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62화>
362화. 인연(2)
소림사 승려들이 안 보이는 장소에 도착한 악불군은 담수련을 보며 물었다.
“힘들진 않으십니까?”
“전혀…… 아니, 많이 힘들어.”
힘들지 않다고 말하려던 담수련이 급히 말을 바꿨다. 그리고 그녀가 은근히 원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소군도 힘들잖아?”
“아가씨는 너무 가벼워서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악불군의 목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악불군은 자신의 얼굴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미소를 짓더니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삼각쯤 올라갔을까…….
소림사의 전경이 전부 보이는 봉우리에 도착한 악불군에게 담수련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소군, 지금 뭘 찾는 거야?”
“부처님과의 인연을 찾는 중입니다.”
“그냥 이렇게 올라가면 인연이 찾아지나?”
“아까 아가씨께서 진인사대천불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그냥 막연해서 한 말인데?”
“막연하니까 노력이라도 해야지요. 부처님께서 노력을 보고서 안됐다 생각하시고 인연을 주실 수도 있으니까요.”
“……?”
담수련이 의아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소림사에 들어온 지 하루도 안 됐는데 고승처럼 말하는 것이 신기해서.”
“제가 고승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까?”
“인연이 생기면 좋고 안 생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는 것이 마치 달관(達觀)한 사람 같아.”
“달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아니야, 소군이 달라졌어. 어떻게 반나절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예전에 죽은 줄 알았다가 깼을 때도 담수련이 경악할 정도로 악불군은 확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무공의 변화였다. 그러나 지금의 변화는 그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때 악불군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왜?”
“기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설마 소실봉까지 침입자가 있다는 거야?”
“사람의 기가 아닙니다.”
“사람의 기가 아니면 무슨 기가 흐른다는 거야?”
악불군은 즉답 없이 산만 한참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떤 기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가 흐르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가 보자.”
“아가씨와 저는 정말 생각이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담수련의 얼굴에 오랜만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방 안에 앉아 불경을 외고 있던 광천 대사는 문을 열었다.
누군가 자신의 처소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신법을 쓰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올라오는 아이는 처음이군.’
광천 대사가 초옥를 지어 놓고 은거하고 있는 곳은 달마동이 있는 장소였다.
달마동은 소림사의 최고 성지로, 소림사에서도 아는 사람은 장문인과 오대전주 등 극소수였다. 그런데 지금 다가오는 자는 마치 이곳을 아는 듯 곧장 오고 있었다.
광천 대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누군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공터에 도착한 악불군은 우선 담수련을 내려놓았다.
“누가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담수련은 여러 채소들이 심어져 있는 텃밭들과 작은 초옥을 보자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예, 대단하신 분이 초옥 안에 계십니다.”
“대단하신 분?”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탕마신승으로 불리시는 광천 대사이신 것 같습니다.”
초가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에서 느껴진 내공의 수위는 악불군이 그동안 보았던 어떤 무림인보다 높았다.
“광천 대사 같이 유명하신 분이 왜 홀로 이런 곳에서 사실까?”
“고승이시니까 그러신 것 아닐까요?”
악불군은 초가 앞으로 가더니 공손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는 천호방의 방주인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어르신의 휴식을 제가 방해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군, 아무도 안 계신 거 아니야?”
담수련이 의아한 듯 묻자 악불군은 고개를 저었다.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 문이 열렸다.
“내가 느껴지더냐?”
광천 대사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어르신 같이 거대한 기를 가진 분을 어찌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나는 너의 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까?”
광천 대사는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는 악불군과 담수련을 보더니 다시 물었다.
“이곳은 어떻게 올라왔느냐?”
“그냥 인연을 찾아서 올라왔습니다.”
“인연을 찾다? 재미있는 말이구나. 허락은 받은 것이냐?”
“공허 대사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장문인이? 허허허~ 결정하랬더니 결국 내게 보냈구나. 그런데 이곳은 올라오는 길도 없지 않느냐? 설마 그것도 장문인이 말해 주었느냐?”
“아닙니다. 그냥 소림사를 구경할 수 있는 허락만 받았습니다. 공허 대사님께서는 부처님과의 인연이 있는지 알아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럼 여기는 어떻게 온 것이냐?”
“본 산의 사찰들을 구경하던 중, 부처님께서 산에 있지 않을까 해서 무작정 올라왔는데, 산이 저를 부르는 듯 기가 흐르더군요. 그래서 그 기를 따라 왔을 뿐입니다.”
순간 광천 대사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그 기가 지금도 흐르느냐?”
광천 대사의 질문에 악불군은 한곳을 보며 말했다.
“저 길을 따라 초옥의 뒤로 흐르고 있습니다. 사실 어르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제가 느낀 기운과 많이 비슷합니다.”
‘달마 조사께서 자연과 동화되어야만 자연기를 느낄 수 있다고 했거늘…… 어찌 이 아이가 저 나이에?’
달마 대사가 칠 년 면벽을 한 달마동은 소실봉을 흐르는 자연기가 모이는 장소였다.
자연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이 자연과 동화되는 자연경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연경의 경지는 무공과 달라, 무재가 뛰어나다 하여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광천 대사는 악불군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곧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자연경만이 아니고 신의현맥까지 지녔구나.”
“그 말은 두 번 들었는데, 무엇을 보고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려서 많은 고생을 하며 세상에 대해 원망도 컸을 텐데 스스로 신의현맥을 이루었으니, 그 올곧은 정신은 천하의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난 과찬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구나.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의 신분으로 누군가의 심기를 생각해 좋은 말을 하면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얘기해야 좋은 중이지.”
