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61화>
361화. 인연(1)
“자연스러움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연스러움이 가장 강하다……. 아미타불! 그럼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이오?”
“순리(順理)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순리란 무엇이오?”
“순리란 결국 자연스러움으로 귀결되겠지요.”
마치 고승들의 선문답 같은 대화는 마치 윤회(輪廻)하듯 같은 말로 되돌아왔다.
“아미타불! 악 시주는 불문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으셨소?”
“제가 지식이 짧아 불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이곳 천불전에 불법을 배웠다는 우리가 수십 번을 드나들어도 얻지 못한 깨달음을 악 시주는 겨우 일각도 안 되어 얻었으니, 그 어찌 인연이 아니라고 하겠소.”
“과찬이십니다.”
악불군이 고개를 숙이자 공허대사는 염주를 굴리던 손을 멈추며 말했다.
“개방의 무룡신개 시주께서 악 시주가 본 사를 방문하려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셨소.”
“서찰을 보내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공허대사는 담수련을 보더니 물었다.
“담 군사라고 했지요?”
“예.”
“잠룡세가의 담 시주와는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되겠소?”
개방에서는 알면서도 피했던 질문을 소림 방장이 직접 묻자, 담수련은 약간 당황한 듯 즉답을 하지 못했다.
“무룡신개 시주께서는 악 시주께서 잠룡세가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말만 적어 보냈소. 그래서 묻는 말이니, 곤란하면 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허대사의 부언에 담수련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소녀는 잠룡세가의 담 자, 무 자 룡 자를 쓰시는 가주님의 딸입니다.”
몇몇 간부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불호를 외었지만 공허대사는 이미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소. 그럼 담 시주께서는 잠룡세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잠룡세가에 대해서만 평가한다면, 중원에 무릎을 꿇고 사죄해도 그 죄를 덮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미타불!”
담수련의 말에 공허대사는 불호를 외더니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기 시작했다.
무룡신개의 서찰을 받은 후 그는 오대전주를 불러 의논했다. 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개방 역시 영향력이 큰 문파이긴 했지만 그들의 결정이 정파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림사의 결정은 무림맹과 더불어 정파를 대변하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괜히 태산북두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소림의 한 걸음은 태산과도 같음이니, 그들의 결정이라면 분명 판세에 영향을 끼치고도 남았다.
악불군이 잠룡세가의 인물을 보호한다는 것을 알면서 소림사가 눈을 감고 혈맹지약을 맺어 준다면, 그것은 모든 부역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림맹의 설립 취지를 엎어 버리는 행동이기도 했다.
공허대사가 광천대사를 찾아간 이유가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광천대사는 끝내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공허대사에게 결정을 미루었다.
그 행동은 그가 공허대사를 믿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가 결정하는 데 아주 결정적인 일이 방금 벌어졌다.
공허대사는 악불군이 하필 지금 이 시간에 천불상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천불상에는 달마대사의 마지막 심득이 들어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만약 악불군이 악인이었다면 절대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공허대사는 광천대사가 마지막으로 한 얘기가 생각이 났다.
“악 시주.”
“예.”
“악 시주께서 본 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대충은 알고 있소. 그러나 본 사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악 시주께서 아직 모르고 계실게요.”
“가르침을 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본 사는 무림을 위협하는 사악한 세력을 없애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지만, 더 중시하고 있는 것은 중원 무림을 이끌어 갈 영웅의 등장이오.”
“사악한 세력을 없애는 일에는 제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웅의 등장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스로 영웅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불군의 성격상 어려웠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영웅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정해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 사는 부처님께서 이어 주시는 인연을 더욱 중시하오.”
“인연이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공허대사는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화는 이만 하고, 오늘 하루는 속세의 일은 모두 잊고 그냥 소림사에서 하루만 지내보겠소?”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간청하고 싶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공허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악 시주와 담 시주 두 분께는 장경각만 빼고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은 다 갈 수 있도록 조치하겠소.”
