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366화 (366/472)

<천검지애 366화>

366화. 고민(2)

“표정 풀어, 소군의 얼굴이 변하면 저들의 간세가 내가 말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제게 말하면 가주님께서 위험해질 수 있는 겁니까?”

“소군이 알면 아버지를 죽인다고 했어.”

순간 악불군은 살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효를 중시하는 교육을 받은 그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언제나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놈들이 자식에게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만행을 감히 담수련에게 행한 것이다.

“언제 왔습니까?”

“그게…… 개방에서 나와서 첫날…….”

담수련은 즉시 말하지 않은 것이 미안한 듯 주저하며 답을 했다.

“개방에서 나와서 첫날이면 어디에서?”

“객잔 내 침상 속에 서찰이 있었어.”

악불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상처를 입어 고통이 심할 때조차 그의 표정은 담담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담수련의 침상 속에서 서찰이 있었다는 사실을 듣고서는 도저히 담담히 있을 수 없었다.

악불군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잠시 생각했다.

개방에서 나온 후 처음 묵었던 객잔의 상황을 반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객잔을 잡은 것은 최 호법이었어……. 그리고 아가씨의 방을 정하고 정리한 것은 사화와 잠봉단이었고…… 아가씨는 그때 나랑…….’

기억력이 좋은 악불군은 그 당시 상황을 완벽하게 그려 낼 수 있었다.

“아가씨, 서찰을 침상 속에 넣어 둘 기회는 아가씨와 제가 식사를 할 때뿐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아가씨, 만약 그렇다면…….”

“더 말하지 마. 아직 결론을 내기 전까지는 누구든 의심하고 싶지 않아.”

의심할 사람이 모두 담수련과 같이 무공을 배우고 언제나 그녀의 옆에서 보호해 주던 측근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무척이나 힘들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 그 서찰을 제가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 외고 있으니까 말해 줄게.”

담수련은 전음으로 서찰의 내용을 말해 주기 시작했다.

악불군은 주위의 눈을 의식해 표정은 관리하고 있었지만 가슴이 부글거릴 정도로 대로하고 있었다. 아마 태어나서 지금처럼 화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하지 않으신 겁니까?”

“……미안해. 아버지 목숨도 달려 있고…….”

“제가 들었다고 티를 내겠습니까? 그동안 아가씨께서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를 생각하면 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혼자 애태웠을 담수련을 생각하니, 악불군은 마음이 아팠다.

“내가 자꾸 소군만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아가씨께서 힘들어지는 것이 저를 가장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내 이놈들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휴우~”

담수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그녀였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가씨.”

“응?”

“오늘 그들이 원한 대로 연락을 하십시오.”

“오늘?”

“예.”

“소군은 알면 안 된다고 했어.”

“적은 알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 * *

“각주님, 담수련이 기호를 그렸다고 합니다.”

운우각주는 가면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상당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언제 올 수 있다고 하더냐?”

“도착할 장소만 알려 주면 오늘 밤이라도 데려올 수 있다고 합니다.”

“가장 가까운 본 궁의 안가가 어디냐?”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런 오늘 밤에 그곳으로 데려오라고 전해라. 그리고 악불군에게 말하지는 않았겠지?”

“은화의 전언에 의하면, 악불군이 알았다면 벌써 난리가 났을 거랍니다. 그런데 조용한 것을 보면 모르는 것이 확실하답니다.”

“일이 생각보다는 잘 풀리는군. 그럼 나가 봐라.”

“예!”

보고자가 나가자 운우각주는 천장을 보며 전음을 날렸다.

[소 단주.]

[예!]

[대화는 다 들었지?]

[예, 다 들었습니다.]

[그럼 섬전천후단을 이끌고 안가로 가서 준비하고 있어라.]

그녀는 섬전천후단의 단주인 소혈선이었다. 보통은 대주들이 지휘하는데 단주가 직접 나왔다는 것은 이번 일을 천후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예!]

