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54화>
354화. 흑선산장(2)
“백인막의 청부 금액은 엄청나게 비싸기로 유명한데, 신생 문파가 무슨 돈으로 특급 살수를 몇 명씩이나 고용했을까요?”
십미호귀의 말에 절심마자는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천호방이 청부해서 살수들이 왔다면 이미 우리가 기습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게 말이 될까요?”
암권마의 말에 절심마자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호방이 아니면 살수가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지금 그 문제로 왈가왈부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살수의 공격은 방어진을 구축해서 막기는 했는데, 장주님께서 명한 천호방 기습이 어려워졌습니다.”
십미호귀 말에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미 삼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거기다 지금 수하들의 사기마저 떨어진 데다, 움직일 경우 살수들의 공격이 또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 교활한 놈들이 우리는 공격하지 않고 있다. 철저하게 약한 수하들만 제거해 전력만 약화시키고 있어. 오늘 기습은 포기한다. 장주님께 보고한 후 다른 대처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절심마자는 시작도 전에, 이번 작전이 실패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런 법이 어디 있냐?”
주루에 앉아 담수련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악불군은, 다짜고짜 볼멘소리를 하며 뛰어 올라온 소걸아를 보자 피식! 웃으며 물었다.
“거지는 법을 안 따진다고 하더니, 이런 때는 따지나 보네? 그래, 어떤 법에 문제가 있는지 말해 봐라.”
“분명 내가 온다는 보고를 받았을 거 아니냐?”
“받은 지 얼마 안 되기는 했지만 받긴 받았지.”
“그럼 내가 밤새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은 안 들더냐?”
“글쎄?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데? 어차피 너는 여기 왔는데, 내가 그 생각을 했어야 하는 거냐?”
“친구가 밤을 새워 달려왔으면 밥을 안 먹었겠구나 하고 생각해 줘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 어찌 단둘이서만 밥을 먹는 거냐?”
“이런 법이 없다고 한 게 그 뜻이었냐?”
“그럼 거지한테 밥 먹는 법 말고 더 중요한 게 뭐가 있겠냐?”
“킥!”
당연히 흑선산장과 싸움을 시작한 문제로 따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담수련은, 생각지 못한 소걸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담 군사님께서는 머리가 원체 좋으시니까 이미 눈치를 채시고 웃으시잖냐!”
이어지는 소걸아의 말에 담수련은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죄송하다는 듯 말했다.
“세상에는 제 머리로도 예측이 안 되는 것이 있답니다. 소걸아 소협은 제가 예측하기가 너무 어렵네요. 우선 앉으세요. 멀리서 달려오시느라 시장하실 텐데 식사부터 하셔야지요.”
식사부터 하라는 말에 소걸아는 냉큼 악불군 옆에 앉으며 말했다.
“네가 친구를 생각하지 않은 벌로 많이 시켜 먹을 거다.”
악불군은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며 점소이를 불렀다.
그러자 소걸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요리 몇 가지를 시켰다.
“아침부터 너무 과하게 먹는 거 아니냐?”
“거지한테는 아침저녁이 따로 없다. 먹을 기회가 생기면 많이 먹고, 기회가 없으면 삼 일 밤낮을 굶어야 하는 게 바로 거지의 생활이야.”
“세상 편한 게 거지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상당히 고된 생활이구나.”
“마음이 편하고 머리가 편한 거지, 배까지 편하다는 말은 아니었거든!”
“그런데 천천히 오시지, 왜 밤을 새워 달려오셨어요?”
점소이가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가자 담수련이 물었다.
“뜻밖의 일이 있어 좀 늦어져서 달려왔습니다.”
“뜻밖의 일이요?”
“악 방주 말대로 위수현까지 압송 행렬을 호위하고 돌아가는데, 급보가 와서 다시 위수현으로 달려갔지 뭡니까?”
“설마, 압송해 간 신비 조직의 사람들한테 문제가 생긴 건가요?”
