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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360화 (360/472)

<천검지애 360화>

360화. 비보(2)

“이레는 너무 긴 시간이 아닐까요?”

운우전주 송지향의 말에 운우각주는 고개를 저었다.

“소림사 도착이 내일이다. 너무 급하게 밀어붙이면 악불군이 눈치챌 수 있다.”

“시간을 너무 주면 오히려 악불군에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후님의 예측이 틀린 적이 없으니, 우린 그저 명령대로만 하면 된다.”

“이번 시도로 중요한 저희 간세만 잃게 될까 불안합니다.”

담수련에게 은밀하게 서찰을 보냈지만 측근에 간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분명했다.

“중요할 것도 없다.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도 비상 상황에서 담수련을 납치하거나 죽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악불군을 죽일 수 있다면 모르지만, 담수련을 죽이는 것은 그의 분노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담수련만 우리에게 데려온다면 큰 공으로 인정하고 본 궁으로 보낼 것이라고 그 아이에게 말해라.”

“알겠습니다.”

* * *

“방주님, 반 마장 앞에 소림사의 무승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척후들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저 산이 숭산이지요?”

악불군은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는 커다란 산을 보며 물었다.

“예, 왼쪽이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이고 그 옆에 높은 봉우리가 태실봉입니다.”

“대 호법.”

“예.”

“소림사는 아주 엄숙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수하들에게 실례가 될 행동은 절대 금물이라고 주의를 주었지요?”

“예, 술과 육포는 아예 들어가기 전부터 챙기지도 말라고 전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드디어 왔구나.’

악불군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구름 몇 점이 흐르고 있는 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악불군의 눈에는 아주 작은 점이 보였다. 적설이었다.

악불군은 적설이 도착하자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지금 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우군은 백설과 적설이었다. 그들은 인간과 달리 절대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 * *

‘내가 군사라고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나 정도의 책사는 많을 거야. 그렇다면 아버님까지 이용해서 나를 불러들이는 이유는 소군을 조종하기 위해서인 게 분명해.’

담수련은 신비 조직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그것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사실 너무 뻔한 수작이었다.

하나 어떤 상황에서도 순발력 있게 타개책을 생각해 내는 그녀였지만, 이번만은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인 담무룡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서찰에 적힌 대로 담무룡을 죽일 것 같지는 않았다. 허나, 만에 하나의 경우가 있었다.

다른 경우라면 좀 더 높은 확률을 따라 계획을 세우겠지만 아버지의 목숨을 가지고 모험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동방소령이나 추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 * *

소림사에서 마중 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나한전주인 공효대사였다.

소림사는 장문인이 거주하는 방장의 밑으로 장격각, 금강전, 나한전, 천왕전 그리고 대웅전으로 불리는 오대전주가 있었다.

그리고 오대전주는 여간한 문파의 장문인 대접을 받을 정도로 위상이 대단했다.

악불군은 그를 보자 멀리서부터 말을 내려 걸어와 포권을 했다.

“천호방의 방주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그의 행동은 공효대사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미타불! 먼 거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림사 나한전주 공효라고 합니다.”

공효대사는 반장을 하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 같은 말학 후배를 위해 대사님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빈승을 본 적이 있으셨습니까?”

악불군이 그를 알아본 것은 놀랍게도 소걸아의 정보 때문이었다. 단지 말로 들은 정보만으로 그의 얼굴까지 알아봤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눈썰미라고 할 수 있었다.

“대사님을 모르는 무림인이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빈말로 들릴 약간은 아부성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악불군이 말하니 진심으로 들렸다.

칭찬은 고승인 공효대사의 얼굴에도 미소를 만들었다.

“무룡신개 방주님께서 악 시주께서 오실 것이라고 서찰을 보내셨더군요.”

“방주님께서 그런 수고까지 하셨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만큼 악 시주께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 아니겠습니까?”

“어르신들께서 좋게 봐주신 것뿐입니다.”

“자, 올라가면서 얘기하지요. 소림까지는 꽤 올라가야 합니다.”

