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57화>
357화. 생사결(1)
“아가씨, 생각보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모였어요!”
마차의 창문을 통해 상황을 살피던 추국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생사결 소문이 퍼진 것이 고작 이틀 전임을 감안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남궁세가에서도 왔고요, 개방의 제자들도 있네요. 어느 문파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림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고개를 내밀고 이곳저곳을 살피던 추국이 부언했다.
“남궁세가에서도 왔다고?”
“예, 우리를 마중 나왔던 그 장로란 분이 직접 오셨네요.”
담수련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소군, 그냥 이기는 정도로는 안 돼. 내가 말한 대로 천하가 깜짝 놀라게 해야 해.’
담수련은 두 손을 꼭 잡고는 기도하듯이 중얼거렸다.
악불군의 명성은 이미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악불군에게 싸움을 건 자들은 대부분 죽었고, 주위에 그것을 본 사람들은 소수였다.
본 사람들도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드물어, 그들의 증언은 그저 호사가들의 입담으로만 전해질 뿐이었다.
주원장이 그를 무림 십왕으로 봉하면서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의 실력이 부풀려 알려졌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러나 오늘 백대고수 중 열 번째 안에 든다는 마황급과의 생사결에서 승리한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었다.
더욱이 보고 있는 사람들이 무림에서 이름난 고수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이기는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간신히 이긴다면 그건 백대고수의 열 명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될 뿐이었다.
담수련은 악불군에게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될 인물로 각인될 정도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터 안에 굳건히 선 악불군은 주위 사람들에게 포권을 하며 크게 외쳤다.
“저는 천호방의 방주인 천호무적검 악불군입니다.”
“와아!”
악불군이 자기소개를 하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특히 개방의 제자들이 유난히 크게 외쳤다. 소걸아의 명이었다.
사람들은 공터에서 삼십 장 안쪽으로는 들어설 수 없었다. 일성마황 같은 절대 고수들의 공격은 삼십 장 거리에서도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온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이고 모두의 시선이 흑선산장의 정문으로 향했다.
공터는 곧 적막에 싸였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강력한 기를 뿜어내는 커다란 덩치의 노인이, 끝이 넓고 휘어진 언월도 같은 도를 들고 수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백대고수에 이름이 오르기만 해도 절대 고수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니 당연히 백대고수의 최고인 열 명의 무인에 속한 일성마황의 기세는 대단했다.
‘역시 대단하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야.’
제자들 십여 명을 대동하고 팔짱을 낀 채 상황을 보고 있던 남궁원익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느껴지는 기세만으로도 자신이 이기기 어려운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이 악불군에게 향했다. 늠름한 모습이긴 했지만 일성마황과 비교하기에는 그 기세가 너무 약했다.
‘생사결을 받아 준 것이 실수일 수도 있겠구나.’
남궁원익은 검을 품에 안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악불군을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천호무적검 악불군이냐?”
공터 안으로 들어선 일성마황은 악불군을 주시하더니 내공이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악불군입니다. 명성이 높으신 일성마황 노 선배님과 이런 결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성마황의 내공이 깃든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지만, 악불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포권을 하며 공손히 인사했다.
순간 일성마황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가 지금 펼친 것은 그의 성명절기 중 하나인 일성만겁후라는 음공이었다. 그의 명호에 일성이라는 글이 들어있는 까닭도 일성만겁후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이놈이 오 성의 일성만겁후에 끄떡도 안 해?’
그는 내공을 칠 성으로 올려 다시 소리쳤다.
“본 장과 네놈의 천호방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그런데 너는 강호의 도의를 저버리고 본 장을 공격했다. 오늘 넌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일성만겁후가 악불군의 고막을 더욱 강력하게 파고들었다. 그에 반해 주위 사람들이 음공에 피해를 입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일성마황의 내공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일성마황은 이어지는 악불군의 말에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하시지요.”
“어린놈이 대단하구나. 나의 칠 성 공력이 깃든 일성만겁후를 막아 내다니.”
도를 위로 들어올린 일성마황의 말에 주위에 있던 여러 고수들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칠 성의 일성만겁후를 악불군이 거뜬하게 막아 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도에서 도기가 뿜어나오기 시작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드디어 결투가 시작이라는 기대에 흥분한 사람도 있었지만 뒤로 물러서는 사람도 있었다.
일성마황의 도기가 점점 커지며 강기로 변해 나가자, 악불군도 준비를 시작했다.
그의 검이 스르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미 천호무적검의 진신 절기처럼 알려진 이기어검이었다.
소걸아는 악불군의 검이 삼 장 이상 떠오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성마황 같은 초절정고수에게 이기어검은 너무 무린데…….’
소걸아는 악불군이 걱정이 되었다.
이기어검은 내공 소모가 심한 수법이었고, 일성마황같이 내공이 강한 자의 공격에 튕겨나갈 경우 다시 공격 준비를 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거기다 당장 공격을 시작해도 부족할 판에 검은 계속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얍!”
엄청난 위력의 도가 악불군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어리고 후배인 악불군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일성마황은 악불군이 절대 얕볼 수 없는 적이라고 판단한 듯 먼저 선공을 펼친 것이다.
“아-!”
악불군이 검도 없이 그대로 서 있자, 보던 사람들 중 몇 명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악불군이 죽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펑!
폭음과 함께 악불군이 서 있던 자리에 일 장에 가까운 길다란 도랑이 파였다.
‘이놈이?’
일성마황은 악불군이 자신의 도참파황도를 피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급히 도를 눕히며 몸을 회전했다.
[파멸강선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만든 수법인데, 위력이 너무 강해 아직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귀를 찌르는 강력한 전음에 일성마황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고 급히 방어 태세로 취했다.