소혈선이 사라지자 운우각주는 밖을 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초은주는 들어와라.”

그러자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내부 영주 다섯 명을 이끌고 천호방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가라. 내부 영주들은 은화가 담수련을 데리고 나오면 호위하라고 하고, 너는 악불군이 객잔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라. 혹시 미행하는 자가 있으면 은화를 추격하지 못하도록 목숨을 걸고 그들을 막아라.”

“존명.”

죽으라는 명에도 초은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크게 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번 일까지 실패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은우각주는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모든 것이 이번 일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 * *

“추국, 흑란.”

“예, 아가씨.”

“오늘은 너희들 여기서 자지 말고 다른 방에 가서 자.”

사화는 매일 두 명씩 번갈아가며 담수련의 방에서 잠을 잤다. 근접 경호를 위해서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추국이 깜짝 놀라 물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집중해서 생각할 일이 좀 있어서 그래.”

추국과 흑란은 근래 계속 담수련의 표정이 안 좋았다는 것을 아는지라 이해한다는 듯 답했다.

“그럼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그래, 가 봐.”

추국과 흑란이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가자 담수련은 급히 외출복을 걸쳤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소군은 어디 있는 거지? 분명 나를 가까운 데서 지켜 주고 있을 텐데, 보이지가 않네?’

담수련은 악불군이 보이지 않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악불군을 믿기 때문이었다.

반 시진이 흘렀다.

‘이곳에서 나를 데리고 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

그때 문이 열리며 잠봉단원이 한 명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담수련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잠봉단원을 지휘하는 대주 홍유경이었다.

“가실 시간이 됐습니다.”

“홍 대주가 간세였어?”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한 담수련의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홍유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려서부터 같이 지냈는데, 언제부터 신비 조직의 명을 받기 시작한 거야?”

“시간이 없으니 우선 이곳을 나간 후에 얘기하시지요.”

말을 마친 홍유경은 빠르게 담수련의 앞으로 다가서더니 마혈을 짚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담수련을 어깨에 짊어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 * *

[은화가 담수련을 데리고 나왔다. 둘은 은화를 호위하고 셋은 미행하는 자가 없는지 살펴라.]

[예!]

명을 받은 다섯 명의 내부 영주들이 홍유경의 뒤를 따라 몸을 날리자, 초은주는 은밀한 움직임으로 객잔 쪽으로 이동했다.

객잔 정경이 보이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간 그녀는 안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특급 살수에 준하는 살수공을 익힌 그녀는 객잔 주위를 최소한 열 명 이상이 몸을 숨긴 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숨까지 죽였다.

이번에 담수련까지 데리고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이 바로 홍유경이 경계할 시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뒷짐을 진 채 생각에 잠겨 있는 한 젊은 무사가 들어왔다.

‘악불군이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의 모습에 대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악불군이 아직 있다는 것이 확인됐으니, 이번 작전은 완벽한 성공이구나.’

초은주는 회심의 미소를 그리더니 천천히 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은 것들이군. 감히 담 군사님을 납치할 생각을 하다니…….”

흑석영이 중얼거리자 그의 옆에 사효조가 스르르 나타나더니 말했다.

“신비 조직이란 놈들, 진짜 소름 끼치지 않냐?”

“그러게 말이다. 홍 대주는 어릴 때부터 잠룡세가에서 담 군사님이랑 같이 자라고 무공도 모두 거기서 배웠다고 들었는데 간세라니……. 백인막에도 간세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몰라.”

그러자 땅 밑에서 나타난 대독관이 맞장구를 쳤다.

“이번 작전은 아무도 몰라야 한다.”

흑석영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불군은 이번 계획에 대해 오직 네 명의 방주 호법에게만 말해 주었다.

“주군께서 왜 그렇게 신중하신지 이제 알 것 같다. 그런데 최욱걸!”

그러자 뒷짐을 진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악불군이 고개를 돌렸다.

