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53화>
353화. 흑선산장(1)
수백 번의 생사결을 겪었던 칠보추혼이지만, 결단코 이렇게 빠른 검은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자신이 먼저 공격했고, 그에 반해 악불군은 이기어검을 펼치느라 빈손에 자세도 허점투성이였다.
그런데 순식간에 그의 손으로 검이 날아왔고, 어느새 그의 검끝은 그의 도기의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들며 그의 심장을 향해 찔러 왔다.
설명은 길었지만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치 칠보추혼이 스스로 악불군의 검에 자신의 심장을 찔러 간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크윽……!”
칠보추혼 역시 자신이 고작 일 초 만에 당한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악불군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더니, 그대로 피를 분수처럼 쏟으며 앞으로 엎어졌다.
‘역시 살인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야.’
악불군은 절명한 칠보추혼을 힐긋 보더니 몸을 돌렸다. 표태인이 이끄는 삼십여 명의 흑선산장의 무사들과 마차를 방어하던 천호방도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악불군에게는 너무 간단히 죽어 나갔지만, 그들이 절대 약한 실력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천호방도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피해는 흑선산장이 더 컸다. 천호사기군은 천륭검가의 후손들답게 상당히 탄탄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이 펼치고 있는 방어진은 담수련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진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러서라!”
표태인은 악불군이 몸을 돌리자 얼굴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칠보추혼이 너무 간단히 죽는 것을 보고는 전의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겨우 열댓 명만이 남은 흑선산장의 무사들 역시 죽음의 공포를 느낀 듯 겁먹은 눈으로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계속 싸울 생각이 있으십니까?”
저벅저벅-
앞으로 다가온 악불군은 그들 앞에 서더니 표태인을 보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표태인은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역시 더 싸워 봐야 죽을 뿐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돌아가십시오. 또 공격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스스로 자결하는 꼴이 될 뿐입니다. 전 더 이상 우리의 앞길을 막지 않기를 바랍니다.”
표태인은 가라는 말에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이 살아났다.
“그럼 저희들은 가 보겠습니다.”
악불군의 마음이 변할 것이 두려운 듯 재빨리 포권을 한 그는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수하들 역시 내 발아 살려라 속으로 외치며 급히 표태인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대 호법.”
“예!”
“죽은 방도들을 묻어 주고, 다친 사람들 치료한 다음 출발합니다.”
방도들 중 악불군의 신위를 처음 본 방도들은 전율하며 공손히 악불군에게 허리를 굽혔다.
몸과 마음으로 완전히 승복한 자발적인 공경이었다.
* * *
흑선산장과 천호방의 격돌은 순식간에 전 무림으로 퍼져 나갔다.
정파에게 흑선산장은 눈엣가시였다. 특히 남궁세가로서는 자신의 세력권 안에 언제든지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마도 문파가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흑선산장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전력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흑선산장과 천호방이 정면으로 부딪쳤다는 소식에 천하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우선 첫 전투에서 흑선산장이 완벽하게 패배했지만, 아직 승패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흑선산장에는 일성마황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악불군이 일성마황까지 이긴다면 이제 더 이상 악불군의 실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자는 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천호방이 누구도 얕볼 수 없는 힘을 가졌음을 모두의 뇌리에 각인시킬 것이었다.
반나절을 더 행군한 악불군 일행은 작은 현에 도착해 객잔 전체를 빌렸다.
다행히 손님이 많지 않았고, 있던 손님들도 천호방이라는 말에 선선히 다른 객잔으로 옮겼다.
흑선산장이 야습이라도 할 경우 객잔에 있던 사람들이 죄 없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주군, 일 마장 밖에서 흑선산장의 무인들이 결집하고 있습니다.]
경계 무사만 남겨 둔 채 모두를 쉬게 한 악불군이 담수련과 함께 객잔에 딸린 주루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흑석영의 전음이 들려왔다.
[공격할 것 같습니까?]