“그렇군요. 어르신 같은 분께서 제게 좋은 말씀을 해 주시니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네가 느낀 그 기를 따라 더 가 보겠느냐?”
악불군은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광천 대사의 말 속에서 자신만 가라는 의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은 즉각 악불군의 생각을 읽은 듯, 혼자 가라는 눈짓을 했다.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공손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럼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악불군이 초옥의 뒤로 사라지자 광천 대사는 마루에 앉으며 옆을 손을 치며 말했다.
“너도 앉거라.”
“예.”
담수련이 앉자 광천 대사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말했다.
“역용을 했느냐?”
“예.”
“내게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담수련은 잠시 머뭇했지만 곧 역용을 지우기 시작했다.
“역용술이 대단하구나.”
역용은 하는 것도 어렵지만 지우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담수련은 역용을 순식간에 지웠다.
“좋은 분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역용을 다 지운 담수련의 얼굴을 본 광천 대사의 눈이 커졌다.
“담무룡의 딸이구나?”
“저를 아시나요?”
“예전 네가 어릴 때 본 적이 있지. 그때도 경국지색의 미녀가 될 조짐을 보였는데, 내 생각보다 더 예뻐졌구나.”
“어릴 때 보셨는데 저를 알아보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얼굴은 많이 달라졌지. 하지만 사람의 관상이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 왜 기억이 안 날까요?”
오음절맥을 타고난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아주 어렸을 때 본 사람이나 사건도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광천 대사가 그녀를 보았을 때는 너무 어렸을 때였다.
“너를 납치하기 위해 출동했던 영웅회를 내가 인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네 얼굴을 보고 모두에게 철수하라고 했지. 아주 어렸을 때니 기억도 하지 못할 게다.”
“그랬었군요? 그런데 왜 그냥 철수하셨습니까?”
“글쎄다……. 아마 이렇게 만나라는 부처님의 뜻이 아니었겠느냐?”
“부처님의 뜻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전 부처님을 믿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뜻은 믿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라.”
“그렇다면 어르신께서는 저를 만난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지.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세상을 모두 좌지우지한다는 말은 아니다. 중생들은 스스로의 죄에 대해 벌은 받아야 하니까.”
“그럼 저는 죄인인 아버지를 두었으니 벌을 받아야겠군요?”
“부처님께서는 죄인에게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단다. 네가 불자라면 부처님께 백팔배를 하며 참회를 하면 된다. 물론 그 참회는 진실되어야만 진정한 참회가 된다. 하지만 너는 불자가 아니니 그 죄를 상회하는 선한 행동을 하면 된다. 열 번의 죄를 지었다면 열한 번의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지. 만약 네게 죄가 없다면 그 선함은 네 아버지의 죄까지 어느 정도는 씻어 줄 수 있을 게다.”
담수련은 광천 대사의 말을 들으며 뭔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보니 네게 아주 커다란 임무가 있구나.”
“제게요?”
“저 아이를 진정한 무림의 대협이자 천하의 구성을 만들려면 너의 책무가 막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무슨 의미신지요?”
“네가 잘못된 판단을 한다면 저 아이는 큰 죄를 짓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제 판단이요?”
담무룡을 이용해 협박을 하는 신비 조직의 서찰이 담수련의 머리를 스쳐 갔다.
“저 아이와 너는 천연(天緣)으로 이어져 있다. 그 정도의 연이라면 최소한 삼생의 연은 있을 게다. 아마 보자마자 좋았을 게야.”
“그것이 보이십니까?”
“보이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 너희 둘의 모습을 보면서 아주 끈끈한 기가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보통 인연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믿음이다.”
“하지만 저에게는 오음절맥이라는 불치의 병이 있습니다.”
“오음절맥?”
“예.”
광천 대사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이냐?”
“어려서부터 앓고 있는 병인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새편작 어르신께서도 인정하셨으니 분명합니다.”
“내가 맥을 좀 짚어 볼 수 있겠느냐?”
광천 대사 역시 오음절맥이 고칠 방법이 없는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담수련이 팔을 내밀자 광천 대사는 자신의 기를 그녀의 맥에 불어넣었다.
따스하고 정명한 기가 그녀의 팔을 타고 전신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광천 대사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제 생명이 얼마 안 남았나요?”
광천 대사의 얼굴에 의아함이 보이자 담수련은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음절맥은 확실히 맞구나. 그런데 오음절맥의 증상이 없어.”
“예?”
“내가 의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기의 흐름은 잘 안다. 네 몸의 다섯 개의 중요한 절맥이 음기로 가득 차 있으니 오음절맥인 것은 맞아. 하지만 그 음기가 조금도 네 몸에 퍼져 있지 않구나.”
“제가 빙설초를 구해 계속 복용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빙설초는 음기를 다스리는 약초지, 음기를 제어하지는 못한다고 알고 있다. 빙설초가 아니라 뭔가 다른 힘이 네 몸의 음기를 옴짝달싹 못하게 막고 있다. 내가 보기에, 무공을 익히는 데는 문제가 있겠지만 그냥저냥 건강하게 몇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구나.”
“정말이십니까?”
광천 대사의 말에 담수련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반문했다.
“거짓말은 불가에서 아주 큰 죄란다.”
그는 상대의 심기를 위해 과찬도 안 한다고 한 사람이었다. 담수련은 그의 말을 믿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다. 네가 감사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구나.”
순간 담수련은 악불군이 늦는 것이 생각났다. 그녀를 걱정해서라도 이렇게 늦을 그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악 방주님은 멀리 가셨나요?”
“멀리 안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