“담 군사님은 정말 빠르시네요. 배에 싣고 군산으로 가던 중 배 안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무림맹에서 상당한 고수가 오지 않았나요?”
“오긴 왔지요. 이십 명에 달하는 영웅무단의 정예무사들을 화산의 은진자라는 분과 본 방의 벽력신개가 이끌고 왔습니다. 은진자는 저와 안면이 있는 분이고, 벽력신개는 저와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항렬은 같아서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분들 모두를 지휘하고 온 분이 있었는데, 천무성궁의 장로급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위수현에 도착한 소걸아는 무림맹에서도 신비 조직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
“배에서 변고가 생겼다면 누군가 강에서 배를 타고 기습한 건가요?”
“지금부터 하는 말은 천호방 사람들에게도 비밀로 해야 합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니까요.”
“걱정 마시고 말씀해 보세요.”
“벽력신개가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제게 연락한 것은 이 사실을 빨리 총단에 전하고 대책을 말해 달라는 의미였지요.”
소걸아가 말한 사건의 전말을 듣는 담수련과 악불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벽력신개를 통해 들은 전말은 이랬다.
천미루주를 비롯한 내부영주를 실은 가마가 배에 실리고 출발한 지 반 시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모습을 보이지 않던 지휘자인 천무성궁의 장로가 가마를 열어 본 것이다.
지휘자가 압송하는 자들에 대해 검사 삼아 보는 경우는 비일비재한 일이니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린 것이었다.
은진자와 벽력신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보기만 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소걸아의 설명을 듣던 담수련도 예상하지 못한 일에 놀란 듯 대답을 재촉했다.
“그것도 참 이상한 것이, 도망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싸우지도 않고 그대로 자결했답니다.”
“상당한 고수라고 했지요?”
“천무성궁의 장로라면 은진자나 벽력신개보다 고수일 겁니다.”
“그 정도 무공이라면 도망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자결이라니……. 그 천무성궁의 장로란 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시나요?”
“그게 또 이상한 게, 분명 천무성궁의 장로라고 했는데 은진자와 벽력신개도 그자를 처음 봤다고 하더군요. 활동하지 않은 자였다고 하더라도 영웅회에서 오래 활동한 은진자나 벽력신개조차 모르는 천무성궁의 장로는 거의 없거든요.”
담수련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내가 좀 더 신중하게 조사하고 보낼 걸 실수했나?’
천무성궁의 장로라면 간세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간세였다. 그런 중요한 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죽였다는 것은 신비 조직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중요한 정보를 천미루주가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가짜가 지휘자가 돼서 파견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악불군의 질문에 소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가짜일 수는 없지. 천무성궁의 인물인 것은 분명한데, 진짜 장로였는지까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
“그럼 무림맹은 지금 난리가 났겠네요?”
“원래대로라면 그렇겠지만, 그 사건은 지금 완전 극비로 조사를 시작해서 생각보다는 조용합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배에 탔던 사람들하고 저밖에 없으니까요.”
“무림맹의 간부가 적의 간세로 밝혀졌는데 마냥 비밀로 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이제 곧 화산에서도 알게 될 거고, 개방은 이미 알고 있잖아요. 어쨌든 이번 사건으로 신비 조직에 대한 위험성을 무림맹에서도 알게 된 셈이니,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봐도 되겠네요.”
“그래도 간신히 잡은 신비 조직의 단서가 될 기회를 이렇게 어이없이 버렸으니 좀 아깝지 않습니까?”
“또 기회는 올 거예요.”
“그것보다 현 무림에서 더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악 방주, 너다.”
“나? 왜?”
“진짜로 흑선산장과 이렇게 정면 대결을 펼칠 줄 누가 알았겠냐?”
“흑선산장이 그렇게 대단한 문파였나?”
“구천마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어느 문파도 함부로 건드리기는 어려운 문파거든. 남궁세가조차 그냥 두고 본 것은 이길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없애면서 얻을 피해가 두려운 거거든. 거기다 마도인들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는 것도 불안한 일이고.”
