칠보추혼은 악불군을 두고 모든 무사들이 마차의 방어를 더 우선시하자, 마차를 공격한다면 악불군을 당황하게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노회한 강호인 다운 판단이었지만, 상대가 악불군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명을 내리고는 즉시 자신의 절기인 칠보단혼혈살도를 시전하며 악불군을 공격해 들어간 칠보추혼은 단번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직감했다.
천륭검은 지금 수하들을 제거하고 있었고, 악불군은 무기도 없이 천륭검을 조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 정신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수하들의 몸을 관통하며 날아다니던 악불군의 검은 그가 공격에 들어가자마자 악불군의 손으로 돌아왔다.
정말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그리고 그 검은 공격해 들어오는 칠보추혼을 향해 찔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