공허대사의 말에 간부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악불군의 말을 자세히 듣고 결정할지 말지를 정하기로 약속했는데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림사에서 하루 묵는 것만도 큰 영예인데 특별히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게 허락해 주신다니, 제게는 평생의 특별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수경아.”
공허대사의 부름에 중년 무승이 공손히 답했다.
“예, 방장스님.”
“오늘 밤 머물 수 있는 방을 악 시주와 같이 온 일행들에게 알려주어라.”
“예.”
공허대사를 경호하는 사대금강 중 한 명인 수경대사가 악불군과 담수련을 안내하며 나가자, 공선대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문 사형, 갑자기 이러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번 결정을 부처님께 맡겨 볼 생각이다.”
“그게 무슨 의미이신지 소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안한 나도 모르겠는데 사제들이 알 수가 있겠느냐.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고 보자꾸나.”
“아미타불!”
모두는 공허대사의 심중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숙이며 불호를 외웠다.
“자, 이제 악 시주에 대해서는 사대금강에게 맡기고, 사제들은 모른 척 평상시대로 일하도록 해라.”
말을 마친 공허대사가 방장으로 가기 위해 일어나자, 모두는 급히 일어나 그의 뒤에서 반장을 했다.
* * *
“소군은 공허대사님께서 이러시는 이유를 알겠어?”
수경대사가 안내한 객청에 자리를 잡은 담수련은 악불군에게 물었다.
“높으신 고승께서 이유가 있어 한 행동에 대해, 제가 그 깊은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내가 느끼기에 공허대사님께서 소군을 아주 좋게 보셨어.”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담수련의 상대의 심중을 잘 읽는 것을 아는 악불군으로서는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이런 특이한 제안을 우리에게 하신 것은 간부들 사이에서 우리를 배척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봐.”
“그렇다면 저희 보고 소림사와 인연이 있음을 증명하라는 말씀이 사실이군요?”
“아까 그러셨잖아? 인연은 증명이 안 된다고. 그래서 소림사를 구경할 수 있는 특혜를 주신 거야. 내가 알기로 타 문파의 무림인들에게 소림사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도록 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거든.”
“말 그대로 소림의 사찰을 구경하며 부처님 눈에 띄어야겠군요?”
“고 장로님께서 소림사의 불승들과 대화하면 이따금 뭔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셨거든. 그리고 이따금 선문답을 하는데 고 장로님께서 보기에는 자신들도 모르면서 그러는 것 같다고 하셨어. 그런데 오늘 보니 그 말이 이해가 가네.”
“그래도 분명 이유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인사대천명이 아니라 진인사대천불이 된 건데, 우리가 불문에 대해서는 너무 아는 게 없잖아?”
“그럼 우선 나가서 부처님께서 어떤 인연을 제게 주실지 봐야겠군요?”
“그래, 내일까지니까 시간도 없어.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겠어.”
“그런데 아가씨.”
“응?”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 아가씨 표정이 안 좋으셔서, 무례하지만 묻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나 아무 일도 없는데?”
담수련은 시치미를 뗐다.
“확실히 일이 있긴 있군요?”
하지만 그녀의 시치미 떼는 말을 들은 악불군은 오히려 그녀에게 일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 듯 말했다.
“아무 일도 없다니까?”
“예, 믿어드리겠습니다. 이제 나가시지요. 아가씨께서도 구경을 좋아하시잖습니까?”
‘믿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것 같잖아? 소군한테는 거짓말 치면 안 되는데……’
* * *
이미 공허대사의 명이 떨어졌는지 악불군과 담수련의 행동을 제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 너댓 명 이상의 제자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감시는 되고 있었다.
“와아~ 정말 거대하네!”
천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사천왕상을 본 담수련은 감탄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사람의 몇 배는 됨직한 사천왕들의 모습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게 묘사되어 있었다.
“정말 잘 만든 것 같네요.”
악불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왕전 전각 입구에 도착하자 중년 승이 반장을 하며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장스님께서 마음껏 구경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불전과 달리 천왕전은 사방을 벽화로 장식해 놓고 있었다. 내용 역시 판이하게 달랐다.