“방도들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겠습니다.”

공효대사는 마차 행렬을 보더니 말했다.

“본 사에 빈청이 따로 있지 않아서 전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열 분은 데리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 * *

“아미타불!”

열심히 채소를 가꾸고 있던 노승은 불호를 듣자 몸을 일으켰다.

“도착했습니까?”

“예, 지금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장문 사질께서는 결정은 하셨소?”

놀랍게도 공손히 서 있는 노승은 소림사의 장문인 공허대사였다. 그가 이렇게 예를 갖추는 사람은 소림사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천하인들이 존경하는 신승, 광천대사였다.

“무룡신개 시주님께서는 악 시주께 전폭적인 지지를 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광천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해신개 시주께서는 처음부터 악 시주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이었지요.”

“사숙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빈승이야 아직 악 시주를 만나 보지 못했는데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기대는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럼 같이 만나 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인연은 부처님께서 주십니다. 빈승과 인연이 있다면 스스로 찾아오겠지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결정은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장문 사질께서는 소림사의 방장이십니다. 당연히 장문 사질께서 결정을 내리셔야지요.”

공허대사는 공손히 반장을 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그럼 소질은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공허대사가 내려가는 모습을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던 광천대사는 다시 자리에 앉아 채소들 사이의 잡초를 옆으로 옮겨 심으며 중얼거렸다.

“너희도 살아 있는 생명일진대 아무도 반기지를 않는구나, 쯧! 쯧!”

* * *

천년 고찰답게 소림사의 규모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엄청 컸다. 전각의 단청들은 색이 바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움을 주며 오랜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소림사, 소림사 하더니 대단하구나.’

양민들이 참배하는 대웅전을 지나 무승들이 기거하는 달마전으로 들어선 악불군은 백 명 가까운 무승들이 봉을 들고 일사불란하게 수련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들어선다면 눈동자라도 움직이는 것이 인지상정일진대, 아직 젊은 무승들은 누구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천불전이라는 편액이 걸린 커다란 전각에 도착하자 두 명의 노승이 서 있었다.

“아미타불! 사형, 천호방의 악 시주님이십니다.”

공효대사는 왼쪽에 있는 노승에게 공손히 악불군을 소개했다.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악불군이 급히 포권을 하자 노승이 반장을 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귀하신 손님이 오셨군요. 빈승은 장경각주인 공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금강전주 공심대사입니다.”

장경각은 소림의 모든 비급과 불법에 관한 책을 소장하고 보관하는 곳으로, 소림의 정신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장소였다.

당연히 장경각주는 소림방장에 이은 이인자가 맡았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공선대사의 말에 악불군은 수하들에게 기다리라고 명한 후 담수련만 대동하고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천불전은 대단히 컸다.

이름 그대로 천 개가 넘을 정도로 많은 불상이 사방에 세워져 있었다.

달마대사가 직접 조각하고 바닥에 고정까지 해서 자리를 옮기지 못하게 했다는 천불상에는 부처님의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고 하여, 라마를 숭상하던 원나라에서도 천불전만은 그대로 두었다고 했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실로 셀 수 없이 많은 불상들을 보며 감탄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운데 커다란 석가불존이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앉아 있었고, 그 주위에 관음보살을 비롯한 크고 작은 부처들이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한 모습으로 죽 둘러 있었다. 심지어 표정조차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악 시주.”

“예.”

“방장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럼 천불전을 좀 둘러보아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됩니다. 빈승이 안내해 드리지요.”

“어찌 대사님께서 직접 안내를 하겠습니까?”

“천불전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있습니다. 빈승을 따라오십시오.”

악불군은 담수련을 보더니 공선대사의 뒤를 따랐다.

“이분은…….”

석불존의 왼쪽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한 공선대사는 그 많은 부처들의 이름과 그들의 자세 그리고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주었다.

담수련은 신기한 장면과 설명에 잠시나마 고민에서 벗어난 듯 흥미롭게 공선대사의 말을 경청했지만, 악불군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천륭검보의 자세들과 왜 이렇게 비슷해 보이지?’

