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365화>
365화. 고민(1)
“혹시, 궁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계획이 따로 있으십니까?”
태후의 질문에 궁주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특별히 다른 계획은 없어요. 다만 지금처럼 지지부진한 상황은 내 대에서 끝내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십니까?”
“이제부터 거스르는 자들은 직접 없애겠다는 거지요.”
“궁주님, 그것은 전대 궁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육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뭐가 있지요?”
“백 년 전에 전대 궁주님께서 같은 생각을 가지시고 무림을 뒤집어 놓으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에 무림의 힘이 너무 약해져 혈우대마종에게 크게 당하고, 태양천의 침입 때는 힘도 못 쓰고 천하를 헌납하고 말았습니다.”
“그건 계획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으니까요. 온 무림을 이간질해서 서로 싸우게 하지 않았나요? 심지어 황실까지 완전 엉망으로 만들어 악비 장군까지 죽게 만들었으니 나라까지 망한 것이지요. 전 그런 우를 범할 생각이 없어요.”
“설마, 직접 싸울 생각은 아니시지요?”
“왜요? 직접 싸우면 안 되나요?”
“궁주님, 무림은 오합지졸 같지만 막상 정면으로 싸우면 그 힘이 생각보다 강합니다. 본 궁의 피해가 엄청날 것입니다.”
천후의 말에 궁주는 비소를 띠며 말했다.
“전 정면 대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면 돌파하겠다는 겁니다.”
정면 대결과 정면 돌파.
두 단어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삼 후는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전쟁을 벌여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무림인들의 방식대로 그들을 복속시켜 본 궁의 하부 세력으로 영입할 생각입니다.”
“궁주님, 그 방법은 실패할 경우 본 궁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나 무림 전체의 합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강한 세력으로 일컫던 천년마교 역시 정체가 드러나면서 무너졌습니다.”
가장 은밀한 비밀 조직을 자랑하던 천년마교는 측천무후에 의해 본거지가 밝혀진 후, 천하 전체의 공격을 받으며 멸교되었다.
측천무후궁이 그토록 긴 기간 동안 숨어서 천하를 분열시키며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린 것도 그 이유였다. 단일 세력으로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 천하 전체와 싸울 수 없음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의견이 아니라 명령이에요. 삼 후께서 제 명을 거역한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겠지요?”
순간 삼 후의 표정이 변했다.
삼 후의 무공은 무황들과 싸워도 며칠 밤을 싸워야 승부가 날 정도로 강했다. 하지만 그들 셋이 합공을 해도 궁주를 이긴다는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강했다.
“궁주님, 저희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혈교의 교주가 혈우대마종일지도 모른다는 분석입니다. 궁주님의 무공이 가히 천하무적이지만 혈우대마종이라면 승패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혈교와 중원 무림 간에 싸움을 유도하여 양패구상을 하면 그때부터 궁주님의 계획대로 정면 돌파를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태후의 말에 궁주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 계획은 이미 세운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지 않나요?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성과도 없다면 실패한 계획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 그걸 계속 밀고 나가자는 것인가요?”
“지금 천호방의 악불군이 정파들을 찾아다니며 혈교와 본 궁을 대적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혈교의 정보는 저희가 이미 열 곳이나 전달했지만 본 궁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결국 악불군의 행보는 혈교와 싸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후의 보고를 듣고 이용하기로 했는데, 천후는 제거하고 싶어 하고, 태후는 또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으니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정도 사안마저 세 분의 의견이 이렇게 다르다니, 심히 걱정되는군요.”
“각기 맡은 책임이 다르다 보니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견이 아니라 서로의 공을 먼저 내세우기 위한 갈등 아닙니까?”
궁주의 비꼬는 말투에 태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후(武后)께서는 지금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태후의 입에서 궁주가 아닌 무후라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호호호호! 태후께서 화가 많이 나셨나 봐요? 하지만 부르려면 제대로 불러 주셔야지요. 전 예전의 무후가 아니라 측천무후예요. 설마 제게 반기라도 드실 생각이신가요?”
“우리 삼 후는 궁주님께서 폭주할 경우 그것을 막을 권한이 있습니다.”
“세 분이 만장일치로 결정하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세 분이 언제 의기투합한 적이 있었나요? 이제부터 측천무후궁은 제가 직접 지휘합니다.”
말을 마친 측천무후는 손가락을 공중으로 들더니 살짝 까닥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세 무더기의 서류가 밖에서 날아왔다.
“이것이 뭡니까?”
삼 후들은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반문했다.
“그 서류에 제가 그동안 분석한 세 분의 문제점과 새로운 계획이 적혀 있습니다. 우선 읽어 보세요. 제가 아무리 직접 지휘를 하겠다고 천명했지만, 지금까지 본 궁을 끌어오셨고 저를 키워 주신 세 분의 권위까지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태후와 천후는 상당히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성후는 이미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듯 아무 말 없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런 성후의 행동에 태후와 천후도 더 버티지 못하고 서류를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모두의 표정이 변했다.
“궁주님, 마 황후를 암살하는 것은 너무 급진적입니다.”
“주원장이 마 황후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계획에 큰 차질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긴 합니다. 하나, 마 황후는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텁습니다. 또한 여자들은 죽이지 않는다는 본 궁의 불문율에도 어긋납니다.”
“본 궁의 대계에 방해될 경우 여자를 죽인 적이 여러 번 있는 것으로 아는데, 뭐가 다르지요?”
“그게…….”
“죽였을 때 어떤 상황이 될지 판단이 안 된다는 것이 진짜 이유가 아닌가요?”