천불전이 중생을 구도하기 위한 부처들의 고뇌와 해탈을 묘사했다면, 천왕전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벌을 받는 지옥도가 그려져 있었다.
“자비를 원칙으로 하는 사찰에 이런 끔찍한 지옥도가 있을 줄은 몰랐네.”
진저리를 치던 담수련은 악불군이 대답 없이 지옥도를 쳐다보자 의아한 표정으로 조그맣게 물었다.
“설마, 또 깨달음 온 거야?”
“깨달음이 아무 때나 오나요, 뭐?”
“소군은 아무 때나 오는 것 같아. 내가 본 것만도 벌써 세 번은 되는 것 같은데?”
“잠시 집중한 것일 뿐, 전부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 지금 왜 침묵한 거야?”
“공허대사님께서 제게 소림사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생각을 좀 했습니다.”
“어떤 이유인데?”
“그분의 의중을 제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제게 세상사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라는 의미 같습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가씨께서 모르시는 것도 있으십니까?”
“지금 소군의 말은 마치 득도한 스님이나 도사가 말하는 것 같아. 내가 잔머리만 발달했지, 너무 심오한 뜻까지는 잘 몰라.”
“심오한 것은 아닙니다. 저희가 처음 보았던 대웅전의 전경이 생각나십니까?”
“당연히 생각나지.”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대웅전의 부처님들은 모두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계셨어. 거기서 느낀 것은 자비와 평온이었던 것 같아.”
“두 번째로 간 금강전은 어떠셨습니까?”
금강전에는 금강역사의 거대한 조각상과 함께 인간 세상에 번뇌를 뿌리는 마귀들의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인간의 모든 번뇌에도 끄떡없는 금강의 의미를 볼 수 있었어.”
“백팔번뇌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번뇌를 요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번뇌를 만드는 힘은 바로 욕망이라는 마귀였습니다. 금강은 그 마귀를 막는 힘이지요. 그리고 그 번뇌에 순응하여 죄를 지은 자들은 이곳 지옥에 떨어져 끊임없는 벌을 받습니다.”
담수련은 약간 멍한 얼굴로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사실 지금 악불군이 하는 얘기는 그녀가 불경을 읽어 본 후 악불군에게 설명해 준 얘기였다. 그녀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같은 얘기를 지금 소림사에서 악불군에게 들으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하나의 지식으로 얘기했던 이야기가 악불군의 입에서는 마치 깨달음을 얻은 고승이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소군, 깨달음 왔네.”
“예?”
“무공에 대한 깨달음만 깨달음이 아니야. 소군의 영혼이 한층 더 발전한 것 같아.”
“저야말로 아가씨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긴 스스로는 모를 수도 있지. 차츰 소군도 알게 될 거라고 봐. 그럼 공허대사님께서 말씀하신 인연이 만들어진 건가?”
“솔직히 인연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악불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연(因緣).
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현상이나 사물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공허대사가 말한 인연은 사람과의 인연을 말함이 분명했다.
천왕전을 나온 악불군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 곳에 시선이 꽂혔다.
두 개의 봉우리였다.
소실봉과 태실봉.
“아가씨, 소림사를 왜 소실봉 밑에 세웠을까요?”
“위서에 보면 북위 때 세웠다고 하는데, 이후에도 여러 번 증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하지만 왜 여기에 세웠는지는 없었어.”
“달마대사님께서 칠 년 면벽을 하신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소실봉 중턱의 동굴이라는 것만 기록에 있어.”
“아가씨, 소실봉으로 가시지요.”
* * *
“사찰들을 구경하던 중 갑자기 소실봉으로 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공효대사의 보고를 들은 공허대사는 눈을 뜨며 물었다.
“어디, 어디를 들렀는지 아느냐?”
“대웅전과 금강전 그리고 천왕전까지 둘러보았다고 합니다. 상황상 장문 사형께서 말씀하신 인연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찾는다고 찾아지면 인연이 아니다. 그런데 악 시주는 인연을 스스로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공허대사는 의미 모를 말을 하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