“왜?”

“너 정말 언뜻 보면 완전히 주군 같다.”

초은주가 본 악불군은 역용한 최욱걸이였다.

“담 군사님, 역용술이 이제 신경에 든 것 같지 않냐? 정말 빨리 하시더라.”

“빠르기만 하냐? 알고 있으니까 가짜구나 하지, 모르고 봤다면 진짜 주군인 줄 알았을 거야.”

역용술은 정확한 변신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속도도 중요했다. 적에게 쫓기는 와중에 바뀌어야 하는데, 늦는다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소리에 최욱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직은 그의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호법님! 큰일 났습니다!”

나타난 사람은 매향이었다.

“무슨 일이냐?”

“아가씨께서 사라지셨습니다.”

흑석영은 다급한 표정의 매향을 보며 다시 물었다.

“담 군사님과 같이 자는 너희가 아니더냐?”

“오늘은 생각할 일이 있다고 혼자 계시겠다고 하셔서…….”

“담 군사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호해야 할 너희들이 곁을 떠나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우선 빨리 아가씨를 찾은 후에 벌은 받겠습니다.”

“방주님께서도 지금 안 계신다. 아마도 두 분이 같이 나가신 것 같으니 너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흑석영의 말에 그제야 매향의 얼굴에 안도감이 나타났다.

매향이 돌아가자 흑석영은 모두를 보며 말했다.

“반 시진이 지난 후에 따라오라고 하셨다. 슬슬 떠날 준비하자. 그리고 최욱걸 너는 이곳 잘 지켜라.”

“나도 가고 싶은데?”

“주군께서 우리 중 한 명은 남아서 이곳을 지키라고 하셨다. 어차피 넌 지금 주군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네가 남는 게 좋다.”

백인막 시절부터 흑석영은 모두의 지휘자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권위는 악불군을 제외하면 백인막 살수들에게는 절대적이었다.

* * *

산속 길을 반 시진 넘게 달린 홍유경의 앞에 가마와 함께 열 명의 여인들이 나타났다.

그녀를 마중 나온 내부 영주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홍유경을 보자 허리를 숙였다.

“은화님께 인사드립니다.”

측천무후궁에서 은화들의 지위는 무공의 높낮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단주급으로 인정했다. 그만큼 그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홍유경은 아무 말 없이 담수련을 그들에게 넘기고는 급히 오던 길을 돌아 달려갔다. 이미 정체가 드러난 것을 모르는 그녀는 빨리 돌아가 모른 척하고 간세로서의 임무를 계속 수행할 심산이었다.

홍유경이 사라지자 그녀들은 담수련을 가마 안에 실었다.

그때, 홍유경을 은밀하게 호위해 온 내부 영주들이 도착했다.

“초은지는?”

가만 안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불군이 있는지 확인하고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곧 도착하실 것입니다.”

“미행은 없었느냐?”

“저희가 십 장 단위로 따르면서 은화님의 흔적을 지웠습니다. 미행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너희는 이곳에 숨어서 이각 정도 기다렸다가 따라오너라. 가자.”

가마 안 여인의 명이 떨어지고 가마가 홀로 공중으로 날아가자 다른 내부 영주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매복했다.

이미 미행자가 없다고 확인했음에도 이중 삼중으로 조심하는 그녀들이었다. 그동안 그녀들의 꼬리를 잡아내지 못한 이유였다.

* * *

“각주님, 완벽하게 담수련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은우각주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나타났다.

안가로 옮긴 은우각주는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번 일로 그녀의 미래는 물론 잘못하면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쯤 왔느냐?”

“일각 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은우각주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혈교와 무림과의 전쟁만 일어나면 되는가…….’

그녀들의 정보가 맞다면, 담수련만 잡으면 악불군을 수족처럼 부리는 것은 여반장(如反掌)이었다.

기쁨에 취해, 그녀는 일이 너무 수월하게 풀린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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