[아직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정황으로 미루어 공격하긴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전력은 어느 정도 됩니까?]
[처음 우리를 막은 자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우선 칠보추혼에 맞먹는 고수가 세 명 정도 됩니다. 거기에 그 수도 백 명 가깝습니다.]
[추 호법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인막의 초특급 살수 네 명이 마음만 먹으면 한 문파도 도륙 낼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맞습니까?]
[문파 전체 도륙까지는 몰라도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는 있습니다.]
[오늘은 담 군사께서 많이 피곤하십니다. 조용한 밤을 보내고 싶군요.]
흑석영은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은 듯 즉각 대답했다.
[지금 당장 시작할까요?]
[그렇게 하십시오.]
[존명!]
흑석영이 사라지자 담수련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흑 호법이 뭐래?”
“흑선산장의 무사들 백여 명이 일 마장 정도 밖에 있다는군요.”
“결국 끝까지 가 보자는 거네?”
“흑선산장으로서는 여기서 더 밀리면 문파를 닫아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남쪽에 있는 구천마성이나 서쪽에 있는 혈해사계와는 달리 흑선산장은 중원의 중앙에 있는 마도 문파 중 가장 큰 문파야. 아마 전 무림이 어떻게 될지 촉각을 세우고 있을 거야.”
“아가씨께서 예상하시고 있던 일 아니었습니까?”
담수련이 이번 강호행에서 목표로 설정한 문파는 모두 두 곳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흑선산장이었다.
남궁세가 때문이 아니라 악불군과 천호방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이미 제거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일 마장 밖이면 오늘 밤 기습할 확률이 높지 않아?”
“거기에 대한 대비는 이미 했습니다. 하지만 기습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책이라도 세워 놨어?”
“방주 호법들에게 실력 발휘 좀 하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악불군은 배교의 수법을 가미하여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 낸 여러 살수 수법을, 백인막 살수 출신들이 익힐 수 있도록 추명혼에게 전수했었다.
그리고 역시 그 수법들을 발군의 능력으로 빨리 받아들인 자들이 일 호부터 이십 호까지의 특급 살수들이었다. 특히 상위 열 명은 예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능력이 성장해 있었다.
* * *
“준비는 다 됐지?”
흑선산장의 호법인 절심마자는 장로인 십미호귀와 암권마를 보며 물었다.
“준비됐습니다. 지금 주루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다고 하니 삼경쯤에 기습하면 알맞을 것 같습니다.”
십미호귀는 감시자들의 보고를 전했다.
“술판? 이놈들이 감히 본 장의 세력권에 들어와 수십 명이나 죽인 주제에 술판까지 벌이고 있단 말이냐?”
절심마자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십미호귀 역시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보고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내 이놈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십보추혼 호법의 무공이 우리보다 약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따라간 수하만도 칠십 명이었습니다. 절대 얕볼 전력이 아니라고 봅니다.”
암권마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하자 십미호귀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지금 우리는 십보추혼 호법이 이끌던 전력의 두 배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절심마자 호법의 무공은 십보추혼 호법의 무공을 능가하고 우리 역시 비슷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데, 어찌 그리 약한 소리를 하는 거냐?”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그놈들이 지금 우리가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을 모른다고 어떻게 장담하냐? 만약 알고 있다면 우리가 기습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오히려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냥 두고 보자는 말이냐?”
“그만!”
둘의 대화가 격해져 가자 절심마자가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암권마가 사과하자 절심마자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그놈들이라고 척후를 안 뒀다고 볼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곳은 상당히 외진 곳이고, 그놈들이 있는 곳에서 일 마장이나 떨어져 있다. 보고에 따르면 그놈들이 척후를 보낼 수 있는 인원은 열 명 정도다. 그 수로 사방 일 마장을 뒤져서 여기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이다.”