천륭검보의 자세는 보통 사람은 취하기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천불상의 자세는 보통 사람들이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편한 자세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중간중간 정좌한 자세도 있어 천륭검보의 자세와는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비슷하게 보이고 있었으니 악불군은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한 바퀴를 다 돌아 다시 처음 출발을 했던 석불존의 오른쪽에 도착한 악불군은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소…….”

악불군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담수련은 이름을 부르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그동안 몇 번 보았던 광경이었다.

공선대사 역시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그래, 이거였어……. 이제야 만류귀종(萬流歸宗)의 의미를 확실히 알겠구나.’

악불군은 천륭검보가 검만을 위한 비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다른 무공에도 천륭검보의 자세를 이용하기 위해 매진해 왔다.

그 결과, 악불군 스스로가 이미 익히고 있던 권법 등에 적절하게 접합하여 커다란 소득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뭔가 부족함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검은 그 자세를 통해 완벽한 초식을 구사할 수 있었지만, 권법이나 장법 등은 아무리 빠르게 자세를 잡아도 아주 미세하게 맥이 끊기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천륭검가에서도 그런 문제를 알고 있기에 검공으로만 이용을 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천불상의 자연스러운 자세들과 표정을 보며, 빠진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연스러움이었다.

천륭검보는 상대의 핵심을 찌르는 아주 강력한 자세를 만들었지만 절대 자연스러운 자세가 아니었다.

‘그래,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 상대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포용력. 천륭검보는 강하지만 그게 부족했어. 왜 소림의 무공을 천하 무공의 원류라고 하는지 알겠구나.’

천불상의 모습만으로는 무공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어떤 무공이든 단번에 일취월장할 수 있는 원류가 있었다.

악불군은 언제나처럼 뜻밖의 장소에서 예기치 않았던 중요한 시간에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아미타불! 선연이로고…….”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불호가 들려왔다.

몸을 돌린 공선대사는 급히 반장을 했다.

담수련은 네 명의 중년 무승을 대동하고 나타난 노승을 보자 소림사의 장문인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포권을 했다.

“천호방의 군사인 담 군사라고 합니다. 방주님께서는…….”

“아미타불! 악 시주는 잠시 그냥 두시구려.”

온화한 미소를 지며 담수련의 말을 끊은 공허대사는 악불군의 옆으로 가더니 석불존에게 합장을 하고는 상석에 있는 방석에 앉았다.

그러자 공선대사를 제외한 모두는 자신들의 자리에 있는 방석에 앉았다.

“담 시주는 저곳에 앉으십시오.”

공선대사가 가리킨 곳은 공허대사와 정면으로 향한 곳으로 역시 방석이 놓여 있었다.

“전 방주님과 같이 앉겠습니다.”

“그게 편하시면 그렇게 하십시오.”

방석에 앉은 소림사의 간부들은 눈을 감고는 염주를 굴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엄숙하게 전개되자 담수련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악불군은 주위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지 계속 천불상만 쳐다보고 있었다.

반 시진이나 지나 정신을 차린 악불군은 주위를 보고는 깜짝 놀라 포권을 했다.

“방장, 천호방의 악 시주이십니다.”

공선대사가 눈을 감고 있던 공허대사에게 보고를 하자, 그는 굴리던 염주를 멈추고는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말학 후배 악불군, 소림 장문인께 인사드립니다. 오신 줄도 모르고 제가 큰 결례를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악불군이 다시 공손히 인사하자, 공허대사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시게.”

악불군과 담수련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방석에 앉았다.

“편히 앉으시게.”

“부처님께서 내려다보는 곳에서 어찌 편하게 앉겠습니까? 저희는 이게 더 편합니다.”

악불군의 말에 주위에 있던 많은 간부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리 젊어도 일 방의 방주인 그가 이렇게 겸손하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니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천불상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기에 그렇게 정신없이 보고 있었던 것이오?”

공허대사의 질문에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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