“솔직히 그 이유도 있습니다. 주원장은 말 그대로 패왕입니다. 마 황후를 암살했을 경우, 그자의 흉포한 성정으로 미루어 수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만 명 중에 태후와 태후의 세력까지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우시겠군요?”
“걸리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황궁에 심어 둔 세력을 전부 잃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두려운 것입니다.”
“보통 어떤 일을 벌였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를 판단하는 것을 예측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예측이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요. 태후의 예측이 틀릴 수도 있으니까 실행하세요.”
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완전히 수하 다루듯 명령을 내리는 상황은 전대 궁주에게서도 받은 적이 없었던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천후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천후께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 보네요?”
“악불군을 죽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기에는 제거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후께서는 악불군을 죽이자고 주장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아닌가요?”
“악불군을 통해 혈교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처음에는 저도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를 그대로 두는 것은 위험하다 판단했습니다.”
“그럼 죽이자고 하면 찬성해야 하지 않나요?”
“사실은 지금 운우각에서 악불군에게 대해 몇 가지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그게 성공한다면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담무룡을 이용해 담수련을 회유하여 악불군을 수족처럼 쓴다는 계획 말인가요?”
측천무후의 반문에 천후의 안색이 변했다. 아직 보고도 하지 않은 사안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천후 모르게 보고한 자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천후가 답이 없자 측천무후가 다시 말했다.
“천후의 심복 중에 누군가 배신했구나 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천후의 수하이기 전에 제 수하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 아닙니다. 궁주님 말씀대로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이용 가치가 클 것입니다.”
“그 계획의 결과는 언제쯤 나오지요?”
“열흘 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실패하면 그때부터 악불군 제거를 시작하세요.”
“알겠습니다.”
“성후.”
“예, 궁주님.”
“검후와 무후에게 거기에 적힌 대로 임무를 맡기세요.”
“둘의 사이가 아직 좋지 않은데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임무에 실패한다면, 누가 잘하고 못하고는 따지지 않고 둘 다 후의 지위를 박탈할 것이라고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자, 그럼 태후만 남으시고 두 분은 돌아가세요.”
천후와 성후가 나가자 측천무후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떼어 냈다.
지금까지의 대화로 미루어 최소한 육십 살은 넘었을 그녀의 모습은 놀랍게도 이십 대 정도로 보였다.
서릿발이라도 날릴 듯 차가운 표정의 그녀의 몸에서는 검후에게서 나타나던 검기가 온몸을 두르고 있었다.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태후의 말에 측천무후는 냉소를 보이며 말했다.
“제게 불만이 있으실 텐데 말씀하세요.”
“궁주님을 어렸을 때부터 옆에서 보았습니다. 언제나 신중하고 실수는 용납하지 않으셨지요.”
“그 말은 제 계획이 신중하지 않다는 의미시겠지요?”
“지금 본 궁의 힘은 강합니다. 하지만 천하를 상대할 정도는 안 됩니다. 궁주님의 계획은 실패했을 경우 본 궁의 존립까지 위험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태후께서는 제게 그러셨어요. ‘기회가 생길 때 눌러라.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기억나시나요?”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때 같이 했던 말이 있지요.”
“기억해요. ‘강하지 않으면 기회는 착각이다.’라는 말도 하셨지요. 그래서 계획을 바꾼 겁니다.”
“궁주님의 무공이 강하신 것은 압니다. 하지만 혈우대마종이나 무림의 무황들의 협공까지 이길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다고 확신하시지요?”
“전대 궁주님께서 태양천주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태양천주는 사대무황 중 한 명인 검황에게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혈우대마종은 검황을 포함한 사대무황의 합공에도 삼 일 밤낮을 싸울 정도로 강했습니다. 전 객관적인 비교를 한 것입니다.”
말하던 태후는 충격을 받은 듯 즉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자세를 계속적으로 바꿔 나갔다. 놀랍게도 그것은 천륭검보의 자세들이었다.
태후는 무슨 이유인지 계속 자세를 바꿨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녀의 입가에는 피가 비치고 있었다.
“서, 설마…… 천마의 무공을 완성하셨습니까?”
태후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는 측천무후를 보며 감격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년마교를 세운 천마는 고금 십대고수 중 첫 번에 올라 있었다. 천마의 사후, 천년마교에서도 그의 무공을 익힌 자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이제 제 계획대로 해도 될까요?”
태후는 그녀의 앞에 털썩 엎드렸다.
“당연합니다. 천마가 되셨는데 불가능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 *
하남을 넘어 섬서에 들어선 악불군은 작은 현에 도착하자 주루에 들렸다.
담수련은 연화와 추국이 적어 준 보고서를 마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도 계속 분석했다. 그리고 간세로 의심되는 잠봉단원을 골라냈다. 세 명이나 되었지만 그중 누가 간세인지는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다.
“소군.”
자리에 앉은 담수련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악불군을 불렀다.
“예.”
“…….”
“말씀하십시오.”
“아, 아니야.”
그러나 담수련은 결국 또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담수련이 말하지 않으면 묻지 않는다’가 악불군의 신조였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한 듯 그녀를 잠시 주시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에 대해 소식을 들으신 것이 있으십니까?”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이런 대화술에 넘어가 자신의 속을 드러낼 그녀가 아니었지만, 악불군을 앞에 두고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
“아가씨를 이렇게 고심하게 만들 수 있는 분이 가주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악불군은 자신에게도 말하지 못할 정도의 고민이 뭘까 생각하다가 담무룡 외에는 없다는 판단을 했다.
그리고 생각이 맞았음을 알자 얼굴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