천호방의 무인들이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절심마자의 말은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백인막의 살수들의 추적 능력이었다. 백 명이 넘는 흑선산장의 무사들은 많은 곳에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은 그들이 이곳을 찾는 데 길잡이가 되었다.
“수하들은 푹 쉬고 있느냐?”
삼경이 가까워 오자 암권마는 각 대의 조장들을 불러 점검에 들어갔다.
“예.”
싸움이 시작되기 전 쉬게 하여 체력을 보충하는 것은 군이나 무림이나 다르지 않았다.
“이번 싸움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두에게 죽기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켜라.”
“한 명이라도 죽이고 죽을 결심들을 하고 있습니다.”
“삼경이 거의 다 되어 가니 이제 슬슬 준비를 시켜라.”
“예!”
그때 대장 한 명이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장로님, 뭔가 이상합니다.”
암권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계속되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냐?”
“외곽에 경계를 서던 수하들이 돌아오지를 않고 있답니다.”
“언제부터냐?”
“일각 전에 교대했는데, 교대한 무사들이 오지를 않았다고…….”
“일각? 당장 비상을 걸어라.”
“예!”
하지만 그들의 대처는 이미 늦은 듯했다.
“살수다!”
“적이다!”
밖에서 커다란 외침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냐?”
중앙 천막에 있던 절심마자가 밖으로 나와 크게 소리쳤다.
“살수가 나타난 모양입니다.”
그의 천막을 경비하던 무사 한 명이 급히 답했다.
“살수? 어떤 미친놈이 감히 흑선산장을 건드린단 말이냐?”
대로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하들의 천막 중 한 곳에서 불이 난 것이다.
“장로들은 어디 있느냐!”
“십미호귀 장로님께서는 처음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셨고 암권마 장로님은 조장들을 만나고 계셨는데, 지금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컥!”
보고하던 무사는 갑자기 단말마를 터뜨리더니 앞으로 엎어졌다.
절심마자는 엎어지는 그의 뒤로 몸을 날렸다. 무사의 등에 박힌 단검을 던진 방향을 향해 달려간 것이었다.
“이놈 봐라? 보통 살수가 아니구나!”
분명 단검을 던진 자의 기를 느끼고 날아왔지만, 그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초절정 고수인 그에게 기를 잡혔음에도 감쪽같이 사라질 정도의 살수는 천하에 많지 않았다.
“호법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그의 옆으로 십미호귀가 떨어지며 물었다.
“어떤 놈들인지 찾았나?”
“아무래도 특급 살수 같습니다. 어찌나 쥐새끼처럼 빠른지, 분명 찾았는데 순식간에 종적을 놓쳤습니다.”
“으아악!”
“악!”
또다시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에 절심마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두 놈이 아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다가는 수하들만 죽는다. 모두 중앙으로 모이게 해라.”
“예!”
십미호귀는 호각 하나를 입에 물더니 짤막하게 세 번을 연달아 불었다.
그러자 수하들이 급히 중앙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서너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 정도의 피해만 발생한 것도 암권마가 중앙으로 피하는 수하들의 뒤에서 살수들의 공격을 막아 준 덕이었다.
처음 변고가 발생하면서 정신을 못 차리던 수하들이었지만, 흑선산장의 정예답게 중앙에 모이자마자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더니 원형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중앙 천막을 가운데에 두고 완벽하게 원을 그리며 경계 태세에 들어간 수하들을 보는 절심마자의 얼굴에는 침통함이 그대로 그려졌다.
백이십 명이 달하던 수하들이었건만 지금 원형진을 이루고 있는 수하들의 수는 팔십여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호법님, 무림에 이 정도의 살수를 보유하고 있는 살수 집단은 어찰단과 백인막뿐입니다. 어찰단은 이미 중원에서 밀려났으니 백인막인 것 같은데, 이자들이 왜 우리를 갑자기 공격하는 모르겠습니다.”
“천호방이다. 천호방이 백인막에 청부한 것이 분명하다.”
순간 절심마자는 확신한다는 듯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