“흑선산장과 싸우면 마도인들과 척을 지는 것이 되나?”
악불군의 반문에 소걸아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며 물었다.
“설마,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정파도 아니고 마도나 사파는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고 들었는데, 흑선산장과 싸운다고 다른 마도인이 화낼 이유가 있을까?”
“마도는 좀 이상한 데가 있어.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진짜 원수가 따로 없는데, 정파에게 당하면 그 정파는 마도의 적이 되거든.”
“그럼 내가 흑선산장을 없애면 천하 마도가 전부 내 적이 된다는 건가?”
“전부 다 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도들이 천호방을 적대시할걸. 마도를 없앤 문파들은 마도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니까.”
“틀린 생각은 아니네. 사실 난 마도나 사파가 싫거든.”
“그럼 끝까지 갈 생각이냐?”
“무슨 의미야?”
“일성마황까지 죽일 생각이냐고 묻는 거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성마황이 결정할 문제다.”
“끝까지 가겠다는 의미라고 알아듣겠다.”
악불군의 말은 일성마황이 악불군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싸움을 멈출 수 있다는 의미였지만, 마황급에 든 그가 싸워 보지도 않고 악불군에게 굴복한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더 큰 치욕이 될 것이 분명했다.
“와, 온다!”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던 소걸아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나타났다. 점소이가 주문한 요리들을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은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그렸다.
음식 몇 가지에 행복한 그가 부럽다는 생각까지 언뜻 들 정도였다.
* * *
“살수들 때문에 날이 밝을 때까지 방어진만 펼치고 있다가 돌아왔다는 것이냐?”
절심마자의 보고를 듣던 일성마황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기습한 자들이 특급 살수였습니다. 그대로 기습하려고 했다면 수하들 피해가 너무 컸을 것입니다.”
“절심마자, 특급 살수를 보유한 살수 집단은 백인막밖에 없다는 거 모르나?”
듣고 있던 적미신군이 의아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암권마도 백인막 같다고 하더군.”
적미신군은 암권마도 동의했다는 말에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저었다.
“백인막은 내가 알기로 무림맹에서도 부역 세력으로 추적하고 있는데, 너무 감쪽같이 사라져서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천호방과 함께 나타났다니, 말이 되나?”
적미신군의 말에 일성마황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 정보가 확실한 거냐?”
“백인막과 본 장과는 상관이 없어 보고는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틀림없습니다.”
“만약 우리를 기습한 놈들이 백인막의 살수가 맞다면, 천호방이 부역 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말이 아니냐?”
“그럼, 무림맹에 이 사실을 알린다면 천호방이 오히려 곤란해질 수도 있겠군요?”
묘수라는 듯 말하던 적미신군의 표정이 변했다. 부역자 색출에 혈안이 된 무림맹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 천호방에 책임추궁을 하며 조사를 하게 될 것이었고, 당연히 흑선산장과의 싸움 역시 더 이상 이어 갈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무림맹 간에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악불군은 이미 세력권에 들어와 점점 산장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무림맹에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무림맹에 얘기할 시간도 없고, 더욱이 천호무적검이 부정하면 우리 말을 믿어줄 리도 없다. 하지만 천호무적검에게 그걸 미끼로 거래할 수는 있다. 적미신군.”
“예!”
“천호방이 산장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달려온다면 오늘이라도 도착하겠지만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지금 속도라면 내일은 되어야 도착할 것입니다.”
“네가 가서 천호무적검을 만나라. 그놈이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우리의 위신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해결책을 찾아봐라.”
일성마황은 처음에 강경하게 대응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칠보추혼과 칠십 명의 수하들의 죽음은 정파들 사이에서 버티고 있는 흑선산장에게는 너무 뼈아픈 피해였다.
죽기로 싸운다면 여전히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또다시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전력이 약화된 그들을 남궁세가를 비롯한 정파에서 칠 것은 명약관화했다.
“당장 가서 만나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