그사이 일성마황의 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피한 악불군의 몸은 공중으로 무려 이 장이나 날아올랐다.
순간 삼 장 넘게 공중으로 떠올랐던 천륭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악불군은 떨어지는 검을 손으로 잡더니 속도를 배가시키며 일성마황을 향해 검을 내려꽂았다.
검을 띄운 이유가 이기어검을 펼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강한 위력을 만들기 위한 기상천외한 준비였던 것이다.
공간을 가르는 빛이 하늘부터 땅까지 이어졌다.
‘이,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성마황의 태력신도는 만년한철을 이용해 만든 이름난 명기(名器)였다. 수많은 싸움에서 상대의 무기를 파괴해 버리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의 도가 악불군의 검에 의해 잘려 있었다.
악불군을 경악의 눈으로 쳐다보던 일성마황의 몸의 반쪽이 스르르 잘리기 시작했다.
일 초였다.
수많은 군웅들이 있었지만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악불군의 무공이 높다는 소문은 분분했지만, 일성마황을 일 초에 죽인 것은 실로 천하 무림의 역사를 다시 쓸 정도로 엄청난 쾌거였다.
두 쪽으로 잘려 엎어져 있는 일성마황을 잠시 본 악불군은, 검을 뿌려 피를 제거한 검을 검집에 꽂더니 몸을 돌려 흑선산장의 간부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 중으로 안휘를 떠나십시오. 흑선산장의 어떤 재산도 가지고 가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 가서도 양민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이 들리면 제가 또 찾아갈 것입니다.”
작미신군을 비롯한 간부들은 몸을 부르르 떨 뿐,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이 군웅들을 향해 포권을 하자, 그제서야 다들 정신이 든 듯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있던 담수련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 * *
뒷짐을 진 채 창 밖의 꽃을 보고있던 천제무황은 현기수사와 한 청년이 안으로 들어서자 몸을 돌렸다.
청년은 허리를 숙였다.
“중원 총순찰 백천학 맹주님의 부름을 받아 왔습니다.”
그는 부역자들을 제거하며 강호행을 하던 백천학이었다.
“그냥 할아버지라 부르거라.”
“맹주전에서 어찌 사적인 호칭을 하겠습니까?”
너무 공적인 백천학의 모습에 천제무황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너도 앉거라.”
“예.”
“사마진격 너도 앉아라.”
그대로 서 있던 현기수사는 천제무황의 말에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서 있는 것이 편합니다.”
“그럼 네 편한 대로 하거라.”
“맹주님, 얼마 전 태홍장의 혈겁을 일으킨 자들의 수법이 태양천의 수법과 흡사하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백천학의 말에 천제무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받았다. 천호방의 분타도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던데, 맞느냐?”
“예, 분타주를 비롯해 수십 명이 죽었습니다.”
백천학은 철무정이 이끄는 태양전사들을 추적 중 천제무황의 부름으로 무림맹으로 오게 된 것이 아쉬운 듯 했다.
“영웅밀단이 그자들을 계속 추적하고 있으니, 우선 부역자를 쫓는 일은 무력대에 맡기도록 하거라.”
“제게 지시할 일이 있으십니까?”
“진격아.”
“예, 주군!”
“말해 주거라.”
“예. 공자님께서도 신비 조직에 대해 들으셨겠지요?”
“악 방주가 공표했다는 정도만 압니다.”
“신비 조직은 실제 존재하는 조직입니다.”
백천학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직이 실제 있다는 말입니까?”
“예, 그런데 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현기수사는 남궁세가에게 인계받아 압송하던 신비 조직원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성 장로가 간세였다는 말입니까?”
백천학도 이번만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아직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 장로께서 그들을 죽이고 자결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본 궁의 장로들은 수십 년 동안 충성해 온 분들입니다. 성 장로께서 간세라면 그 긴 세월 동안 숨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현기수사.”
“예, 공자님.”
“어떤 가정이나 확신도 사실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자꾸 그럴 리 없다고 부정만 하신다면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일어난 사건을 직시하고, 어디서부터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추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백천학의 말에 현기수사가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천제무황이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이제 내가 왜 너를 불러들였는지 알겠느냐?”
“천무성궁의 간세를 잡아내야겠군요.”
“천무성궁만이 아니라 무림맹 전체를 조사해야 할 것 같구나.”
“무림맹까지 조사한다면 다른 문파에서 불만을 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악불군이 신비 조직을 핑계로 정파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무림맹에도 신비 조직의 간세가 있기에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아이의 주장이다. 그런데 천무성궁까지 간세가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 아이를 막을 명분이 없어진다.”
“근래 악 방주의 명성이 대단하더군요.”
“이 할애비의 세상은 이제 지고 있다. 다음 세상은 네가 맡아야 한다.”
천제무황의 말에 백천학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
“왜 말이 없느냐?”
“맹주님, 신비 조직만 무림을 위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혈교 역시 실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거기다 남쪽에는 구천마성이 건재하고, 서쪽에는 혈해사계가 사천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태양천 역시 여전히 중원에서 혈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악 방주는 포용해야 할 상대이지, 적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며칠 전 일성마황과 악불군 간에 생사결이 있었다.”
“저도 소문은 들었습니다.”
“일 초 만에 일성마황을 죽였다는 것도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이미 그 아이는 이 할애비의 명성과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 더 커진다면 더 이상 돌이키기 어렵다는 것이 사마진격의 분석이다.”
“전 현기수사의 분석을 믿습니다. 하지만 분석이 다 맞는다면 세상일이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 저를 믿습니다.”
백천학의 단호한 말에 천제무황은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